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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버린 인생에게 바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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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버린 인생에게 바치는 시

Author: 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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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시는 원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시를 읽어보자. 아니면 듣기라도 하자.
우울한 그대에게, 죽고 싶은 그대에게, 어설픈 격려보다는 차라리 그 우울과 절망을 부채질하는 시가 더 어울린다.
특히나 마음이 지옥인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285 Epis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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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 이영광

투명 / 이영광

2019-09-0901:35

세상이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위로다 집 팔고 세 얻어 휴일에 이사하는데, 동네에서 동네로 옮겨가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희망 따위로 여기 살진 않았지만 나도 모를 열망에 휩싸여 중얼거리다 문득 집을 잃었지만, 집이 무기인 시절에 십년 면벽이 희망 익스프레스에 실려가는 걸 대낮의 아파트만 천개의 눈을 뜨고 멀뚱멀뚱 내려다본다 투명 이불 투명 책상 투명 바가지 투명 옷 야반도주하십니까 훔치는 중이십니까, 물어주길 바랐지만, 바라려고 애썼지만 내가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위로다 투명인간은 땀을 뻘뻘 흘렸다! 괜찮다, 새집엔 빈 벽이 많다 사라진 짐들은 밤이면 나타나리라 나도, 나타나리라 장물아비처럼 낯선 거실에 앉아 투명 소주를 마신다
친절한 아내

친절한 아내

2019-09-0801:48

집에서 빈둥거리며 먹고 살 걱정에 힘들고 고단한 오후 느닷없이 들리는 새소리 누군가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매우 드문 일이다 아 그러세요. 아내의 친절하고 다정한 응대 왜 저 친구는 남들에게는 저렇게 살가울까 슬그머니 심통이 난다 한참을 듣던 아내가 말한다 정말 죄송한데요, 저희는 지금 여유가 없어서요… 뭐가 그리 미안한지 아내는 쩔쩔매며 상대방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한다 나는 덜컥 겁이 난다 다행히 요구가 그리 모질지는 않았나보다 전화는 부드럽게 끝난다 나는 죄인의 심정이 되어 가슴을 졸이며, 아주 조심스럽게 누가 전화를 했는지 묻는다 땅을 사래 땅을 사라고? 허탈보다 짜증이 먼저 밀려온다 턱도 없는 소리를 왜 다 듣고 있었는지 왜 그리 친절했는지 다그치듯 아내에게 묻는다 말없이 날 한참 바라보던 아내가 말한다 그래도 나한테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잖아 나에게 다정히 말 걸어주는 사람은 다 반갑고 고마워 내가 죽일 놈이다
학력고사를 두어 주 앞두고 내가 또 칵 죽고 싶어져 학교 안 가고 술 취해 드러누워 있을 때, 벼 타작하던 아버지가 찜닭을 들고 자취방엘 왔다 삼부자가 그눔의 학교 졸업장 하나 못 받으면 무슨 망신이냐고, 이거 먹고 내일은 꼭 가라고 맛있는 거라고 살림 잘 들어먹고 공납금 잘 안 주던 이상한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나는 말없이 그걸 먹으며, 찜닭이 맞나 닭찜이 맞나 소주나 한잔 더 했으면 좋겠네,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도 연애도 안 되어 그만, 집이고 학교고 뭐고 멀리멀리 탈출해버리고 싶던 시인 지망생, 하지만 찜닭에 누그러진 열아홉 아버지 경운기 몰고 육십리 길 돌아가자 포기했던 <확률 · 통계> 단원을 다시 펼쳤다 안동고등학교 일 학년 중퇴생 아버지는 십년째 고향 앞산에 누웠고 이 학년 중퇴생 형과, 그 밤 열심히 찜닭 뜯던 누이는 민중으로 돌아가 안동 찜닭으로 부산서 먹고들 산다 닭하고 무슨 원수가 졌는진 몰라도 개업 축하하러 와 다시 찜닭 앞에 앉고 보니, 어느덧 삼십 년이 흘렀구나 안동고등학교 삼십삼 회 졸업생, 졸업장 너무 많아 탈인 나는 누이가 익혀 낸 찜닭을 먹고는 있지만 내가 삼십 년 전 그 밤으로 돌아가 있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연거푸 소주잔을 비우고는 있지만 여전히 시도 연애도 안 돼 칵 죽고 싶은 오십, 닭찜이 맞나 찜닭이 맞나 생각 중인 걸 모를 것이다 뭐가 맞니껴, 물으면 나의 귀신 아버지는 술에 절어 횡설수설할 것이다, 그냥 맛있는 거라고, 학교는 가야 한다고 어쨌든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고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쓰레기통의 사연

쓰레기통의 사연

2019-09-0501:50

일요일 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현관을 나섭니다. 냄새 나는 비닐봉투를 든 채로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아무에게도 보여지고 싶지 않아 바닥만 보며 터덕터덕 마침내 아파트 한 가운데 쓰레기를 모아놓는 곳에 다다릅니다. 음식쓰레기통을 여니 이미 배불러 토하기 직전 집어넣자니 넘쳐버릴 것 같고 쓰레기를 들고 다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고 어찌 해야할지 몰라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망가진 한 때 음식이었던 것들을 바라봅니다 먹다가 버린, 혹은 먹기도 전에 버림받은 내 기발한 시도와 적당한 노력과 호화로운 희망을 생각합니다 화장을 했어야 했는데 차마 태워버릴 수 없어 임시로 묻어놓은 내 사랑을 떠올립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버려진 그것들이 내 안에 그득한데 나 이제 어디에 쓰레기를 버려야할지 몰라 그냥 서 있습니다
나는 공중부양을 한다 단 당신이 보지 않을 때만 당신이 보는 그 순간 온 우주에 퍼져있던 입자가 나 여기 있소 하고 나타나듯 허공에 떠 있던 내 몸을 이루는 까마득히 작은 점들이 무게를 지니게 되고 중력이 현실이 된다 이것은 나만의 재주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 그러니 사랑하는 그대여 나 당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테니 손목은 이제 그만 긋고 마음껏 공중에 떠 있으시라
시월 - 허연

시월 - 허연

2019-09-0302:01

잊을 테니까 아프지 말라고 너는 어두운 산 그림자처럼 말했다. 다시는 육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시는 길게 앓지도 않겠다고 너는 낡은 트럭에 올라타면서 웃었다. 매미들의 잔해가 마른 낙엽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세대나 놓치며 정류장에 서 있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기를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세상의 모든 느낌들이 둔탁해졌다. 입맞춤도 사죄도 없는 길을 걸었다. 동네에서 가장 싼 빵을 굽던 가게 앞을 지나면서 다가올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방금 운 듯한 하늘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북쪽 어디에는 진눈개비가 내렸다고 했다. 저만치서 무성했던 풀들이 힘없이 시들어갔다. 실눈을 뜬 채, 담장 너머 검게 목이 꺽인 해바라기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했던 전쟁에서 늘 패하고 있었다. 그걸 시월에 알았다.
슬픈 환갑 - 2

슬픈 환갑 - 2

2019-09-0201:54

나이 탓일리는 없지만, 하릴없이 지내다 보니 아무런 상관도 없이 어떤 낌새도 없이 불쑥불쑥 지난 기억의 징검다리들이 두더지처럼 솟아오르네 그 징검다리에는 낭자한 핏자국도 폭죽 터지는 기쁨도 미쳐버릴 것 같은 슬픔도 없다네 미끈거리는 비굴과 비눗방울처럼 텅 빈 희망 질척거리는 게으름 그리고 선의로 포장된 멍청함이 서로에게 이죽거리며 낄낄대고 있네 죽을 힘을 다해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본 적이 있는가 비장하게 사기를 쳐본 적이 있는가 처절하게 손바닥을 비벼본 적이 있는가 물론 없지 내 삶에 그런 건 없다네 난 다만 나를 견디어 왔을 뿐 후회라고 말하려니 후회라는 말에게 송구한 지독한 자가당착 내가 떳떳하게 후회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애처롭게 버티고 있는 앞으로 살아갈 나날뿐
슬픈 환갑 - 1

슬픈 환갑 - 1

2019-09-0102:07

내 나이 오십에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내 나이 환갑 오랏줄이 풀린지 십년 헐렁했지만, 급한 걸음 막아서는 붉은 신호등처럼 어길 수는 있지만 거역할 수는 없는 올가미 내가 애호하는 비겁하고 케케묵은 핑계 하긴 그도 날 묶어놓을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고없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그 줄이 허무하게 풀렸다 며칠을 울고 나니, 느닷없이 풀려난 장기복역수처럼 이제부터라도 내 삶을 바꾸어 보겠다는 애처로운 다짐이 일었다 그가 없는 세상을 10년을 보냈는데 헐한 다짐은 예정대로 제 갈 길로 떠나가 버렸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난 멀쩡하게 더욱 더 전력을 다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가 그랬듯 나도 나를 거의 포기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버지와 홀가분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순도

삶의 순도

2019-08-3102:03

컴퓨터를 켭니다 사람인, 인크루트, 잡코리아, 알바몬, 알바천국 내가 즐겨찾기로 묶어놓은 일자리 알려주는 곳을 찬찬히 훑어봅니다 10년 전에는 꿈도 꾸지 않았던 먹고 사는 일 만이 온전히 100퍼센트인 그런 일을 지금은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자존심은 슬그머니 가출해버렸고 하는 수 없이 남은 보람과 열정은 개를 주어 버렸습니다 이런 갸륵하고 기특한 마음을 10년 전에 먹었다면 아마 지금은 생계유지가 50퍼센트 정도만 담겨있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운이 좋았다면 1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가난이라고 하면 왠지 귀엽고 궁핍이라 하면 살짝 처절하고 뭔가 적당한 말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다음 달 월세를 낼 돈이 없다는 것 그 다음 달에도 없을 가능성이 팔아버린 24금 금반지의 순도 정도 된다는 것 99.9 퍼센트 그러나 나는 현실도피의 끝판왕 그 마지막 0.1 퍼센트를 채우기 위해 컴퓨터를 끄고 복권을 사러 나섭니다
시가 질린다 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시 한 편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시가 제멋대로 질려버린다 지겹다 그대의 좌절도, 비명도, 신음도 나랑 상관없는 일이고 그대의 희망은 버리기 아까워 냄비에 털어 넣는 라면 부스러기만도 못하다 은사시나무도 조팝나무도 나는 모르겠고 부추꽃은 더 모르겠다 그대가 호명하는 것들은 이미 다 죽고 없는데 중력을 이기던 지던 버티던 대수로울 것이 무엇인가 빌어먹을 은유와 가증스러운 돌려말하기는 이제 그만 시도 질리고 당신도 질리고 사랑도 질린다
유시민씨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내가 생일이 빨라 학교를 한 해 먼저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와 나는 같은 시절을 살아왔다 그리하여 1980년 서울역에 나도 있었고 그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잡혀갔고 나는 학교 앞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거기 있었고 나는 여기 있었다 나는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싶도록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내 생각과 한치의 다름도 없다 나는 다만 아무 것도 믿지 않을뿐 2016년 겨울 광화문에 난 가끔씩 나갔다 촛불은 돈을 받고 팔고 있길래 사지 않았고 오래 찬 바닥에 주저앉아 있기 싫어서 그냥 언저리를 떠돌며 구경하다 버스가 붐비지 않을 시간에 집으로 갔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집에 앉아 뉴스를 봤다 손석희씨가 내일도 최선을 다하겠다며 뉴스를 마치면 난 최선을 다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렸다 내가 보탤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한 진심 그리고 때마다 던지는 투표용지 한 장뿐 지금도 그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유시민씨와 나는 동갑이다 그게 다다
어둠을 뚫고 가는 버스 덕분에 우리의 발걸음이 더 아름다워진 걸까 다음 버스를 정말 탈 수 있을까 신호등이 깜박거린다 지나가거나 멈추거나 그것은 분명하게 삼원색 세개의 눈으로는 부족한 우리 차창에 어른거리는 나비 잠자리 풀벌레 모두 죽어라 불타오르기 좋아라 대합실에서 졸고 있는 너의 달콤한 땀 냄새 우리는 오늘 어디로든 간다 간다 오늘 네 얼굴에 떠도는 것을 어렵게 미소라 불러도 될지 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다만 오래되었을 뿐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들이 이야기 속에서 빛난다 입을 열지 말고 눈을 뜨지 말고 귀를 영원히 닫고 그냥 가라 네 손에 쥔 것은 우산 꽃다발 모자 지팡이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뒷모습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잃어버린 무선전화기를 냉동실에서 찾았어 어느날 내 심장이 서랍에서 발견되고 다리 하나가 책상 뒤에서 잃어버린 눈알이 화분 속에서 발견될지 몰라 나는 내가 무서워 앞마당에 나왔는데 무얼 가지러 나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괜히 화초에 물이나 주고 시든 잎이나 떼는 그, 짧고도, 긴, 순간 나는 어디로 줄행랑친 걸까 빈집의 적요처럼 서 있는 너, 누구니 내가 혹시 나를 찾아오지 못할까봐 환하게 불 켜고 자는 밤 이번 생에 무얼 가지러 왔는지 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전화기가 꺼져 있다 꺼진 그의 마음을 캐묻는 대신 소매 끝으로 전동차의 유리창을 닦는다 팔이 접혀지는 안쪽에 통증이 살아난다 눈이 큰 짐승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처럼 여름 저녁의 짧은 철로는 윤곽이 뚜렷하다 저녁 여섯 시 오렌지 빛 잔광 속에 물끄러미 있다 찻물 끓이는 주전자가 엎질러진 오래전 저녁 팔뚝 안쪽의 눈꽃 무늬 상흔은 저 절단된, 단절된 협궤열차의 팔뚝에 그리고 목요일의 오후에 걸쳐져 있다 금속성의 이가 시린 그것 내게 질문하고 싶다 아직도 사랑을 꿈꿔? 사람들은 일제히 가마우지 떼처럼 수면 가까이 유리창 가까이 붙어 서서 일몰을 내다보고 있다 뒷모습에 너무 많은 표정이 담긴 자를 믿지 않는다 일몰을 믿지 않는다 그저 사라지고 나는 물끄러미 있다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의지와 이상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도 사기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빈 집 / 기형도

빈 집 / 기형도

2019-04-2401:01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전화 주세요 시 배달해드립니다 비록 좋은 시는 아니더라도 당신께 드리는 시 내 시는 현대시예요 서정시예요 튜닝했어요 옵션 붙였어요 내 시는 사고 이력 있어요 끔찍했던 이별사고 심리치료센터 수리 흔적 오오오 당신의 흔적 내 시에는 있어요 감춰놨어요 찾아봐요 애처롭던 당신의 눈망울 이 미친 봄날을 감당하지 못해서 상사병 앓고 계신 분 전화 주세요 시 배달해드립니다
미망 bus / 심보선 노선을 잃었다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둘 다 ​ 멸망하는 세계가 나보다 명랑하다 휴일과 섹스는 빼고 ​ 버스 맨 뒤에 앉아 버스 맨 앞을 노려본다 지금 건너는 다리는 소실점까지 길게 난 흉터 같다 그래서 좋다 ​ 차창에 기대 노루잠에 빠진다 치어 떼처럼 망막 위를 헤엄치는 빛의 산란 꿈속에서조차 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숨 꾹 참고 강바닥을 걸어 도강(渡江)한다 ​ 뒤돌아보면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꿈과 현실 둘 다 ​ 같은 고백을 여러 번 통과하며 형형색색 분광하는 생 지루함은 나의 무지개 내 그림자는 빛의 정반대 내 언어는 정반대의 정반대 ​ 버스는 갈팡질팡 달린다 그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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