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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목사의 직설/直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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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목사의 직설/直說

Author: 문경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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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전교회 목사 문경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천국에 가서 무엇 하고 살래?” 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역시 대답을 제대로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톺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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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상담: 010-8618-1000
· 후원/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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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믿어도 될까 | 從心所欲不踰矩 | 사실(ἀλήθεια)과 자유 · 요.3,16~21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사실의 삶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 영(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이 드러나게 하려면 · 영의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본 영생과 심판의 현재성: 현대 한국 교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 서론: 문제 제기 현대 한국 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강단은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는 탐욕의 메시지로 채워지고, 신앙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 이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복음에 대한 관심은 실종되었고, 목회자들은 교회를 등진 채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이용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교회가 복음의 핵심 가치인 '영생'의 참된 의미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세상의 가치에 잠식당한 교회는 신앙의 본질을 잃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신학적으로 깊이 재탐구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이 말씀은 단순히 구원의 공식을 나열한 주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영생'과 '심판'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개념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통속적인 이해를 넘어 이 개념들의 본질적 의미를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현대 교회의 병리 현상을 진단하고 치유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본 에세이는 설교 본문에 제시된 핵심 헬라어 개념들을 분석의 도구로 삼고자 한다. 인간 내면의 영적 실체인 '프뉴마(πνεῦμα)', 구원의 유일한 길을 의미하는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ὴς)', 그리고 삶의 기준이 되는 사실 그 자체를 뜻하는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과 심판의 '현재성'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1. 영적 위기의 근원: 영(πνεῦμα)과 육체의 갈등 모든 신앙적 고뇌의 근원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영(πνεῦμα)'과 '육체(σάρξ)'의 근본적인 대립에 있다. 이 내면의 갈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직면한 문제의 뿌리를 진단하는 출발점이다. 교회가 물질주의와 정치적 편향성에 매몰되는 현상은 결국 이 영적 투쟁에서 육체가 승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서 이 갈등의 핵심을 명확히 제시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영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프뉴마, πνεῦμα)'을 무조건 '성령聖靈'으로만 번역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헬라어 'πνεῦμα'는 본래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바울의 권면은 외부에서 오는 성령의 능력에만 의존하라는 수동적 명령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내재한 영적 실체, 즉 '나의 영'을 깨워 그 인도를 따라 살라는 능동적 촉구에 가깝다. 문제는 '육체의 소욕'이 끊임없이 이 영을 거스른다는 점이다. '육체가 전부인 줄 알고 육체를 좇아 사는 삶'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기괴한 모습에서 구체적으로 발현된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트럼프가 구하러 오기를 기도하고, 워싱턴까지 날아가 자국 대통령을 내쫓아 달라고 외국 지도자에게 애원한다. 자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미국의 무역 정책(현대차 조지아 공장 사태)에 박수를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보수 논객이 이를 두고 "그들이 무슨 보수냐, 매국노지"라고 일갈했을 정도다. 이는 영의 요구를 묵살하고 육체의 본능적 욕망—생존과 이익 추구—에 굴복한 명백한 증거다. 복음을 자신의 정치적, 물질적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외식'이며, 영적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독소와 같다. 진정한 신앙적 자유는 육체의 요구를 무분별하게 따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면의 영을 살려내어 하나님의 뜻과 나의 원함이 일치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이 주체가 되는 삶이야말로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영생'의 참된 모습이며,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탐구할 주제이다. 2.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의 재해석: 관계적 삶으로서의 구원 '영생'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이지만, 그 의미는 종종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통속적 이해에 머물러왔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라는 양적 개념을 넘어, 삶의 질적 변화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미래의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꾸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최대의 난제가 되는 이유는 자신의 주체를 '육체'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 내 안에 본디 심겨 있던 영(πνεῦμα)을 살려내고 그것을 나의 참된 주체로 인식하게 될 때, 육신의 죽음은 더 이상 근본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의 중심이 된 사람에게 육체의 소멸은 존재의 끝이 될 수 없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이 깊은 영생의 차원에 대한 관심 없이, 오직 땅의 것, 즉 '육체가 주는 희망'에 집착한다는 점에 있다. 육체가 주는 희망은 본질적으로 소유에 기반한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혹은 가진 것을 지키려는 불안 속에서 신앙은 결국 공허함에 이를 수밖에 없다. 육체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덜 가졌거나 다 가졌거나 그게 그거"인 상태로 귀결할 뿐이다. 더 가질 능력이 없거나, 혹은 모든 것을 다 가져버렸을 때,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 이것이 육체를 따른 삶의 필연적 종착지이며, 바로 이 절망의 지점에서 우리는 영생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급진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영생은 소유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이다. 그것은 육체의 요구에 휘둘리는 삶이 아닌, 하나님과의 교감 속에서 영이 주도하는 다른 차원의 삶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생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셨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구원의 유일한 길로 인도한다. 3. 구원의 유일한 길: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삶을 주시기 위해 제시하신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독생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구원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많은 오해를 낳았던 이 단어는 혈연적 관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구원 계획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독생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모노게네스 휘오스(μονογενὴς υἱός)'이다. '모노(mono)'는 '유일한, 하나'를, '게네스(genēs)'는 '종류, 기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노게네스'는 하나님이 아들을 단 한 명만 낳았다는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기능적 의미를 갖는다. 전광훈 목사가 자기 아들을 '독생자'라고 칭했을 때 신학적 무지와 자기 욕망이 드러났듯, 이 단어는 혈연적 유일성이 아닌 구원 계획의 유일성을 가리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수많은 자녀들 가운데서,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하여 온전한 자녀로 나아가게 할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자 '특별한 계획' 그 자체이신 분이다. 이 개념은 구약의 '놋뱀 사건'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은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는 의학적 이치에 맞지 않는 비상식적인 처방이었다. 따라서 놋뱀을 쳐다보는 행위의 핵심은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성과 합리적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믿음의 결단,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본질이다. 이처럼 예수라는 '유일한 방법(μονογενής)'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구원의 길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길만을 따르는 행위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λόγος로고스)이자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일한 길을 거부하는 자, 즉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가? 이는 우리를 심판의 문제로 이끈다. 4. 심판의 현재성: '크리시스'(κρίσις)와 '케크리타이'(κέκριται) 일반적으로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미래의 사건으로 인식되지만,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요한에게 심판은 먼 미래에 기다리는 두려운 이벤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인해 이미 시작된 '현재적 사건'이다. 빛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심판은 이미 개시되었다. 이러한 심판의 현재성은 요한복음 3장 18절의 선언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헬라어 원문에서 '케크리타이(κέκριται)'라는 완료형 동사로 쓰였다. 헬라어의 완료형은 과거에 일어난 행위가 현재까지 지속적인 결과를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이 '이미 완료되어 그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종말과 심판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예수에 대한 우리의 반응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현실이다. 더 나아가 '심판'으로 번역된 '크리시스(κρίσις)'의 본래 의미는 '판단' 또는 '분리'이다. 예수라는 절대적인 빛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빛에 속한 것과 어둠에 속한 것은 필연적으로 분리된다. 각자의 행위와 소속이 명백히 드러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크리시스', 즉 심판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뒤엎으신 이유는, 그 부패한 장소를 가만두었다가는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빛은 거짓을 폭로하고 분리시킨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하신 예수를 거부하는 행위는, 스스로 어둠에 속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그 순간 이미 심판의 상태, 즉 하나님과의 분리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종말과 심판은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이다.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현재적 결단이 곧 영생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를 거부하는 현재적 불신이 곧 심판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생명의 빛이신 예수를 거부하고 스스로 심판의 상태인 어둠을 선택하는 것인가? 5. 심판의 근거: 빛과 어둠, 그리고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추구 사람들이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선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기저에는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어떻게든 자신을 보존하려는 생물학적 유기체(有機體)의 자기중심적 생존 본능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 심리적 기제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서 원형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숨는 행위'는 복잡한 도덕적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는 유기체의 본능적 반응이었다. 무언가 감춰야만 할 것이 있을 때, 이익 관계가 걸려 있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이것이 바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 이유이다.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고 존재의 기반을 위협하는 빛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둠의 행위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 바로 '진리를 좇는 자'의 태도이다. 여기서 '진리'로 번역한 헬라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도리가 아니다. 빌라도가 예수의 재판정에서 "진리가 무엇이냐(τί ἐστιν ἀλήθεια)?"라고 물었을 때, 그는 철학적 담론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fact)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처럼 '알레데이아'의 핵심 의미는 '사실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실재'이다. 따라서 '알레데이아를 행한다(ποιῶν τὴν ἀλήθειαν)'는 것은, 신비로운 영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마이크를 마이크로, 카메라를 카메라로, 의자를 의자로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무슨 이득을 취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일단 접어두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져 사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사실'을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생존 본능에 속박된 생물학적 유기체를 넘어,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감하는 영적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을 마주할 용기, 그것이 바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문이다. 결론: 사실을 따르는 삶, 지금 여기의 영생 본 에세이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중심으로, 영생이란 죽음 이후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과의 현재적 관계이며, 심판이란 그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초래된 현재적 분리 상태임을 논증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 있음을 의미한다. '푸뉴마', '모노게네스', '알레데이아'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의 분석은 현대 한국 교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을 명확히 조명한다. 교회가 물질주의와 정치적 편향성에 빠져드는 것은, 결국 내면의 영('푸뉴마')의 소리를 억누르고 '이익'을 '사실('알레데이아')'보다 우선시하는 육체의 본능적 욕망을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유일한 길('모노게네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정치적, 물질적 탐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제 현대 신앙인과 한국 교회는 실존적 결단 앞에 서 있다.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학적 유기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이익이 아닌 '사실'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치열한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 교감하는 영적 존재가 될 것인가. 자기 생각과 이익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오직 '사실'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인 예수를 따르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육체의 본능을 넘어 영을 살리고, '지금 여기서' 영생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참된 신앙의 여정이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하나님을 믿어도 될까 | 從心所欲不踰矩 | 사실(ἀλήθεια)과 자유 · 요.3,16~21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사실의 삶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 영(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이 드러나게 하려면 · 영의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영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설교 녹취록 발췌문입니다. 설교자는 기독교 신앙인이 평생 해결해야 할 난제는 '하나님을 믿어도 될까'라는 의문이라 언급하며, 참된 신앙은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독생자의 의미를 재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λόγος로고스)을 실현할 유일한 분임을 설명합니다. 궁극적으로 설교는 신앙의 핵심 가치인 영생을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실(ἀλήθεια알레데이아)을 좇아 사는 삶으로 실현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영생, 지루하지 않을까 | 무엇을 영(πνεῦμα)이라고 하는가 · 요.3,8~15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영생 | 끝없이 살아서 뭐하게? 지루하지 않을까? · 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 · 바람과 영이 무엇이 같은가 --- 영생에 대해 우리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5가지 사실 인생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손에 쥔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부와 명예, 권력을 넘어 인간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삶’일지 모릅니다. 죽음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는 소망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욕망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영생'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흔히 무엇을 떠올립니까? 대부분은 단순히 '죽지 않고 아주 오래 사는 것'을 상상합니다. 첨단 과학 기술로 수명을 150세, 200세까지 연장하는 미래를 그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이처럼 단순한 시간의 연장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깊고 충격적인 차원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영생에 대해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그 놀라운 진실 5가지를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영원히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 있다 절대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불멸을 꿈꿉니다. 고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헤맸듯, 현대의 권력자들 역시 과학 기술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합니다. 최근 시진핑과 푸틴의 사적인 대화가 언론에 포착되었습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인간의 장기를 끊임없이 이식하며 150살까지, 심지어 불멸에 이를 수 있다는 기대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영생이란 '불로장생', 즉 육체의 소멸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 삶이 과연 축복일까요? 처음에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기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은 점차 빛을 잃고 지루함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결국 끝없는 권태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고,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먼 미래의 법정 최고형은 사형이 아니라 '마음대로 죽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이유는 '죽음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한하기에 현재의 순간이 소중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한 동력이 생겨납니다. 죽음이 사라진다면 삶의 의미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2. '영생'은 죽음 이후가 아닌, 바로 지금 시작되는 '삶의 방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시간의 '양'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래 사는 것(longevity)'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a different way of being)'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의 상태입니다. 요한복음은 영생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여기서 '안다'는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단순히 머리로 정보를 이해하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이는 부부가 서로를 알듯,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생이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영생을 얻는 길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 세상의 방식은 성공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쌓아가는 '더하기'의 법칙을 따릅니다. 하지만 영생으로 가는 길은 정반대입니다. 부와 명예, 율법적 의까지 모든 것을 가졌던 한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관리가 바로 니고데모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모든 것을 가졌던 그는 이 한 가지, 즉 '내려놓음'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누가복음 18장 23절) 성경은 그가 '심히 근심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심히 근심하다'는 헬라어로 '페릴리포스(perilypos)'인데, 이는 단순한 실망을 넘어 '극도로 슬픈 상태', 영혼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굳게 붙들고 있던 육체의 소욕, 즉 세상의 것들이 영생의 문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깨달은 데서 오는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더 가지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세상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 '빼기'의 역설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4. '거듭남'은 신비한 체험이 아닌, 세상을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예수님은 '거듭남(하늘로부터 태어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체험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인식하는 '관점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바람과 영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πνεῦμα)'로, 바람과 영을 동시에 뜻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분명히 존재함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 즉 세상을 보는 눈과 삶을 해석하는 의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경에서 '성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단순히 '푸뉴마(영)'일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오는 어떤 신비한 힘이라기보다, 우리 안에 본래부터 있는 하나님과 통하는 생명의 원리로서의 '영'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바로 이 내면의 영이 깨어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자아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5. 믿음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처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그들의 상태를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기록하지만, 원문은 훨씬 더 본질적인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 백성의 네페쉬(נֶפֶשׁ)가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네페쉬'는 혼 또는 목숨의 숨결을 의미하는데, 그들의 영혼의 호흡이 가빠지고 인내심이 바닥나, 삶 자체가 지긋지긋해진 실존적 탈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처방은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독이 온몸에 퍼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놋 조각을 쳐다본다고 낫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바로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의 차이입니다. '땅의 일'은 합리적인 해독제나 의학적 치료 같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기반한 해결책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늘의 일'이었습니다. 이치를 따지며 버티는 자는 죽었고, 말도 안 되는 처방을 신뢰하고 쳐다본 자는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것의 본질, 즉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결론: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무한한 시간의 연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며,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역설적인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영생은 끝없는 삶이라는 저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알아가는 축복이며, '더하기'가 아닌 '빼기'를 통해, '관점의 전환'을 통해, 그리고 '비합리적인 신뢰'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결국 질문은 이것 하나로 귀결됩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눈에 보이는 육체의 요구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관계 맺는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영생, 지루하지 않을까 | 무엇을 영(πνεῦμα)이라고 하는가 · 요.3,8~15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끝없이 살아서 뭐하게? · 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 · 바람과 영이 무엇이 같은가 ---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난 영생의 개념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합니다. 영생이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의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던 니고데모와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한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주요 예시로 사용되어, 현세적 삶에 매이지 않고 영(πνεῦμα)을 따라 사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구약 성경의 광야의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믿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명하며, 청중에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
·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요.3,1~7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삶을 깨달으면 · 하나님께서 이 삶에 관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까 --- 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이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나의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알아차릴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살아가며, 부족함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느낍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고통과 허전함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삶의 근원이자 제일 원인인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삶의 억울함을 해소할 수 없는 상황,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드물며,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한계를 느끼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갈구합니다. 2. 삶의 고통과 욕망은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삶의 고통과 욕망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중요한 동기입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가 고통의 다른 모습일 수 있으며, 희망과 절망 모두 고통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즉 "이럴 수 없는 일"이라는 본질적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의구심은 삶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깨닫게 하고, 결국 이 삶 너머의 무한한 세계, 즉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는 이 세상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3. 기독교와 불교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왔나요? 기독교와 불교는 공통적으로 "삶이 이렇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불교는 삶의 이치를 따져 깨달음으로 고통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붓다, 달마, 혜능, 지눌, 성철로 이어지는 불교의 계보는 "삶을 깨닫자"는 치열한 여정을 보여주며, 돈오(頓悟, 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 점진적 수행)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삶의 "제일 원인"을 하나님으로 특정하고, 그 하나님을 통해 삶의 의구심을 풀고자 합니다. 깨달음은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수긍하며 본질을 추구하게 만드는 태도로 해석됩니다. 4. 니고데모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명문 거족 출신으로, 부유하고 헬라-로마 세계와 연관이 깊은 유대인의 지도자, 즉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삶 너머의 것을 생각하는 사색적인 인물이었으며, 정의로웠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당시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해서라기보다는, 타인의 방해 없이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해석됩니다. 낮과 밤의 사회적 역할이 달랐던 시대에,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탐색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행적, 특히 '표적(σημεῖον세메이온)'을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을 인식했음을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단순히 기적 자체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기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목적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을 알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알다(에이도)'는 단순히 '보다'를 넘어 '깨닫다'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6.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γεννηθῇ ἄνωθεν겐네데 아노덴)"은 단순히 반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ἄνωθεν아노덴'은 "위로부터, 위에서, 근원부터"라는 뜻으로,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를 통해 육체적으로 한 번 태어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의지와 영(πνεῦμα프뉴마)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영'은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인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즉, 거듭남은 단순히 두 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지하고 그분과 관계 맺는 영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7.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능력은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3절)" "들어갈 수 없다(5절)"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바실레이아 두 데움)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능력(δύναμαι뒤나마이)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능력은 육체적인 삶을 통해 육체를 넘어 하나님을 의식하고 알아차릴 때 생겨납니다. 즉, 삶의 모든 사건과 경험 속에서 그 이면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체는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의식을 잉태하는 요람과 같으며, 인생은 이 육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는 여정입니다. 이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8.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잠언 3장 6절의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에서 '인정하라'는 히브리어 'יָדַע야다'는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깊이 관계하고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그 일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아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예수님 #하나님 #문경두목사 #설교 #직설 #영성 #기독교 #교회 #성경 #복음 #십자가 #월전교회 #설교외전 #삶 #죽음 #영생 #부활 #천국 #지옥 #행복 #불행 #십자가 #자기부인 #기도 #말씀 #불안 #인생 #깨달음 #거듭남 ---
· 새로운 시각, 위로부터의 탄생 | 삶을 깨닫고 싶은가 · 요.3,1~7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삶을 깨달으면 · 하나님께서 이 삶에 관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까 ---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로 시작합니다. 인간이 삶에서 겪는 부족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하며, 기독교와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관점을 비교합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거듭남’의 의미를 상세히 해석합니다. 설교는 영생을 얻기 위한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일상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삶을 촉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역설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권면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성전의 시대는 갔는가 |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무슨 관계인가 · 요.2,12~25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성전을 지키려는 자, 누구인가 ·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전 · 내 아버지 집 --- 예수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와 본질은 성전의 본래 목적과 그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강조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에 대한 예수님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성전의 원래 의미와 "내 아버지의 집"의 즉각적인 배경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제물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지며 난장판이 된 광경을 보셨습니다. 이방인의 구역인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으나, 폭리가 횡행하는 "강도의 소굴"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집"의 의미와 신학적 강조점 • 공간적/물리적 의미 (οἶκος): 요한복음 2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집'은 헬라어로 'οἶκος(오이코스)'이며, 이는 사건이 벌어진 성전이라는 물리적인 건물을 강조하는 공간적·건물적 의미가 강합니다. • '아버지의 그곳'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누가복음 2장 49절에서 어린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실 때의 '집'은 원문에서는 관사를 여격으로 쓴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로, '내 아버지의 그곳'이라는 의미로 장소를 가리킵니다. • 사람과 공동체 (οἰκία): 요한복음 14장 2절의 "내 아버지의 집"은 'οἰκία(오이키아)'를 사용했는데, 이는 사람과 공동체, 또는 집안 내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궁극적으로 물리적 건축물을 넘어서는 의미: 이러한 표현들을 종합할 때, '집'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인 건축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관계를 확인하는 장소여야 합니다. 3. "내 아버지"라는 호칭의 독특성과 친밀성 • 유대인과의 차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나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אדֹנָי)'라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ὁ πατήρ μου)'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예수님만의 독특한 개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판단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표면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 친밀성과 정체성: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윤리적 엄격함과 경외감을 강조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사랑받는 자녀로서 아버지에 대한 친밀성과 예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에게 '내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임재와 권위가 실현되어야 하는 본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4.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됨으로써 왜곡된 본질 '장사하는 집(οἶκον ἐμπορίου)'이란 집의 목적이 오직 이익을 남기는 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에서 허가받은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제물을 비싸게 팔고 환전 수수료로 폭리를 취했으며, 이러한 이익의 대부분은 산헤드린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탐욕과 독점 행위로 인해 성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장소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5. "성전의 시대는 갔는가" - 새로운 성전의 도래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지은 물리적인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건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성전된(ναός)'은 신이 거주하는 지성소,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별한 공간을 뜻하며, '육체(σῶμα)'는 단순히 살덩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신 말씀의 본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 성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을 만나는 장소여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나 국경이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 예수님 자신이 살아있는 성전: 예수님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나오스(ναός)', 즉 지성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물리적인 성전 건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 교회의 본질: 오늘날 교회는 성전이 아니며, 교회를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너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자격을 갖추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는 삶이 중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질책을 넘어, 성전의 본질적인 목적이 상실되었음을 선언하고,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통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모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야 한다는 근본적인 신앙의 전환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 성전의 시대는 갔는가 |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무슨 관계인가 · 요.2,12~25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성전을 지키려는 자, 누구인가 ·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전 · 내 아버지 집 --- 이 설교는 성전 정화 사건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대인의 신앙 체계를 대조하며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이 성전 정화 사건을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배치하여 예수님의 표적과 하나님의 로고스와 연관 짓는 요한의 신학적 의도를 강조합니다. 또한, 유월절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와 히브리인의 기원을 설명하며, 솔로몬 성전 파괴부터 헤롯 성전 재건까지 성전의 변천사를 다룹니다. 특히,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상황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칭하신 것이 유대인에게 왜 충격적이었는지 밝히며,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을 비판합니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참된 성전은 물리적인 건물이 아닌 예수님의 몸, 즉 예수님의 삶과 성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임을 역설하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모든 신앙의 본질임을 강조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 이 처음 표적 | 요한은 어째서 기적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 요.2,1~11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 어째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했을까 · 기적이 아니라 한사코 표적이라고 한 이유 --- 성경에 묘사된 기적들은 일차적으로 표적(세메이온)으로서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시이며, 신앙 안에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 그분 안에서 자유와 영원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1. 성경에 묘사된 기적의 일차적인 의미: '표적'으로서의 역할 • 요한복음의 관점: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줄곧 **'표적'(σημεῖον )**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기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시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길가의 교통 표지판이 그 자체보다 가리키는 바가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요한은 기적을 행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 다른 복음서의 관점: 마태, 마가, 누가는 기적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 주로 **'능력'(δύναμις)**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이는 행위 자체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반면 '표적'(σημεῖον)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대개 불신앙의 요구와 관련된 부정적인 경우였습니다. • • 인간 한계에 대한 인지: 예수님의 일곱 가지 기적 모두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건드렸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할 때 신을 찾게 됩니다. • • 믿음의 초기 단계: 기적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굳히게 했습니다. 이는 믿음이 점진적으로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 작용으로 이해됩니다. • • '맛보기'로서의 가치: 기적은 영원한 세상에 대한 '맛보기'로서 가치가 있을 뿐이며, 그 자체가 영원한 세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2. 신앙 안에서의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 • 기적이 아닌 목적 추구: 기적 자체가 목적일 수 없으므로, 신앙생활에서는 목적이 아닌 기적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 구원 사업과의 분리: 아무리 큰 기적이라 할지라도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기적은 사람들을 구원 사업으로 이끄는 '맛보기'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구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잠시 만족을 줄 수 있지만 영원하지 않으며, 구원으로 직접 이어지지 않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인식: 우리 신앙에서 최고 가치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으며,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줄 알면 이 세상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때부터는 모든 문제가 자신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해결하셔야 할 문제로 바뀝니다. • 영원한 세상과 하나님: 우리는 삶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얻으며, 그분은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 삶의 최고 가치였습니다. • 믿음의 자유와 풍요로움: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가치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기존의 관념을 바꾸고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장인'처럼 자유로움을 얻어야 합니다. "사실을 알면 그 사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처럼, 삶의 사실을 알고 하나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 기독 신앙의 궁극적인 복입니다. 3. 기적에 대한 오해와 경고 • 신앙의 동력 상실: 기적을 끊임없이 구하고 그것에만 집중하게 되면 신앙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동력을 잃게 됩니다. • 현실적인 도움 부족: 상징적 해석이나 유사 해석에 머무는 것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지금 나의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 세속적인 관심: 오늘날 교회는 기적과 같은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사회에서 거친 돌처럼 취급받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 일상의 기적: 우리는 사실 매일 기적을 경험하며 살지만, 너무 자주 경험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오히려 일상적인 평범함 자체가 기적일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목적 아님: 기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며, 기적으로만은 본질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묘사하는 기적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지만, 그것은 더 깊은 진리를 가리키는 표적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믿음과 영원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기적이 아니라 표적 | 요한은 어째서 기적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 요.2,1~11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 어째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했을까 · 기적이 아니라 한사코 표적이라고 한 이유 --- 이 설교문은 기적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탐구하며 시작합니다. 기적 자체를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는 경향을 경계하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표적(σημεῖον)’으로 해석하며 그 본질적인 의미를 밝힙니다. 설교자는 기적이 구원의 직접적인 통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임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가치이며, 이를 통해 인생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요한복음 1장, 훑어보기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I. 서론: 요한복음의 독특한 관점과 기록 목적 이 강해는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마태·마가·누가)와 구별되는 독특한 관점과 기록 의도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단순히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신학적 이해와 오랜 신앙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λόγος)'이자 '생명', '빛'으로 조명합니다. 요한복음의 정체성: 이 책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복음"(Κατὰ Ἰωάννην)으로, 기록자의 이해가 담긴 신학서입니다. (요한복음 1장 서두) 기록 목적: 요한복음 20장 31절은 그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명확히 밝힙니다. 이는 독자가 예수님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영생의 개념: 요한에게 영생은 종말론적, 미래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 이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현실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II. 핵심 주제 및 아이디어 말씀(λόγος)의 본질과 현현 (요. 1:1-5, 14-18) '한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와 달리, '한처음에'는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초시공간적 개념을 함축합니다. 말씀은 시간 이전에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논리, 생각, 계획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 10-11) 말씀과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그 자체이며, 우주의 원리이자 우리 삶의 이치입니다. "십자가 곧 하나님의 이치라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가 십자가 못 질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1:16) 말씀의 육신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이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나사렛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신성(神性)의 자각: 말씀이 우리 육체에 자리 잡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열망하고 사모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안의 신적인 존재성(神性)을 자각하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러고 말 거냐, 아닙니다.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고 해야 합니다. 본 것이나 다를 것이 없이, 말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λόγος, 말씀을 인지(認知)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18) 빛과 어둠, 그리고 ἁμαρτία (요. 1:4-5, 9-13) 빛의 의미: 빛은 세상을 사는 올바른 방법, 삶의 길잡이, 희망을 의미하며 결국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마태복음 5:14). 어둠의 본질: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 독자적인 존재성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빛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며, 세상이 정의롭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 이는 단순히 죄(ὀφείλημα)를 넘어선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빛이 없어 길을 잃고 불행한 상태가 바로 ἁμαρτία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를 지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므로, 말입니다. 죽는 것 말고는 ἁμαρτία를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29)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 (요. 1:6-8, 19-28) 유대인의 메시아 기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유대인의 왕국을 세울 다윗의 자손 왕으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처음에는 이와 같은 기대를 가졌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7절) 세례 요한의 증언: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며,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20, 27) 십자가와 부활의 반전: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러한 땅의 나라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렸고, 부활은 제자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십자가는 그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에 못을 박았습니다." (요한복음 1:25) 오늘날의 오해: 강해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십자가 사건 이전의 예수를 믿으며 여전히 땅의 나라와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한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표상 너머의 실제 (요. 1:29-34) '하나님의 어린 양': 이 표현은 유월절 희생양의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희생 제물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29) 표상(表象)과 실제(實際): 종교적 개념(대속, 십자가)이 머릿속의 표상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실제 삶에서 현실화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따라하는 것 밖에 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101) 세례 요한의 경험: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영(πνεῦμα)이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적 경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찾은 마음과 신앙의 세 단계 (요. 1:35-42) 초기 제자들의 순수함: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더 높은 차원의 가치와 가르침을 기대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요한복음 1:37, 40-41) 신앙의 세 단계: 1단계: 필요에 의한 시작: 개인의 필요를 채우거나 삶의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자 교회를 찾는 단계. 2단계: 만족과 안주: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며 나름의 만족을 얻지만, 영생의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땅의 것을 목표로 삼는 단계. "대개는 딱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127) 3단계: 영생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 삶의 초점을 온통 하나님의 나라에 맞추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실감하며 사는 단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의 삶, 곧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삶과 같아야 합니다. 편견을 넘어서는 믿음 (요. 1:43-51) 나다나엘의 편견: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갈릴리 출신에 대한 경멸적 시선을 반영합니다. (요한복음 1:46) 편견의 극복: 나다나엘은 빌립의 "와 보라!"는 말에 예수님께 나아왔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이는 그가 편견을 넘어 사실(ἀλήθει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6-47) 진리(사실)와 자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는 말씀처럼, 편견에서 벗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고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사닥다리: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시며, 야곱의 사닥다리(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가 바로 자신임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십자가가 죽음이 아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임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51)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실존적인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끌어올리며, 이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가 '사람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식'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III. 결론: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삶의 현실화 이 강해는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적 이해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현실적인 존재로 인지하고 그분의 의도(λόγος)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고 생각하며, 그분의 다스리심을 기대할 때, 우리는 영생의 문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 사실에 의한 믿음 |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실존 · 요.1,43~51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편견에서 놓여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 ·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신 이유 · 예수님을 따를 생각을 ‘왜’ 했을까 --- 1. 편견과 세속적 욕망: 영적 성장의 가장 큰 적 성경 속 인물들의 내적 갈등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겪는 문제와 놀랍도록 유사하며, 이는 편견과 세속적 욕망이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핵심 요소임을 보여준다. 1.1. 성경 속 인물들의 사례: 편견과 세속적 욕망의 구체적 모습 제자들의 세속적 목표와 이해 부족: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중대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며 예수님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세속적 욕망을 드러냈다 (막 10:37). 나머지 열 제자들도 그들에게 화를 냈는데, 이는 그들 역시 "같은 생각으로 세속적인 지위를 탐했음"을 시사한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대인의 나라가 다가온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예수님의 말씀을 묻어버렸습니다." 이는 "‘땅의 것에 매이는 두 번째 신앙 단계’"로 묘사된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고 난 후에야 예수님께서 추구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나다나엘의 출신에 대한 편견: 나다나엘은 빌립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소개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요 1:46).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갈릴리 나사렛을 동네 취급도 하지 않았던 고정관념과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그는 "예수님의 출신을 보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고, 자신의 생각을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1.2. 현재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 편견의 위험성과 세속적 신앙 단계의 문제점 편견은 신앙의 가장 큰 적: "편견은 신앙의 가장 큰 적이며, 현재 많은 기독 신앙인이 자신이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다"고 지적된다. "정상적인 종교라면 편견을 경계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거짓과 자기 이익에서 비롯된 편견: 편견은 "‘거짓’에서 출발하며, 자기 이익을 위해 속이려는 마음(간사함, δόλος)에서 비롯"된다. 이는 "모든 악의 출발점이며, ‘진실(ἀλήθει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땅의 것'에 매이는 신앙: 제자들처럼 "이 땅의 것을 최고 목표로 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내가 어떻게 덕을 볼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앙은 "'두 번째 신앙 단계'에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에 사로잡히면 "성경이 제시하는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하고 결국 이 땅의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게 됩니다." 집단적 편견에 대한 경고: 신천지, 통일교, 사랑제일교회와 같은 집단은 "‘믿음을 가장한 편견에 집단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며, 이는 "기독 신앙인 자신이 신앙의 편견에서 자유로운지 깊이 따져 보아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2. 편견 극복과 진실 추구: 영적 성장을 위한 필수 과정 진정한 영적 성장과 자유를 위해서는 편견을 극복하고 진실(사실)을 추구하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2.1. '자기 부인'과 '진실 추구'의 중요성 편견 극복은 '자기 부인'의 핵심: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의 핵심"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어도 결국 헛 믿는 것이 됩니다." '진리'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을 알려고 노력하면 그 사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ἀλήθεια)'는 단순히 '사실'을 의미하며,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진실과 동일하다: 히브리어 '아멘(ָאֵמן)'과 '에무나(ֱאמּונָה, 믿음)'는 '참으로', '진실로', '신뢰한다', '확실하다'는 뜻을 지닌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이는 "믿음은 곧 사실 내지는 진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거짓을 일삼으면서 믿음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2.2. 나다나엘의 모범: 편견을 넘어서는 의지 "와 보라!"에 응답한 나다나엘: 나다나엘은 나사렛에 대한 편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립의 "와 보라!"는 말에 예수님께로 왔다. 이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있었고, "편견을 편견으로 알고 넘어설 준비가 된 '사실의 사람(ἀληθῶς)'이었음"을 보여준다. "사실이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겠는 그 마음이 편견이 자리를 잃게 합니다." '간사함이 없음'의 칭찬: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칭찬하신 것은, 그 속에 "거짓이나 속임수가 아닌 '참', '사실', '진실(ἀλήθεια)'이 있었기 때문"이다. 2.3. 영원의 세계를 경험하는 '세 번째 신앙 단계' 하나님의 영을 깨닫는 단계: 현재 신앙인들은 "부활의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자신을 버려 하나님의 영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세 번째 신앙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 이 단계를 통해서야 비로소 "‘보여야 할 것이 보입니다’." '더 큰 일'을 목격: 나다나엘처럼 편견을 넘어선 자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은 ‘더 큰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분이시며, 사람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식으로 끌어올리려는 요한의 의도와 연결"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믿음: "믿음은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출발하며’, 내 안에서 편견이 사라질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하시는지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하박국 2장 4절의 의미"이다. 3.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 '사실'을 넘어선 '지향점'과 '영적' 의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기록자의 입장, 내용의 취사선택, 관점 등 여러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이는 편견을 넘어 영적 진실을 추구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3.1. 기록자의 입장과 목적: '기자'와 '저자'의 차이 공관복음은 '기자'와 유사: 마태, 마가, 누가는 "마치 신문 기사를 쓰듯 사실 그대로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복음서 기자'라고 불릴 수 있다. 이들은 "축자영감설 또는 기계적 영감설에 가까운 방식"으로, "사실에 조금 더 가깝게 기록"했다. 요한은 '저자'에 가까움: 요한은 "자기 생각을 그만큼 많이 담아" '저자'라고 불릴 수 있다. 요한복음은 "사실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으며, 그래서 더더욱 ‘영적(靈的)’"이라고 언급된다. 요한은 "사실보다는 사건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바탕을 둔 저작물"이며,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바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3.2. 내용의 취사선택 및 관점: '사실'에서 '지향점'으로 세례 요한 기록의 차이: 마태와 누가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 여부를 고민했던 부분과 그의 죽음을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이러한 고민이나 감옥에 갇혔다 죽은 사실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부분을 제외했다. 예수님 탄생 기록의 차이: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지를 "베들레헴"으로 언급하며 "다윗의 자손"임을 드러내려 한 반면, "마가와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요한은 "유대인의 메시아에 대한 오랜 관념(다윗의 자손 등)을 배제하고,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을 통해 나사렛 사람 예수의 실존을 가지고 말하려 했습니다." 그는 "막강한 타이틀을 내던지고 사실만 보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인자(人子)' 담론: 요한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과 '인자(υἱό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사람의 자식)'라는 말을 통해, 예수님이 "사람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식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는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하며, 기존 신학의 깊이가 얕음을 지적한다.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의 반복: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아멘(Ἀμὴν)’을 두 번씩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진실', '확실함'을 강조하는 요한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4. 결론 및 시사점 성경 속 인물들의 내적 갈등은 현재 신앙인들이 편견과 세속적 욕망에 얽매여 있을 때 겪는 문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이러한 '땅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사실(진실)'을 추구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나다나엘의 사례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을 때, '더 큰 일'을 경험하고 영원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님 사건의 "지향점"과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춰, 독자들이 유대인의 오랜 관념이나 세속적 편견을 넘어 "나사렛 사람 예수의 실존"과 그가 궁극적으로 가져올 "영원한 세계"를 깨닫도록 이끌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믿음이 곧 사실 내지는 진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믿음을 논할 수 없"음을 자각하며, 각 신앙인 개인이 신앙의 편견에서 자유로운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피상적인 신앙을 넘어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깨닫는 깊이 있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사실에 의한 믿음 |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실존 · 요.1,43~51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편견에서 놓여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 ·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신 이유 · 예수님을 따를 생각을 ‘왜’ 했을까 --- 본문은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을 해석하며, 신앙에서 편견을 극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필자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제자들의 초기 동기가 지상적인 목표에 머물렀음을 지적하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정한 뜻을 깨달았음을 설명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사실을 넘어선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나다나엘의 편견 없는 태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이유임을 밝힙니다. 궁극적으로 진실(ἀλήθεια)을 추구하며 편견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믿음(אֱמוּנָה)의 핵심이라고 역설합니다. --- 유튜브 링크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예수님, 하나님, 문경두 목사, 설교, 직설, 영성, 기독교, 교회, 성경, 복음, 십자가, 월전교회, 설교외전, 삶, 죽음, 영생, 부활, 천국, 지옥, 행복, 불행, 십자가, 자기부인, 기도, 말씀, ---
· 그때를 생각하라 | 예수님을 처음 찾은 그때 무슨 마음이었던가 · 요.1,35~42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와 우리 · 기대와 함정, 그리고 영성에 이르는 세 단계 · 예수님을 찾은 그때는 사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 필요에 의한 시작 → 교회 생활의 익숙함과 만족: 대부분 여기서 정체 →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 --- 초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와 그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이것이 현대 신앙인에게 주는 함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초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 • 영적 가치 추구 및 더 나은 스승에 대한 기대: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때부터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앙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기대했던 것과 같은, 즉 신앙적인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지칭한 것을 듣고,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며 따랐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단계인 '필요에 의해 시작하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필요를 느끼거나, 사는 것이 이런 식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교회를 찾는 것과 유사합니다. • 메시아 사상과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며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점차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자 메시아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순수하고 흠 없는,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사람을 의미했으며, 이는 메시아 사상과 연결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로 믿었고, 그 나라가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 중에서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러한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는 신앙의 두 번째 단계로,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복을 받았다고 느끼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짐작하지 못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2. 당시 시대적 배경 •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 당시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은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순수하고 흠 없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어감으로 들렸습니다. 흠 없는 어린 양과 같은 짐승이 죽음의 희생양이었지, 예수님 같은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메시아 개념과 영생에 대한 인식: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 왕가에서 나와 자기들의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사야 11장이나 사무엘하 7장의 예언처럼, 다윗 가문에서 왕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세상이 완전한 평화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에게 영생의 개념은 분명하지 않았고, 땅에서 자기들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절대적으로 믿었으며, 이는 현대인이 신약 성경에 맞추어 생각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3. 현대 신앙인에게 주는 함의 • 기독 신앙의 본질과 현 교회의 문제점: 우리의 기독 신앙은 아주 단순하게 "자기가 사는 이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면 그때는 사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많은 교회는 이러한 본질을 잃고 있습니다. 과거 기도원이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동력이었으나, 지금은 기도를 통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여겨 잘 찾지 않습니다. 교회가 동력을 잃고 하나님을 찾기보다 집단으로 모여 세력을 과시하고 문제를 일으키며 심지어 '정치 집단'이나 '깡패 집단'처럼 비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음은 사라지고 주장과 선동만 난무하며, 교인들이 자기 생각에 빠져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믿음인 줄 아는 왜곡된 신앙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 '처음 사랑'의 상실과 영생의 목표: 많은 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을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했던 처음 마음이 없고, 영생을 말하는 복음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썩어 없어질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며 신앙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도 초기 제자들이 지상 왕국을 꿈꾸며 신앙의 두 번째 단계에 머물렀던 것처럼, 세상적인 복을 구하며 교회를 중심으로 삶의 방식만 바뀌었을 뿐 영원의 세계를 그리지 못하고 여전히 구해야 할 것이 많다고 느낍니다. • 세 단계 신앙의 여정으로의 전환: ◦ 첫 번째 단계(필요에 의한 시작): 초기 제자들이 세례 요한을 따랐을 때와 같이, 자신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필요나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신앙을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 두 번째 단계(세상적 만족): 교회 생활을 통해 만족과 복을 느끼며 익숙해지는 단계입니다. 초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며 지상 왕국의 자리를 탐했던 것처럼, 이 단계에서는 영원의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땅의 나라에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 세 번째 단계(영생의 세계를 그림):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삶이 완전히 뒤바뀌어야 하는 진정한 다른 삶의 방식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의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에 삶의 초점을 맞추는 단계입니다. 우리 기독 신앙의 목적은 내가 사는 지금 이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여 영생에 이르는 것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현실화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구하는 것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단지 이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견주어 생각해야 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그때를 생각하라 | 예수님을 처음 찾은 그때 무슨 마음이었던가 · 요.1,35~42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와 우리 · 기대와 함정, 그리고 영성에 이르는 세 단계 · 예수님을 찾은 그때는 사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 필요에 의한 시작 → 교회 생활의 익숙함과 만족: 대부분 여기서 정체 →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 --- 이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다룹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영생을 추구하는 단순한 신앙의을 강조합니다. 이는 현실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기도원의 쇠락이 교회의 몰락과 무관하지 않으면 이는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는 않는 경향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는 특정 목사의 주장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면 가기에 의존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초기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던 순수한 동기와 유대인이 메시아를 이해했던 방식을 성경적 배경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본질적인 복음과 능력을 잃어 버렸음을 역설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현실화하고 영생의 나라를 지금 이 삶에서 그려나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하나님의 어린 양 | 표상 너머의 실제 · 요.1,29~34 · 유튜브로 시청하는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표상表象과 실제實際 · 종교는 삶에 나타난 현실의 문제 --- 1. 표상과 실제: 종교는 삶에 나타난 현실의 문제 강해의 핵심적인 출발점은 종교적 믿음이 '표상(表象)'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실제(實際)' 삶의 현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표상의 정의: "표상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것처럼 머릿속에서 재생하는 걸 말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실제는 아닙니다. 의미는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1페이지) 십자가와 실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조차도 "내가 그 상황을 실제 사건으로 만들지 않은 한" (1페이지) 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현실성: "내가 사는 이 삶에서 종교가 그저 표상으로만 머문다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남이 나를 대신하여 밥을 먹어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밥은 내가 직접 먹어야 내 배가 부른 법입니다." (1페이지) 이는 신앙이 개인의 실제 삶에 적극적으로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실제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따라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어찌 생각하셨는지,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1페이지) 2. 복음서의 다양성과 '사실' 추적 강해는 네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가 각기 다른 관점과 관심사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명확히 합니다. 이는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각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저자별 관점: "사실은 네 명이 각각 자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마태·마가·누가·요한이 한자리에 모여 상의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2페이지) 기록 시점과 영향: 복음서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 난 후에 '써야지!' 하고 썼습니다. 저마다 기억과 이해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이 다릅니다." (2페이지) '사실'에 대한 탐색: 독자(및 저자 요한)가 알고 싶은 것은 '사실'이며, 이는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네 사람이 똑같은 소리를 하면 그것은 사실로 믿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시공간에서 있었던 일을 네 사람이 서로 다른 소리를 하면 따져 보아야 합니다." (2페이지) 그러나 저자의 '관심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하나님의 어린 양' 개념과 요한의 의도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개념입니다. 유월절과의 연결: '하나님의 어린 양'은 유대인의 유월절(출애굽기 12장)과 깊이 연결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죽음의 재앙을 피하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구속(救贖)의 대가로서 대신 죽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누군가 죽으므로 나머지가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유대인의 유월절Passover입니다." (3페이지) 이는 기독교 교리의 대속(代贖) 개념의 근원입니다. 성전 제사의 표상: 유월절 성전에서 양을 잡아 피를 흘리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강력한 표상" (4페이지)이었으며, 이는 '내가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생한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시간 설정: 요한복음은 마가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준비일'에 위치시킵니다. "양을 잡는 그 날 오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겁니다. 성전에서 유월절 어린 양을 잡고 있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4페이지) 이는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임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신학적 의도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페이지)라고 증언한 것은 실제로는 "사도 요한이 한 말" (5페이지)로 해석됩니다. 소설의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이는 요한이 예수님을 유월절 희생 제물로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죄'(ἁμαρτία)의 의미: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의 '죄'(ἁμαρτία)는 일상적인 잘못인 ὀφείλημα(빚)가 아니라,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 (10페이지), 즉 "죽음은 인간의 총체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11페이지) 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이 근본적인 ἁμαρτία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의 시발점"이 됩니다. 희생 제사의 종결: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희생 제사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세상의 노예로 살던 그 삶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라는 말입니다. 나사렛 그분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11페이지) 4. 대속 개념에 대한 비판적 시각: 관념어를 넘어 실제적인 삶으로 강해는 기독교에서 흔히 강조하는 '대속' 개념이 자칫 '표상'에 머물러 '실제' 삶에 적용되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대속의 관념성: "보통 교회는 대속代贖이라는 말에 너무 매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어찌고 했다고 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건 표상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대속은 관념어觀念語입니다." (11-12페이지) 자기 십자가: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분은 당신이 한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는 점입니다. 그로써 우리는 그분이 한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겁니다." (12페이지) 이는 기독교인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마가복음 8:34 인용, 12페이지)을 강조하며, 현대 기독교가 이를 등한시함을 비판합니다. 5. 요한복음의 '영생' 개념: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변화 강해는 요한이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영생'을 미래적인 개념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현실의 문제로 보았다는 점을 가장 큰 차별점으로 제시합니다. 요한의 관심사: "요한의 머릿속에는 온통 ‘영생’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삶이 아닌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겁니다. 이 부분이 다른 복음서와 크게 다른 점입니다." (7페이지) 종말론적 영생 vs. 현재적 영생: "마태나 마가나 누가가 말하는 영생은 종말론적입니다. 미래적 개념이라는 겁니다. 죽거든 그때 보자, 이런 겁니다. 요한은 그와 다릅니다. 영생을 현실의 문제로 보았다는 겁니다. 요한이 말하는 ‘영생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8-9페이지) 변화된 삶의 경험: 요한은 "복음의 가치가 준 경험이 있습니다. 그 삶의 경험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9페이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순간의 충격이지만, 그 영향은 "지속적인 이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면 크게 의미는 없습니다." (9페이지) 본질에 집중: 요한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를 흐리게 하는 요소를 뺀 겁니다." (9페이지) 심지어 세례 요한의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사실조차도 요한의 주된 목적(영생)과는 무관하다고 판단하여 제외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그 말을 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9페이지) '안다'(γινώσκω)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깊은 경험적 앎을 의미합니다. 삶의 의미: "이 삶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 삶에서 반드시 다른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이 삶이 다는 아니라는 겁니다." (19페이지) 6. 예수님의 선재성과 하나님의 아들 됨 강해는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존재론적 선재(先在)와 하나님의 아들 됨을 강조하며, 이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드러납니다. 존재론적 선재: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요한복음 1:30 인용, 12페이지)고 한 말은 예수님이 "존재론적 선재" (13페이지)를 뜻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 (요한복음 8:58 인용, 13페이지)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되며, 하나님의 이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 인용, 13페이지)와 맥이 닿아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 (14페이지)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령과 영의 구분: '영'(πνεῦμα)과 '성령'(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의 번역 차이를 지적하며, 세례 요한이 본 것은 "단순히 알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나타난 현상" (15페이지)인 '영'이었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 (17페이지)으로서 동작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 (18페이지)임을 증언한 것은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도이며, 이는 "세례 요한의 사회적 위상을 충분히 활용" (18페이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나는 육체가 아니다" (19페이지)라는 정의와 연결되며, 기독 신앙의 핵심은 "우리의 삶은 단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가, 이 문제입니다." (19페이지) 결론 본 강해는 요한복음이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것을 드러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글을 씁니다." (7페이지)라고 강조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사실을 넘어서는 그 가치' (10페이지)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해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ἁμαρτία'(죄)와 '죽음'을 해결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영생'은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다른 방식의 삶" (19페이지)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종교가 삶의 '표상'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하나님의 어린 양 | 표상 너머의 실제 · 요.1,29~34 · 유튜브로 시청하는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말 한 마디로 퉁칠 수 없습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표상表象과 실제實際 · 종교는 삶에 나타난 현실의 문제 --- 이 설교는 요한복음 1장 29-34절을 분석하며 기독교 신학의 핵심 개념들을 탐구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유월절 희생양과 대속의 개념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고, 이는 단순한 표상이 아닌 실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다른 복음서들과 요한복음의 차이점을 비교하며, 사도 요한이 '영생'이라는 개념을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문제로 제시하려 했음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독자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화의 시작점임을 역설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분이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주목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 나는 왕이 아니로소이다 | 그리스도를 원하기나 하는가 · 요.1,19~28 · 유튜브로 시청하는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후원을 부탁합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 세상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다 ·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사는가 --- 이 문서는 요한복음의 독특한 시각을 중심으로 유대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통념과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 그리고 당시 유대 사회의 권력 역학 관계를 분석합니다. 1. 요한복음의 독특한 시선과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의 통념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다른 시각으로 예수님을 조명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혈통을 다윗의 자손으로 연결하여, 유대인의 통념인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왕"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건 맞다, 다만 땅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왕: 유대인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사무엘하 7장 16절)는 나단의 예언은 다윗의 후손 중에서 하나님이 세우실 왕, 즉 마쉬아흐(ָמִׁשיַח),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가 오리라는 굳건한 믿음을 형성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불안한 삶을 살던 유대인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며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재건할 "구원자, 왕"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장 9절)라고 외친 것은 이러한 기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통념 깨기: 예수님은 바리새인과의 대화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태복음 22장 42절)라는 질문에 대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태복음 22장 43절)라고 반문하며, 그리스도가 유대인이 생각하는 혈통적, 정치적, 종말론적, 종교적인 의미의 왕이 아님을 시사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차별점: 요한은 마태나 누가와 달리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관념에 함몰陷沒하는 것을 경계한 결과"로 보이며,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기는 해도 유대인의 왕은 아니다"라는 의도를 내포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본질, 즉 신적 기원에 초점을 맞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시작하며,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다. 그러나 너희가 생각하는 그 메시아는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2. 세례 요한의 증언과 유대 사회의 심문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본 내용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며 세례 요한의 증언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산헤드린의 심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 "네가 누구냐" (요한복음 1장 19절)고 묻습니다. 이는 산헤드린(유대 사회 최고 종교법정이자 입법·사법 기구)이 요한의 사역에 대한 반향을 감지하고 파악하기 위해 심문관을 보낸 것입니다. 요한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요한의 부인과 진정한 증언: 요한은 심문관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 Ἐγὼ οὐκ εἰμὶ ὁ χριστός에고 우크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이는 "주범主犯이 따로 있다는 말로 들리기에 충분했"으며,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구원하려고 보내신 그 사람"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요한복음 1장 23절)라고 말하며, 자신이 다만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는 '소리'일 뿐임을 강조합니다. '광야'는 단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혼란, 방황, 죄악의 공간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길이 거기서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세례의 의미: 심문관들은 요한에게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복음 1장 25절)고 따집니다.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한복음 1장 26-27절)고 답하며, 자신의 세례가 메시아의 도래를 앞둔 회개와 갱신을 상징하는 일회적인 행위임을 명확히 합니다. 3. 유력 집단의 그리스도 거부와 하나님의 나라 산헤드린,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조사하고 심문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이는 당시 유력 집단이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권력과의 결탁: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 사회의 산헤드린은 로마 당국과 협력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산헤드린의 압력에 밀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것은 이러한 권력 역학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로마가 지배했지간 어느 면에서는 자기들이 다 해먹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등장은 "이런 세상이 아니"었으며, "basileia tou theou(바실레이아 투 데우),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명시됩니다. 저자는 현대 필리핀의 유력 가문들이 과거 외세와 결탁하여 여전히 득세하는 상황을 예시로 들며, "필리핀의 유력 가문이 그리스도를 원하겠는가,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이 나올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은 진정한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구할 것: 이 글은 독자에게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이 삶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타나시는 것을 바라는가, 그 세상을 정말로 원하기나 하는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는 질문을 던지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결론 이 문서는 요한복음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통념적인 왕(다윗의 자손)이 아닌, 신적 기원을 가진 메시아로 드러내고자 했음을 강조합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한 진실을 더욱 명확히 하며, 당시 유대 사회의 권력 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를 거부했음을 보여줍니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진정으로 구하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나는 왕이 아니로소이다 | 그리스도를 원하기나 하는가 · 요.1,19~28 ---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후원을 부탁합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 세상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다 ·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사는가 --- 이 설교는 요한복음의 독특한 관점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례 요한의 증언을 중심으로,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셨는지를 대조합니다. 유대 사회의 종교적, 정치적 통념 속에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겪었던 오해와 심문 과정을 자세히 다루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신적 기원에 초점을 맞추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세속적 관념을 넘어서려 했음을 강조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 말씀이 나의 육체에 나타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요.1,14~18 ---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후원을 부탁합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 자신 안의 신성(神性)을 자각할 때 · 육체의 그 순간에서 πνεῦμα(프뉴마)의 영원한 세계로 --- 본 설교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18절까지의 성경 구절들을 언어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해석합니다. 특히 '말씀(λόγος)'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을 통해, 말씀이 단순히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났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독생하신 하나님'과 '영광' 같은 개념을 기존의 신학적 통념과는 다르게 풀어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왕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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