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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바덴 아름다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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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바덴 아름다운 교회

Author: 윤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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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Predigten etc.
Korea Methodist Church
Wiesaben Arumdaun Gemeinde in Deutschland
Germany
독일
비스바덴 아름다운교회 이야기
교회주소: Melanchthon Str.15, 65203 Mainz-Amöneburg
예배시간: 15시
Internet: club.cyworld.com/wiesbaden
https://www.youtube.com/user/wiesbadenarumdaun
http://wiesbadenarumdaun.onmam.com/
135 Episodes
Reverse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소리를 하고 나서 별로 좋지 않았다. 왜냐면 고린도 교인들이 근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을 그들을 책망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그들을 근심에 빠뜨린 것이 아니다. 그의 진심 어린 마음과 같이 고린도 교회는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 그럴 수 있던 것은 그들이 그 근심을 통하여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바울은 근심을 둘로 구분을 한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근심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 있고, 근심을 하면 할 수록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거짓된 회개를 이끌어내는 세상 근심이 있다. 세상 근심을 죄의 결과처럼 사망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적인 회개와 변화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이 근심은 절망과 불안, 초조로 결국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과는 달리 고린도 교인들에게 죄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죄로부터 자신들을 깨끗케 하는 순결 운동을 전개하게 했으며,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했다.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들에 대한 간섭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윤리 도덕적 또는 사회적 기준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소위 말해 지적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절대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살아있어야 한다. 바른 근심을 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심하게 해야 한다.
분리는 거룩의 시작이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생명이고, 생각이고 역사이다. 성도는 이것을 스스로 지각하고 스스로 정의 내려 인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규정으로 다가올 자신의 미래까지도 규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성전이다.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듯 우리에게도 임재하시므로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인간적인 더러운 것들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성도들에게 불신자들과의 분리를 요구한 것이다. 성도들은 마땅히 빛의 자녀로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성도들에게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음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성도가 더 우월하다는 자만이 아니라, 분리주의 자로 신자의 관계 밖에 있는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고난 속을 걸어도 빛의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불의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죄의 유혹은 도무지 포기라는 것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죄의 유혹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 끈질긴 유혹에서 이겨야 하고, 그것과 접촉하기 전에 분리해야 한다. 결코 쉽게 생각해선 안될 문제다. 죄의 유혹은 성역을 모른다. 그러므로 누구도 예외는 없다.
5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사도를 세우셨다고 했다. 사도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도서의 모든 사람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바울 자신을 위한 말만이 아니라, 전령사로서의 소명을 받고 사명을 받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런 직분을 받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화해 소식의 선포이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외부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받게 되는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하면서 우리에게 닥치는 분명한 고난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계속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일을 헛되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망하게 하는 것 같지만,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 더러워지는 것 같지만, 깨끗해 지는 것이다. 사도로서 전령사로서 우리가 그 일을 잘 감당해야지 오히려 장애가 되어선 안 된다. 오해를 받고, 모욕과 고난에 내맡겨질 때에 그의 증언의 임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5장 11-21절 하나님께선 세상과 화해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이셨다. 그 사랑은 죽음으로 살린다. 그래서 그 죽음으로 삶을 경험한 자들은 이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삶의 영역 안에 들어가게 되면 새 창조를 경험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손 내미시고 화해하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그의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 사랑을 경험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 함은 서로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새롭게 창조된 누구든지 화목의 전령사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으며, 그분의 모든 약속과 축복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또한 그 만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화목하게 해야 하는 직책을 맡은 성도들은 화목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믿음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옛 사람들에게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믿음의 세계로 초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이전의 썩어질 구습을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이루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전령들을 통하여 이미 이룩된 그 화해를 받아들이도록 초대하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신실하심이 통용되고 작용하는 영역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5장 1-10절 다소 어려운 표현들이 계속 되고 있는 고린도 후서이다. 그래서 정리가 좀 필요하다. 바울은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비유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한다. 육체를 입은 삶과 육체를 벗어 하늘의 몸을 입은 삶을 이야기 한다. 바울에겐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의 큰 축이 있다.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이고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선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삶이었다. 아니,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와 죽음 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한 깊은 사모함을 탄식으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다시 삶이란, 죽음이 지배하는 옛 존재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새 창조를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현재 당하는 고난을 이기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그 날을 기다리며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린 하늘의 영원한 집보다는 땅의 장막 집을 더 좋아한다. 그러는 이유는 아무래도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더욱이 하늘의 영원한 집을 쉽게 생각할 수 없다. 탄식하는 마음으로 그 때를 사모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은 이 고난을 기꺼이 이겨낼 수 있게 한다.
4장 영광스러움과 신성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유난히 고난과 시련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볼 때 바울은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많은 환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고난을 당하였다. 아울러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친다는 메시지를 선포했는데, 이는 고난이 단지 고난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대한 복음의 핵심이 드러난 것이다. 신자들은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왜냐면 보이는 것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 있는 것이고, 없어질 것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립되는 것은 고난에 굴복하여 죽음에 내맡겨진 지상적 실존과 인간이 그리스도와의 연합함으로 받는 삶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은 신자에게 절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을 선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받음으로 그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능력인 구원함을 얻듯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영광은 사변적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와 내적으로 결합하는 데서 생기는 열매이다.
3장 고린도 교회의 회복에 대한 기쁨과 승리감을 가지고, 자신 사도성과 그가 믿는 바를 심도 있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도성에 관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진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으로써 더욱더 사도임을 강조하고 그 근거를 설명하는 부분이라 조금은 교리적이다. 바울은 또한 대적자들과의 논쟁에 있어서 여러 번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편지를 통하여 그들의 신앙을 각성시키고 더욱 견고케 하기 위하여 거짓 사도들의 주장과 대립되는 기독교의 진수를 다시 한번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옛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후에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과 맺으신 언약 즉 율법을 가리키며, 광범위하게는 구약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언약의 골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의 갱신의 의미가 아니라 속죄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옛 언약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옛 언약 곧 돌에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이라고 강하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를 통하여 완전한 언약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새 언약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믿는 모든 자에게 속죄함의 은총과 함께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특권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법은 모세로부터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읽어 올라가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직도 옛 언약의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위하여 새 언약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옛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로 돌아옴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영을 만날 때 비로소 그 영의 조명을 통하여 율법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거기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되며 우리도 주님따라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장 바울은 1장에 이어 여행 변경 사실을 공격하여 바울에게 흠집을 내려고 하는 의도에 대해 설명한다. 바울이 전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하여 서로가 상처를 입었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서로에게 근심을 주는 것을 피하려 고린도 교회 방문을 연기하였던 것이다. 비록 공격을 당하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한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문제의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권면을 한다. 왜냐하면 싸움이 판치는 곳을 사탄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에서는 그 질책과 벌함의 목적이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회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여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린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다. 썩은 생선냄새가 아니라, 죽은 시체 냄새가 아니라, 사망의 냄새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늘 새로운 향기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우리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기분 좋아지게 하고,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우리 모든 신자들이 이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나는 비타민이다. 나는 에너지다. 그러니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에게도 애정을 보일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다.
1장 12-24절 오늘 본문 속에는 바울이 여행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답지 못하다고 경솔하다고 진실하지 못하다고 질타하는 상황에 대해 약간은 변호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모두는 안다. 인생 10 중 8 또는 9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을 의지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어려운 것도 있다. 하지만 바울은 사도 직을 맡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사익 때문에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말을 바꾸지 않았다. 자신이 여행계획을 변경하게 된 근거로 제시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만의 변명이겠는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이 일반 신자들에게 이해하기 힘들어도 그 이유는 자신들의 종교적 우월성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의 잘 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 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신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서로간의 약속을 쉽게 생각하여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핵심은 스스로가 자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동하는가? 부득불 변경할 때도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스스로 자각해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나 비 신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신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1장 1-11절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두 번째 서신인 고린도 후서는 첫 번째 편지를 보낸지 얼마 안돼서 바로 이다. 그 이유는 고린도에서 들려오는 그리 좋지 못한 소식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진실로 감사하며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는 자리에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고, 그 위로와 함께 역사가 나타나 능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대개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웬만한 것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 고난이 쉽게 끝나야지 조금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영원한 삶의 약속이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위로로 느끼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왜냐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only one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질병으로부터, 학업으로부터, 경제력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주님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죽다 살아났다.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 동안의 위로를 모두 찌꺼기로 여기게 되었다. 그 후로 오직 하나님의 함만을 의뢰하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절망 속에서 핀 꽃이 아름답다. 당장은 그 상황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도 배우게 되리라!
마태복음 10:24~33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2)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16장 13-24절 깨어 있으라! 마지막 당부의 말이라고 볼 수 있는 말. 깨어 있으라! 이 말은 잠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또는 잘 들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깨어 있으라! 잠들면 안 되는 상황.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 현 시대는 수 많은 정보들이 난무한다. 그 정보들이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또는 모두 옳은 정보만은 아니다. 정보의 시대에 우린 옳은 정보와 잘 못된 정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눈만 뜨고 있다고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구분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건가? 그렇지 않다. 옳은 것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의지와 선택도 필요하다. 거기엔 신자로서 사는 용기도 필요하다. 많은 면에서 현재의 교회들이 수 많은 정보에서 옳고 그른 정보의 구분까지는 도달한 것 같다. 그 만큼 지적 능력, 소위 말하는 성경을 아는 지식은 머리 한 가득 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런 것 때문에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의 지식과 정보가 삶의 현장에서 내 것으로 나와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래서 깨어있으라는 당부의 말과 더불어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라고 권고한다. 그래서 깨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고, 구분 할 줄만 아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 사랑이 없으면 종교놀이에 불과하고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밝혔다. 친절하게 사랑은 이렇게 해보라고까지 알려주었다. 깨어있으라!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라!
16장 1-12절 고린도 전서를 마무리 해가면서 고린도 교회의 마지막 문제가 거론 된다. 그것은 헌금의 관한 것이다. 요즘은 우리가 매주 헌금을 하기도 하고, 매월 정기적으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사안에 따라 정기적이지 못하게 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성경의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의 경제활동이 완벽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헌금하라고 강요를 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그렇다면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할 기회를 제공해주므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인데 그 기회를 막는다면 잘 하는 것일까? 헌금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헌금을 하면서도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신뢰가 생기지 않아서 헌금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지고 만다. 고린도 교회는 이방 교회였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부탁 받은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부자였으니 가능한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방인 교회가 유대교회를 도움으로 그들 사이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했다. 이방인이 유대인을 위한 헌신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당시 바울의 전도가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의심을 받아왔고,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헌금의 제도는 우리가 조금 편리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의미만큼은 변할 수 없다. 나보다 더 연약한 이들을 세우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15장 35-58절 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불안한 시간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확실한 시간이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불안한 시간을 전부로 여기지 말고, 확실한 시간에 모든 것을 던지라 한다. 불안한 시간에 우리가 메이면 주님께서 본이 되신, 다시 사심과 영원한 삶의 기대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등잔 앞에 서있는 이들은 늘 초조한 시간일 뿐이다. 우리가 자명하게 하는 것은 육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육체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부활의 몸은 이 썩어질 지상적 육체의 몸을 능가한다. 그 때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썩지 않을 영원한 것을 입을 것이다. 이것이 복음으로의 초대이다. 믿음을 권유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이 믿음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이들이 믿음의 자녀들이고 하늘 백성인데 이 하늘의 복음이 땅의 것으로도 아니고, 썩어질 것으로도 아니고, 육체로도 아니고, 죄와 사망으로도 아니다. 하늘의 복음은 하늘의 것과 영원한 것, 우리 인식의 것들을 뛰어 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믿음의 자녀들은 이 복음에 메인 자들이다. 결국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삶이 멸망하는 자들에겐 미련한 것에 불과하고, 구원을 받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그 능력을 믿는 사람이고, 우리의 초대는 거기로 초대하는 것이다.
15장 20-34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삶과 죽음,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종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삶을 보여주셨다. 죽음의 세력이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첫 열매이시다. 그렇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죽음의 권세, 사망 권세로부터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만일 다시 사심이 없다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에 삶을 신중히 살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 잘 해 줄 필요도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것도 기준 없이 이리 저리 막 살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을 우린 믿음 없는 삶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믿는 자들은 다시 사심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한 지혜로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께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이 땅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회개하라 하셨다. 생각을 돌이키라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오신 이유는 그것이다.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죽음의 첫 열매. 그러니 생각을 돌이키라고 말씀하신다. 신자가 의롭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
15장 1-19절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다. 우리가 다시 살아남을 믿는 신앙이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만일 우리가 다시 산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주님 되시어 다시 사시어 믿음의 본이 되신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다시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신앙 중에 다시 사는 믿음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부인하면서도 믿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은 많은 정보가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산다. 많이 계몽이 되었고 문명화 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 속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증거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선 믿음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덮어 놓고 믿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신앙이 실증주의도 아니다. 하지만 예수가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또한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삶이 아닌 땅의 삶만을 구한다면, 영원의 삶이 아닌 제한적 삶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면 종말론 적 삶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셔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보여주셨다.
마태복음 10:1~8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14장 그 동안 거론되었던 종교적 현상에 관한 문제들, 교회 내에서 제기 되었던 문제들을 교회에서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말한다. 성령의 충만함의 상징인 은사들, 구체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사랑을 추구하며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의 덕을 세우 기만하는 도구로 절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비상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은 곧 타자를 세워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했던 것들이 공동체의 목적, 신앙의 목적을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 남을 세워주는 일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자기 PR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 스스로를 세우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익숙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신앙이란 남을 세워주는 것이다. 여기에도 나의 자발적 선택이 필요하다. 강요가 아닌 스스로 그것을 좋아서 해야 한다. 신앙인은 타인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하고, 그 사람의 장점을 찾아줘야 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덕이다. 나만 잘 살 수 없다. 자신의 경제력이나 지력 등을 잘 쌓아두면 적어도 혼자는 잘 산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러나 혼자서는 절대 잘 살 수 없다. 그것이 세상이다. 혼자서 잘 사는 것을 성경은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덕이 없기 때문이다. 인색한 우리 사회 속에서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신앙을 구하고 함께 세워지는 신앙이 너무도 절실하다.
13장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금석이다. "사랑이 없으면" 그 무엇보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 아무런 재능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이다. 사랑보다 더 큰 능력은 없다. 산을 옮기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종교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특별한 은사들은 불완전한 우리와 완전하신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시켜주는 열쇠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안에 머물게 되면 그런 특별한 은사들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이 실재가 되고, 내가 생각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내 생각을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깊이 더 가까이 깨달을 때 나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이 고백되어진다면 그 은사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놓일 필요가 없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우리 삶에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이런 사랑도 말로 많이 한다. 말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고 바울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특별한 은사를 구하기 보다 오래 참아라, 시기하지 마라, 자랑하지 마라...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지금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쏟아 주신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패하여도 사랑은 남는다.
12장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 특별한 은사. 이것을 누구나 다 가져야 하는가? 만약 한 공동체에서 이런 은사를 누군가는 갖고 있고, 누군가는 없다면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더 우위에 차지해야 하는가? 그들이 더 성령이 충만한 것인가? 우린 성령이 충만하여져서 놀라운 사건을 경험한 사도행전 2장의 초대 성도들을 상기시켜야 한다. 종교적 현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의 내용, 성령의 실재적 역사를 보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실재적 삶에서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11장에서는 공동의 식사를 위해 모이고 주님의 식탁을 기억하기 위해 모이는 그 공동체의 모임이 어떻게 하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로움을 주는지 말하고 있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모인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 모임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여서 어떻게 지내는지가 말이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은사라는 현상이 아니고 그 현상이 실재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은사도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공동체는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 몸은 각자 다른 기능을 갖고 있고 한 몸에 연결되어 있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때론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한 공동체 안에 있을 수 있고 그들에게 성령이 더 충만한 것도 아니고, 더 우위에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 다른 기능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한 연합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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