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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북스-창세기 강해-23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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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들풀북스에서 전해드리는
창세기 강해 시간입니다.
오늘은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창세기 족장들의 기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람,
그의 신앙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족장처럼
오늘 우리의 믿음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누었듯이 창세기 13장의 믿음과 비교해서
15장 아브람의 믿음은 큰 걸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6장에서는 멈칫합니다.
아브람의 신앙 성장이 멈칫한 걸림돌은,
모든 믿음의 성도들 또한 겪는 걸림돌이기도 입니다.
그래서 아브람도 우리도 그 걸림돌로 인해서 위축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변질과 변절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6장의 제목을 붙인다면
‘믿음의 아브람도 겪는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께 말씀의 내용을 깨닫기를 간구합니다.
둘째,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왜?'라는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왜 본문을 기록하셨습니까?
이 본문을 통해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왜 이 본문의 기록된 단어가 이것이어야 합니까?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여주인에게로 돌아가 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따르라’도 있고, ‘말을 들어라’ 등 다른 단어가 있음에도
꼭 ‘복종하라’는 말을 쓴 이유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성경 본문을
두세 번을 읽으며 고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 기록이 다른 사건들에 비해
결코 짧지 않습니다.
그 과정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기록하셨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이유가 궁금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기사들도 많이 있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이 기사를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었냐는
의문이 생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읽고 기도할 때,
‘하나님, 이 내용을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하갈이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왜 하갈이 도망했다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고
이렇게까지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셨어야만 했는지 이유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묻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접속사와 시간부사에
좀 더 주의를 가지고 민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는 십 년,
16절에는 아브람의 나이 팔십육 세가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칠십오 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숫자를 계산해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난 지
이미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은 아브람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전체 시간과 비교해서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 오랜 시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자녀는 없었고,
아브람과 사래의 몸은 점점 더 아이를 낳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브람보다도 사래의 마음이 더 급해졌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신체 조건이 가장 열악해졌다는 뜻입니다.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브람이 첩을 통해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자신이 양육할 힘이 있을지도 의문스럽게 되었습니다.
한계의 시간 앞에서 조급할 수밖에 없는
사래와 아브람의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이런 조급함은 우리에게도 경험되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에 그리고 생각으로 느껴지는 현실감은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정보는 없기 때문에 절대적 신뢰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본 것으로 믿고 느낀 것을 확신하다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증거가 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가장 큰 덫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를 향해,
보는 것으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의 크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낳기에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자신의 실제적인 감각을
어떻게 부인하라는 것입니까?
앞으로 더 기다릴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많으실지 몰라도,
인간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우리에게는
끝없는 기다림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처음과는 다른 방법으로 해석합니다.
처음에는 아브람과 사래 몸에서 낳을 아들로 해석했다가,
십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래의 몸이 아니라
아브람의 씨면 되니까 여종을 첩으로 주어서
그를 통해서 아들을 얻으라는 말씀일 수 있다고
해석해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한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에게 젊어 충분히 아기를 낳을 수 있어 보이는
애굽 여인 하갈, 곧 자신의 몸종을
아브람의 첩으로 사래가 직접 주었습니다.
얼마나 아픈 마음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방법을 통해 아들을 얻고,
그를 자기의 아들로 삼아 양육할 수 있는 나이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선택해야만 했던 사래는
수천 번도 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하갈을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야만 하는
사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비참함을 돌아보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래의 믿음이 흩어졌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참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래의 시간과 신체 조건이 열악해진 상황에 대해
조급해진 사래의 마음이 아브람에도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람도 빠르면 좋겠다는 욕심과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래가 제안한,
하갈을 받아들이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갈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추측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래는 하란 사람이고 하갈은 애굽인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난 두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애굽 여인 하갈이 끼어들게 된 원인은
사래만의 잘못이 아니라
아브람의 잘못이 분명히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하란 사람 사래에게 애굽 여인인 종이 있었던 이유는,
가나안이 가뭄이었을 때
물에 대한 욕심으로 애굽을 향했던
남편 아브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덕에
많은 가축을 얻고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경에는 기록하지 않지만,
애굽 왕이 사래에게 애굽 여인 하갈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애굽 여인 하갈이 이렇게 아브람과 사래의 집에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 여종이 없었다면 사래는
아브람에게 첩을 주어 아들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브람의 첩을 쉽게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후에 보겠지만 하갈의 존재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이처럼 아브람과 사래 모두에게
자신들의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평화로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주변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브람과 사래의 현실에서 경험되는
시간의 제한에서 조급해져서
하나님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 결과가
하갈와 이스마엘입니다.
왜 사래가 조급해졌습니까?
십 년이라는 시간과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몸과 기력이 쇠해진 것 때문입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이런 몸도 변화시키셔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온전한 몸으로 만드실 수 있을까'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음 없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람의 마음도 술렁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아브람의 욕심에서 얻은
사래의 여종 애굽 여인 하갈이 있습니다.
아무튼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낳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아브람은 더욱 침착했어야 합니다.
이 내용은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고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던 에덴동산의 상황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아담이 자신은 먹지 않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하와 핑계도 대지 않고
하와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간절히 구했었다면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 정답은 없지만,
분명히 다른 해결책이 하나님께로부터 있었을 것이며,
인류의 상황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아브람에게 하갈을 권유하는 사래의 조급한 마음을
아브람이 달래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까지
사래가 인내할 수 있도록 아브람이 도왔다면
인류의 역사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은 확실합니다.
이제 아브람과 하갈 사이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이가 생긴 하갈에게는 당연히
아브람의 특별한 보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여주인 사래가 먹는 것과 입는 것처럼
하갈에게도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달리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몰래 더 좋은 것으로 먹이고 챙겼을 수 있습니다.
보디가드도 붙여주었을 것입니다.
자녀를 얻겠다는 정당한 이유로 시작된 이 일은
아브람의 마음을 하갈에게로 옮겨 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갈의 마음이 점점
자기의 현실은 사래의 종이라는 선을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여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오로지 자녀를 얻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래를 달래주며 그 시간을 모면할 뿐입니다.
급기야 사래의 마음이 평정을 잃고 아브람을 나무랍니다.
사래는 가정의 질서가 무너진 원인이
하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하갈은 학대하는 여주인을 피해 도망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하갈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
그의 수하에서 복종하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합니다.
그다음 하갈의 태중의 아이도 아브람의 씨니
큰 족속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시는데,
왜 여호와의 사자는 굳이 하갈을 사래와 아브람에게로
돌려보냈을까 하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브람에게는 하갈이 안타까운 존재고,
사래의 눈에는 가시와 같은 존재인데 말입니다.
분명히 하갈이 사래에게로 돌아간다면 아브람의 가정은
화목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해결 방안을 내리신 이유가 무엇인지 마음에 걸립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빚어낸 결과를
항상 아브람과 사래 앞에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하갈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시간과 약속을 인내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을
매일 직접 눈으로 보고 생각하게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이후에 보겠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을 놀려대며 희롱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람과 사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를 항상 아브람과 사래 앞에 두어서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그들의 욕심과 욕망의 선을
다시 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하갈을 사래와 아브람의 집으로 다시 가서 복종하라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수가 아니라 자비하심입니다.
그러나 하갈을 돌려받은 아브람과 사래의 마음은
오히려 괴로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 아브람과 사래가 이삭을 낳기까지
하나님의 시간을 견디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고라고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자신의 욕심과 조급함으로 만들어낸 후회된 일들이
항상 어디에 남겨져 있습니까?
기억입니다.
하갈처럼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형태는 아니지만,
기억이라는 저장소에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가장 짧은 시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자기의 생각대로 결과를 내려는
우리의 삐뚤어진 삶의 결과가
믿음과 삶에 인내하라고 하시는 뜻에서,
그대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브람과 사래처럼
그 결과를 몸과 마음으로
직접 대면하기도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하갈은 아브람과 사래처럼
선택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브람과 사래의 경계의 희생으로 삼으셨다는 해석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갈은 너무나 불쌍한 존재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갈을 이렇게 대우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 문제는 성경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지,
하갈에게도 인간의 원죄로 인한
욕심과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갈도 그 원죄의 댓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람에게도 사래에게도 하갈에게도 모두 동일한 값의
자기 욕심과 욕망의 책임을 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인간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이
자기 욕심과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시간을 인내하지 못한 결과가
그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왜 사래로부터 학대받고 도망친 하갈을
다시 사래에게 복종하도록 보내셨는가?'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창세기 16장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들풀북스에서 전해드리는
창세기 강해 시간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들풀북스 성경 창세기 강해입니다.
벌써 2020년 새해 몇 날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 느낌이 없습니다.
매일의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람은 환상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창세기 13장에서와는 다른 반응 즉,
행동을 보여서 그 내용을 비교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과,
그 땅 또한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려고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이전이라면 아브람은 그런 줄로만 알았고,
이에 대한 반응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곧 하나님께 묻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이 본문에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불러내어
약속에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그 땅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주시려는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그 땅의 기업을 얻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땅에 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을 소중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땅으로 하는 돈을 버는 일은
스스로 삼가는 일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의 축복입니다.
둘째는,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자녀의 축복은 이삭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람의 자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고 기록합니다.
갈 3:16
16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삭은 혈통을 이야기하지만,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의 땅 가나안도,
정확한 이삭의 자손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혈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주시는
언약의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긴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는
아브람의 혈통에 관한 좁은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믿는 믿음의 성도들입니까?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창세기 13장과는 다르게 바로 물었습니다.
믿음이 없었을 때는 그런줄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자란 후에는 묻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 창조주이시며,
그 분은 아브람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인터넷의 기사를 읽는데
유대인의 교육과 한국인의 교육의
가장 큰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학교에 갈 때
부모는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한답니다.
“오늘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많은 질문을 하고 와라!”
잘 모르는 문제는 바로 질문을 하고,
묻지 못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부모는 학교에 보내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오늘 학교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와!!!”
그래서 유대인들은 잘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해
언제든 질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한국식 교육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기만 하고 돌아 옵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런 학습 태도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아니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서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고민을 해야지 질문을 하는데 고민이 없으니까 질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식 교육이 내세우는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주입식과 암기입니다.
성경도 이해하지 못하고,
목사님 설교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냥 외워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를 주신다고도 했고,
땅도 주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주시겠다는지 잘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브람은 지난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믿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의 언약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나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분명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하나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질문을 하지 않고 외우는 믿음은
바른 믿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가 성경을 읽고 고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성령께 묻고,
가르치는 사역자에게 물어야 합니다.
침묵하고 아는척 하느라 암기한 내용으로는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님,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가르쳐 주세요!!!”
“왜 성경에 이와 같은 기록을 하셨습니까?”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신앙인.....
그래서 교회는 채웠지만,
성경 말씀은 없는 껍데기 성도를 생산해 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할 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곧 대답하십니다.
“삼 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나를 위해 가져 와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릴 제물을 가져와서,
비둘기를 제외하고 다른 제물들은 몸통을 갈라
서로 마주 보게 합니다.
그 상황은 해가 져서 어두워졌을 때까지입니다.
육식을 하는 새가 날아오면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야생에서 생고기의 피냄새가 진동합니다.
육식하는 야생짐승에 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 15:12
12 해가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피에 굶주린 맹수들 틈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자기 장막에서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 말씀의 의마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어떤 상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다림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민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어떤 교훈도 받을 수 없습니다.
'주여, 주여!' 몇 번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절대적 순종을 조건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결단에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림이 바로 맹수들 속에서 제물을 갈라
피 냄새로 하늘을 덮는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렇게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결국 들었습니다.
첫째, 아브람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둘째, 아브람의 자손들은 이방에서 객이 될 것이며,
셋째, 그들은 사백 년 동안 아브람 자손들을 괴롭힙니다.
넷째, 그들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것이며,
다섯째, 아브람의 자손들은 그 후에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입니다.
여섯째, 아브람은 장수하다가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며,
일곱째, 아브람의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기업의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며,
언약으로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아브람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아직은 열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가나안 땅을
아브람 이후의 자손들이 애굽으로부터 돌아오면
그들의 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듣보 보니 좋은 소식도 있고 기쁘지 않은 소식도 있습니다.
문제는 아브람이 들어도 소용이 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아브람의 귀에 들려주셨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아브람과 직접 연관이 있는 내용은 평안히 장수하다가
조상들의 죽음과 같이 죽을 것이라는 내용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왜 그들의 자손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하셨습니까?
첫째는, 아브람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언제 기업으로 주시겠냐고 물었더니,
사 대 만에 돌아오면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아브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을 하심으로,
아브람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이 이야기를
믿음으로 가르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 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종과 노예의 신분이 아닌
가나안의 주인의 신분이 될 것입니다.
그때 아브람의 자손들은, 야곱으로부터 전해 들은
아브람과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자신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 자신만이 이루시는 일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브람에게 미리 예언의 말씀으로 듣게 하셨던 이유입니다.
사 41:21~23
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22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23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장래에 될 일을 미리 말씀하실 수 있는 하나님,
예언하신 대로 그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약속을 들었습니까?
믿음으로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물음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교훈으로 배웠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들풀북스에서 전해드리는
성경 창세기 강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창세기 16장 말씀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아브람의 기사를 보면서,
그의 믿음의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바르게 배워서,
우리 자신의 믿음도 인내의 경주로
자라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 성장기는
곧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들풀북스에서 전해드리는 창세기 강해 시간입니다.
그동안 제가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에 매달리다 보니 방송 강해를 진행하지 못했음에
죄송한 마음입니다.
성령의 방언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매듭을 짓지 못해서
그 일에 집중했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들풀 공동체에서
새롭게 진행하려는 모임이 있습니다.
장소를 정하지 않구요,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임입니다.
그 내용은 이웃을 위해,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중보 회개 기도하는 모임입니다.
홈페이지에 오셔서 내용을 읽으시고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모임은 장소가 없습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10시,
또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아니면 시간이 되는대로 하시면 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성경 공부 모임을 좀 더 만들고 싶어서 광고를 내었습니다.
현재 청년과 카페에서 성경을 보는 방법에 관해서
창세기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설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질문하고 답하고,
성경은 어떻게 읽고 묵상해야 하는지를
연습하는 모임입니다.
혹시 이 내용을 들으시고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다면,
홈페이지에 연락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아브람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살렘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을 만나는 것까지 나누었습니다.
계속 연이어 진행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15장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브람은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점점 의심과 체념을 하게 되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15:1
1 …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본문에서 ‘상급’이라는 뜻은,
히브리어로 ‘사카르’로, ‘계약 지불’, ‘봉급’, ‘요금’, ‘생계비’. ‘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의 생계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아브람의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답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미 믿음에 시들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큰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브람은 볼멘소리로 투덜댑니다.
‘집에서 길리운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니라 사래의 몸에서 출생하는 아들이
상속자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꼭 백지수표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람의 마음을 아시고는,
밖으로 아브람을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들을 보이시면서,
이 별들만큼이나 자손이 많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지난번과 다른 믿음의 행동을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의 비교를 해야 합니다.
창세기 13:14~18절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이곳을
아브람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자손들이
땅에 티끌처럼 셀 수 없이 많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다녀 보라고,
이 땅이 모두 너와 네 자손이 살 곳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서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곧 그 자리에서 제사 드렸어도 되는데 말입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께 대한
아브람의 행동과 또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연관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아브람입니다.
이 말씀과 오늘 본문에서 큰 차이점 혹은 변화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창세기 13장의 약속에서는
믿음으로 화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화답합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기대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란 ‘여기다’입니다.
이미 그렇게 될 것으로 계산해 넣었다는 뜻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대했다’는 것과 ‘여겼다, 믿었다’는 의미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기대했다는 뜻은,
안 될 수도 있다는 결과를 염두에 두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겼다는 뜻은, 당연히 된다는 생각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아브람의 반응도 13장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1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헤브론 마무레 상수리 수풀로 돌아가 제단을 쌓았을 뿐입니다.
그동안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것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반응했던 것입니다.
마치 급하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입니다.
그런데 15장에서는 아들을 주신다는데, 땅을 주신다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반응이
13장과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매우 적극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변한 것이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약속이 있으니, 당연히 받을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받을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증거를 요구하니 하나님께서 제물의 조건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준비해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사 내용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13장에 아브람과
15장의 아브람을 비교하는 일입니다.
13장 아브람은 수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는 듯이,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바로 제사를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15장 아브람은 곧 그 증거를 요구했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물을 준비해서
그 자리에서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홍해를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출 14:13, 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14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대답하십니다.
출 14:15, 16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짓는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믿음은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믿음을 이루는 능동적인 행동입니다.
물론 무조건 기다리기만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에서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많이 들어 봤을 것입니다.
성경에 13장 내용과 15장 내용을 비교해서
그 차이점으로 교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구속을 완성하신 능동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행동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13장 아브람의 제사와
15장 아브람의 제사의 차이점을 찾아야 합니다.
13장 제사는 아무런 감동 없이, 감사도 없이,
그저 자신의 시간에 따라서
진행한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15장 제사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제사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바로 진행합니다.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먹고 싶은 케익을 아빠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는 케익을 사다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
정말 아빠가 사다 줄 것이라는 확고한 그 기대가 있는지,
아니면 안 사도 주어도 괜찮은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반응이 바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으~응! 좋아, 고마워 아빠’ 하면 별로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소망이 있으면,
‘언제 사 올 껀데? 어디서 살 껀데?, 그럼 이런 맛으로 사!’
쫓아다니며 약속을 더 받아냅니다.
그러면 저는
‘오늘 일찍 자고 이불 꼭 덮고 자야해!’라고 말합니다.
그날은 온 가족이 평온합니다.
그 즉시로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빠 고마워’라고 말해주고 안아 줍니다.
이런 행동들이 아빠의 약속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13장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에 대한 기대는 해 봤었지만,
정말 믿음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은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한 소망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소망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 믿습니까?
그렇다면 행동하십시오.
계속 물으십시오.
그 즉시로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달라진
모습을 하나님께 보이십시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행동은 나의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들과 제가
믿음으로 곧 반응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브람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오늘 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미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의 적극적인 모습을
우리가 하나님께 보여드릴 차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브람의 제사에 관해
좀 더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들풀북스에서 전해드리는 창세기 강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방송으로 만남을 이어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오늘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지난 시간에 먼저 멜기세덱에 관한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가 아님에도
어떻게 대제사장의 직분을 얻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아브람의 전쟁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을 두고 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아브람의 전쟁을 기록하신 이유와,
그 내용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신
성령의 목적을 알아내려면 다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지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수고하면서 묵상할 때
자신의 믿음에 자양분을 만들어 냅니다.
다른 사람이 일러준 말로만 만족하시지 말고,
듣고 배웠다면 '정말 성경 말씀에도 그러한가?'
또는 나 자신도 고민해 봐야만 합니다.
들은 내용이 맞는지
점검하고 따져봐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먼저 믿은 우리의 본분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다시 1절부터 12절까지 천천히 읽으십시오.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13~24절까지 내용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성령께 이 내용으로부터 자신이 들어야만 하는
교훈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행하지만,
다른 본문을 혼자서 묵상할 때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특히나, 오늘 본문처럼 이 내용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는
성령께 깨달음을 달라는 기도는 더욱 절실해져야 합니다.
내용의 이해를 시작합니다.
첫째, 1~12절까지는 아브람을 사이에 두고
지역 왕들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연합군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동맹군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섬겼던 요단 들의 왕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입니다.
이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13년에 배반해서,
14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브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롯과의 헤어짐으로,
롯은 요단들을 선택하고 떠나고,
아브람은 가나안에 남았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에서 롯이 선택한 요단 들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읽어야만 합니다.
창 13:10, 13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선택한 요단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셔서
멸하시기로 작정 된 소돔이 있었고,
롯은 바로 그들의 땅을 기름지다고 여겨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무지가
스스로 멸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소돔 왕과 함께 한 몇 왕들이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래서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함께 했던 왕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가면서 전리품을 모을 때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의 모든 재산도
탈취해서 갔습니다.
우연하지 않는 기회에 그 전쟁에서 도망친 어떤 사람이
롯의 이야기를 아브람에게 알려줍니다.
아브람은 지역의 왕들과 동맹을 맺으며 살다가
이 소식을 듣고서는 동맹군을 조직해서,
엘람 왕 그돌라오멜으로부터 롯과 그의 모든 재산도 되찾아
돌아오는 중에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에는 부족국가 시대였기 때문에 주변에
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국가 형태가 이루어지기 오래전의 일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악한 왕으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멸하시기로 작정 된 인물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살렘 지역의 왕이며 제사장인 멜게세덱입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는 십 분의 일을 드리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돔 왕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을 맞은 장소는 ‘사웨’골짜기로
그 이름을 다르게 하면 ‘왕의 골짜기’입니다.
사웨 골짜기는 기드론 시내와 힌놈의 골짜기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드론 시내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할 때 건넌 곳이며,
사무엘하 18장 18절에
압살롬은 기드론 시내(왕의 골짜기)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지역의 이름을 풀어 보면, 탁류가 극심한 골짜기,
흑암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아브람이 소돔 왕을 맞이한 곳은
역사적인 지리적 위치로 보아도 그렇고,
의미로 살펴봐도 그렇고 아름다운 곳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물이 있는 관계로 매우 비옥한 곳이라고 합니다.
살렘 왕과 소돔 왕의 가장 큰 차이는
살렘 왕은 축복을 했지만,
소돔 왕은 물질로 유혹했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볼 때 왜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에 대해
이토록 단호한 거절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는 것은 당연한
자신의 몫이며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실오라기 하나도 탐내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이 정도까지 자세하게 기록했을 때에는
단순한 기록의 신빙성을 알려주는 것 외에
성령의 깊은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내용을 보면,
'왜 아브람은 실오라기 하나도 받는 것을 거절했을까?' 하고
깊은 묵상을 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한 가지 조건을 머리에 떠올리십시오.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을 입은 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모범과 교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먼저 서로의 대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지역의 왕이면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소돔 왕은 이미 하나님께서 멸하시기로 작정 된 악한 존재입니다.
21절에서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제안한 내용입니다.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치부하다’라는 뜻은 ‘축척하다’, ‘부하게 하다’,
‘부요하게 만들다’입니다.
아브람은 전리품을 요구하지 않은 소돔 왕을 향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약에 소돔 왕의 말대로 그렇게 해서
내가 전리품을 모두 가져가서 부하게 되었을 때,
소돔 왕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할 때,
아브람이 지금 부자가 된 것은
내가 그 전리품을 모두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신발끈 하나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소돔 왕으로부터 전리품을 신발끈 하나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멜기세덱 살렘 왕을 대하는 아브람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 내용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입니다만,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가상화된 허구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사실인데 미래의 일과 과거의 일과 정확하게
맞물려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하는 내용은,
아브람이 선택할 때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경우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람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였는지를 우리가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명령과 뱀의 꾐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와와 아담은 어느 쪽을 선택했습니까?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람에게는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의 일조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함으로 심판이 작정 된
소돔 왕의 유혹인 모든 전리품을 취하고
나로 인해 부하게 되라는 두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어느 쪽을 선택했습니까?
예수께는 사십 일의 금식을 마친 후 사단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사단의 유혹은,
사단 자기에게 절하면 온 천하의 가장 위대한 능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한 편은 십자가 위에서 이름도 없고 능력도 없이
그것도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담당하라는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이 아닌 불쌍함과 저주와 조롱도 함께
짊어지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이 내용을 이해했다면,
성령께서 왜 이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셨고,
또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이 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이 아닌 것에는
잠시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사단이 주는 재물로 부하게 되는 것보다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셔야만 합니다.
사단이 주는 유혹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호 2:8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벧전 3:21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간구니라’는 뜻은 ‘묻다’, ‘질문하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믿음을 가진 때로부터는,
바른 신앙의 기준으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이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마 6:33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께서 오시기 전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은 이미 벌써
믿음의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실천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여서 심판하시기로 작정 된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으로 부하게 되는 것보다는,
살렘 왕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자신의 것을 드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선택한 믿음의 삶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창세기 14장 아브람의 사건의 내용이 주는
성령의 교훈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브람 같이 하나님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롯이 자기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선택한,
물이 많아 애굽과 같아 보였던 풍요의 땅 요단은
하나님께서 있지 않은 곳이라 흑암이 될 곳이었고,
여전히 메마르고 가뭄의 땅 가나안은
아브람에게 뿐 아니라
그의 자손과 또한 믿음으로 자손이 된 우리에게도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이, 재물이, 권세가 있어야지만
목이 마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계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교훈은 이런 아브람이 믿음으로 선택한 삶을 본받아,
너희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만 우리 모든 삶의 이유와 목적과 샘입니다.
아브람처럼 선택하며 살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도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시는 제사에 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방송으로 뵙겠습니다.
본문을 설명드리기 전에 먼저,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으로,
멜기세덱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하리라 생각해서,
오늘은 이 설명만 나누고 다음 시간에 본문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롯이 거하는 요단을 중심으로
주변 왕들이 일어나 전쟁하는 중에 롯을 잡아갑니다.
그리고 오늘 나눌 말씀은,
그래서 아브람이 자신의 집에 있는 군사를 이끌고
롯을 구해 내며, 돌아오는 중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서 전리품 중에서 십의 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습니다.
아브람이 전쟁을 마치고 만난 멜기세덱입니다.
먼저 살렘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사실 살렘 지역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살렘 지역을 예루살렘이 있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76편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76:2
2 그의 장막은 살렘이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시온과 살렘은
같은 지역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살렘 왕 멜기세덱의 이름의 뜻은,
성경 히브리서 7장 2절에 있듯이,
'의의 왕', '평강의 왕'입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면서 제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제정일치였던 시대를 생각하면,
제사장은 곧 절대 통치자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사무엘 다음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왕으로부터
제정분리시대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사사와 선지자 그리고 예언자와
나라의 통치자 왕은 각기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제자장 계열은 모세의 형 아론의 계보를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론의 자손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율법의 제도가 있기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어떻게 왜 있게 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후에 히브리서를 살펴볼 때 이 내용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일단 여러분들이 듣고 기억해야만 하는 내용은,
모세의 형 아론의 계보를 따르지 않는
제사장의 출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유다 지파이면서도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는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편으로부터 히브리서를 본문에서 보겠습니다.
시 110:1, 4
1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 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기록했습니다.
‘너’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언약입니다.
본문에서 ‘나’는 시편의 저자입니다.
그리고 ‘너’는 시편의 저자인 ‘나’가 대상으로 부르는,
‘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봐야 합니다.
막 12:35~37(눅 20:41~44)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그러므로 시편 기자의 성령에 감동된 고백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곧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에서,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제사장을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사장의 계보는 두 사람을 시작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율법을 따라서 모세의 형 아론을 시작으로 하는 대제사장과,
창세기의 멜기세덱을 시작으로 하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둘의 차이는,
아론으로부터 시작하는 대제사장은 계보가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멜기세덱의 대제사장은
계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뿐입니다.
그런데 본래 대제사장의 시작은 율법을 따르는 아론이 아닌,
창세기에 기록된 멜기세덱이 우선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또 다른 차이는 영원성입니다.
아론의 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동안일 뿐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으로 된,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이로 갈리지 않는 영원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신 이후 대제사장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영원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대제사장은 절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히 5:5~10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 모두 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언약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의 형통을 잇는 대제사장이 아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장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벧전 2:5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9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절차를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분명한 직분을 얻은 것입니다.
히 7:1~28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창세기 아브람 사건을 설명하면서,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모세 이전 율법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제사장이 있음을 증명한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성경 본문을 보겠습니다.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6절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아브람을
최고의 선지자며 하나님의 사람들로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이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6절 말씀은,
그들보다도 더 높은 존재가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는 약속을 받은 아브람을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람을 직접 축복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직위는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보다도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8절 말씀은, 아론의 계보를 따르는 대제사장들은 죽었지만,
멜기세덱은 죽음이 없는 영원히 살아 있는 대제사장으로
십의 일조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 말씀이 바로, 율법이 있기 전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존재와
모세의 율법을 통한
아론의 자손인 대제사장의 시간의 차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론의 대제사장은 죽게 되면 다른 사람으로 이어지지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은 영원하기 때문에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으심 같이,
그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의 직위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우리도
대제사장으로 직위만 받으면 끝인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대제사장답게 사셨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얻었으니
그처럼 대제사장답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며 교훈입니다.
이제 창세기 본문으로 넘어가셔,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오는 때에,
이와 같은 멜기세덱을 만나서 그로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창세기 14장 24절까지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오늘 멜기세덱에 관해 먼저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고요,
남은 본문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참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말씀의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사실 이 말씀의 교훈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2장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과,
19장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롯을 피하게 하신 사건의 기록도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은,
아브람이 조카 롯을 떠난 후에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나누었습니다.
아브람은 물이 많은 요단들을 택한 롯을 보내고
여전히 가뭄으로 물이 부족한 가나안 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에
의도하지 않게 남겨진 상태입니다.
그런 중에 롯이 택한 요단을 중심으로
그 땅에 분쟁이 일어나 전쟁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 1절의 시작은 어떤 단어로 시작합니까?
장소가 같은지 혹은 다른지 모르겠지만,
지역 이름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을 쌓던 평지
‘시날’과 동일한 지명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약속의 땅은 가나안이고,
그 지역 전체가 거역의 탑 바벨이 세워진
‘시날’평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앞에 기록된
성경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나옵니다.
이 말씀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천사들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천사로 이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영의 존재와 육의 존재가
공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천사와 우리가 동등한 입장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히브리서 2장 7절에,
‘저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조금 못하시며’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내용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사람인데 천사보다 못하다는 차이를 말씀합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인데 사람과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서
거인족 네피림이 되었다고 설명은
성경의 의미와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영적인 존재와 육의 인간이
동거하는 상태가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보면 안 됩니다.
원어로도 ‘아들’은 ‘가문을 세우는 자손’입니다.
그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창세기 3장 이후에 나오는 두 가문의 시작을 봐야 합니다.
아담과 셋의 가문은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를 드린 가문입니다.
다른 가문은 가인의 자손들로,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손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이 두 가문이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생활구역을 달리해서 살다가
서로 생활구역이 가까워지면서 서로 결혼을 하여
한 가문으로 서로 섞이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아담과 셋의 자손이 가인의 자손과 혼인함으로
이들의 혈통이 섞이게 된 것입니다.
노아의 혈통에는 바로 가인의 혈통이 흐르고,
이들 중에 가나안의 자손이 시날 땅의 주인이 됩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게 되는데,
노아 자손 모두가 이 일에 동참하게 된 것으로
해석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나안과 시날 평지는
같은 곳 공존하는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브람의 동네 근처에 있는 시날 지역에 있던 왕들이
서로 전쟁을 할 때,
시날 왕과 엘람의 그돌라오멜이 중심이 되어
소돌과 고모라의 왕들을 정복합니다.
이때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는
요단 들에서 양을 치며 지내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가고
그의 재물도 빼앗깁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이들을 소멸하고 롯과 그의 재물뿐 아니라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전쟁의 역사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다음 본문까지 읽어야지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아브람의 전쟁과
창세기 18, 19장 롯의 소돔 탈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들어야만 하는
성령께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본문만의 내용으로는 바른 교훈을 받기
어렵습니다.
앞의 내용과 연결지을 때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내용은 아브람이 처음부터 조카 롯을 떠나지 못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동행한 내용입니다.
아브람이 이와 같은 전쟁에 말려들게 된 원인이,
친척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람이 혈육 조카 롯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는 꽤나 오래전의 일입니다만,
아브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행한 실수의 값을
그대로 치루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잘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일에 간섭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롯을 보내야 한다고 말씀한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애굽을 지나 다시 가나안에 와서는 결국
아브람은 롯을 보냅니다.
그리고 현재는 아브람과 롯은 서로의 길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의 마음은 여전히 혈육인 롯에게 매여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아브람에게 권면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결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란에 남아 있어야 할 롯이 약속의 땅까지 들어와
아브람과 같은 하늘 아래 있다 보니
롯과 딸들에게서 낳은 아들들 모압과 암몬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오랜시간 그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죄가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왜 롯의 전쟁에 매였습니까?
롯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록 몸은 떠났지만, 마음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롯이 떠난 후
곧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기록을
우리는 주의해서 읽고 묵상해야만 합니다.
아브람이 롯의 곁에 머물러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고 가까이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람은 혈통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또 다른 변명으로 이유를 대겠지만,
하나님께는 설득력이 없는
아브람과 우리 자신의 욕심일 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브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다음 본문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롯을 찾고 떠나고 보내야 합니다.
롯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도 우리도 롯을 선택한 것은 자신입니다.
그렇기에 롯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롯은 자신의 절대 필요라는 변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용한 시간에 마음을 다하여 성령께 기도합니다.
‘성령 하나님, 제게 있는 롯을 떠나고 보내기를 원합니다.
내게 있는 롯을 알려 주시옵소서.
내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고백합니다.
내 귀에, 내 마음에 나의 롯을 깨닫게 하소서.’
단 한 번의 기도로도 알 수 있겠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성령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마음에 욕심의 욕망을 가지고
그저 하나님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기도한다면,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아브람이 가뭄을 핑계로 점점 남방으로 가면서,
애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의 결정을 놓고,
하나님께 의견을 물으려고 제단을 쌓고 여호와를 초청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초대에 응하시지 않아서 결국
아브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애굽으로 갔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사건을
앞선 시간에 나눈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억해야지만, 다음 시간도 이해할 수 있고,
아브람이 이후에 롯을 완전히 떠나고 나니,
이삭만 가나안에 남기고
다른 아들들은 모두 먼 곳으로 보내며,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순종까지
할 수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 안에 롯을 찾으시고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아브람이 롯과 계속 같이 다니다가
드디어 지난 시간부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때를 기다리셨나 싶을 만큼 하나님의 움직임도 빨라집니다.
성경의 첫 말씀은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본토와 친척 그리고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씀에서
아브람은 조카 롯을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 땅이 약속의 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후로 계속 침묵하고만 계십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지 보니까
아브람이 롯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롯을 떠나라고 하시지 않고 대신에,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하심으로,
아브람이 자연스럽고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롯을 떠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롯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는데,
아브람이 못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여러분들이 잘 들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억지로 무엇을 시키시는 것도,
강제로 어떤 일을 하도록 명령하시는 것도
즐거워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대신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을 막지 않으시고
오히려 애굽에서 아내를 팔아서
더 많은 가축을 이끌게 하시고 부요하게 하십니다.
가나안에 다시 돌아오니 전보다 많아진 가축 떼로 인해서
여전한 공간 안에 아브람과 롯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질 수 밖에는 없는데,
그럴 때 억지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자원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몬 1:13~14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신약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은 부유한 주인이고 종 오네시모가 그의 재물을 가지고
로마로 도망갔다가 거기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이 누군지
그리스도 안에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고하지 않고 오네시모를 자신의 신복으로 부리고 싶지만,
이는 성령 안에서 옳은 일이 아니라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유케 하고 주 안에서 형제로 대해달라는 편지를
사도 바울이 써서 보낸 내용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빌레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억지로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기를 원함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성령을 통해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감동을 받고 선한 주의 일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하고 감동을 주어도 순종하지 않을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도 행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자에게도 말입니다.
그래서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우
응답이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감동과 말씀을 주셔도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아브람이 롯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보이는 이 땅도 주고,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보여주신 그 땅은 너무 가뭄에 메말라 애굽으로 도망치게 했던 땅이고,
자손은 한 명도 없는데 백지수표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람의 믿음이 있습니다.
전에는 그곳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서는 제단을 쌓은 후
미덥지 못해서 점점 남방으로 갔다가 애굽까지 갔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약속을 떠났던 바로 그곳에
이제는 믿음으로 제단을 쌓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애굽으로 간다고 보고하려고
제단을 쌓고 여호와를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다릅니다.
이제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계속해서 드릴 여호와의 제단을 쌓아버렸습니다.
사실 성경 한 부분에는 너무나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그 모든 교훈을 나누려면 책 한 권 이상의 분량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 중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마음이 변해서 메마른 가나안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도 물론 교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이 주는 하나님의 교훈은 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롯을 떠나지 못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알게 하셨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하신 말씀에도
롯을 떠나지 않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요?
더 요구하셨다가는 아브람이 다칠까봐.
그래서 자원하는 환경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기록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진지하게
메마른 이 땅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물었다면 하나님을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아브람은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서
이렇게 하면 되고, 그 다음은 요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서는
남방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갔다가 아내도 팔았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왔다가 조카 롯과 어디로 갈지
내기를 했다가 결국 스스로 남겨진 곳은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듣기 원하십니까?
마음에서 욕심을 가지고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아브람 스스로가 롯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위한 다음 단계의 계획을
진행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가,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가지고 그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시작하려니
애굽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래야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그리고 그 다음 약속을
진행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 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잃어버린 그 행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자신이 떠났던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와 새로운 믿음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묻기 위해
여호와를 초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메마른 가뭄으로 가득찬 땅에서
믿음으로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돌아와 보니 여전히 그 곳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아브람 자기는 긴 여정으로 움직였는데,
돌아와 보니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서 자신을 맞아주십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이제서 조금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언제부터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는지
깊이 생각하고 돌이켜 그 행위를 잃어버린 그때 그 장소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곳에서 시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진 곳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물어도
하나님은 대답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분이 계신 곳으로 가기만 하면,
내가 멀어졌던 그 때와 장소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어디에 이 말씀이 있습니까?
눅 15:11~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누군지 아시겠지요? 돌아온 탕자 아야기입니다.
둘째가 자신의 재산을 달라해서 가지고 먼 타국으로 갔습니다.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멀어지기 시작한 곳은 아버지가 있는 그의 집입니다.
먼 나라에 가서 모두 탕진한 후 후회합니다.
18절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20절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2~23절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우리가 아버지가 계신 곳, 내가 떠나 온 곳,
내가 불순종했던 그 시각 그 곳으로 돌아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어찌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멀어진 그곳에서 아무리 '아버지, 아버지!' 도와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이해가 됩니까?
다음 시간이 될 때까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고,
내가 하나님을 향한 첫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분명한 원칙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롯을 보내지 않고서 하나님을 찾으면 대답하실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롯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물으십시오.
그리고 그 롯을 떠나십시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멘.
들풀북스에서 방송하는 창세기 강해 시간입니다.
곧 들풀북스 출판사에서 『성령의 방언』이라는 책이 출판됩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람이 물과 풀이 많은 애굽에 내려가서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지참금을 많이 받아
부자도 아닌 거부가 되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 온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아브람의 생각은 아내 사래는 어찌되든지
자신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사래를 바로에게 자신의 누이라고 하고 넘겼을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나누었습니다.
아브람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규정을 잊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좋아 보이던 목초지를 뒤에 두고
다시 가뭄으로 메마른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떠났을 때보다 가죽이 더 늘어나다 보니
물과 풀이 더욱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조카 롯이 가지고 있는 가축의 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아브람과 조카 롯은 따로따로 흩어져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애굽에서 얻었던 가축이 처음에는 복인 줄 알았는데.
메마른 가나안으로 돌아오니 오히려 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서 롯을 분리해내는
아주 자연스럽고 자원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브람은 억지로 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고,
이로써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아브람은 혈육이기에 선택의 권한을 어린 조카에게
먼저 줍니다.
롯은 자신의 눈에 보기 좋은 물과 초장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브람의 차지가 되었지만,
모두 아브람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물과 초장이 빈약한 것은
요단 들을 제외 한 모든 곳의 공통점일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아브람은 처음 제단을 쌓던 곳에 여전히 남게 되었습니다.
멈칫 아브람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말입니다.
물과 풀을 찾아 애굽까지 오고 간 대가가 여전히 약속의 땅,
그러나 물과 풀이 모자라 사람과 가축도 헉헉대는 곳입니다.
조카 롯은 풍요의 땅을 선택하고 갔습니다.
약속은 약속이기에 롯을 보낸 후 아브람의 심정은 어땠을지,
참담함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아브람의 마음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 약속의 땅에서는 가뭄이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아마 밀고 나갔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의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나 되시는 분이, 목죽업자에게 물과 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모르신다는 말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정하신 가나안은 목축업자인 아브람에게는
전혀 알맞지 않은 곳일 뿐입니다.
그 땅을 선택하실 때 아브람에 대한 고민을
조금도 하시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이 목축업자로서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야 할 미래를 생각하니
마음과 생각이 먹먹했을 것입니다.
애굽을 몇 번이나 넘나들어야 할지 그 고통도 헤아렸을 것입니다.
그 생각의 끝은 '왜 이 땅을 선택하셔서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신다고 하셨을까?
그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보면서
이 말씀을 기록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아브람의 마음도 이해하고
그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생각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기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 본문을 통해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교훈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까?
아브람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라면 무엇입니까?
다음의 두 절 말씀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단 한 마디도 없었을 것입니다.
창 13:10절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3절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아브람이
이와 같은 땅이라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브람을 그곳에 있도록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마르지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가나안 땅에
여전히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목축업자로서의 안목이 뚜렷하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미래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는 없었던
족장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명령을 하시면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만약에 그렇게 되면 아브람은 불순종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환경을 통해서 아브람 스스로가 선택하고 자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브람이나 우리나 모두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물과 풀이 넉넉하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는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잠 30:7~9절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브람의 문제는 메마른 가나안 약속의 땅에 계신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고
요단과 애굽의 풍요를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보이는 모든 것으로 믿으려 합니다.
'너희도 아브람처럼 살면
여전히 약속의 땅에 거하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 말씀을 읽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는 나를 보아라.....'하신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의 말씀입니다.
부요해서 하나님을 잊기 보다는
부족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리가 더 완벽한 곳입니다.
아멘.
이번에 나눌 말씀은 애굽으로 간 아브람입니다.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방향을 알지 못한 채
순례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거기에 롯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여행에서 마침내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장막을 쳤습니다.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이제는 긴 여행을 마쳤구나!! 좀 쉬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소니까 완벽하겠다.....'
'하나님은 내가 목축업자라는 것을 아실테니까
알아서 풀과 물이 가득한 곳으로 인도하셨겠구나!!!'
그런데 그 가뭄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람의 믿음과 안전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가축은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쓰러져 갑니다.
그래서 성경의 표현대로 점점 더 남방으로 남방으로
한 걸음씩 이동을 합니다.
이곳을 지나면 곧 애굽에 이를 정도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있으셨으니까 그냥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족장이기 때문에 어떤 조처를 취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아브람의 인내를 시험하시듯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창세기 12장 8절에 아브람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부르다’는 동사는 본래 ‘초대하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아브람의 목적은 계속 남방을 지나 애굽으로 가야하는지
묻고 싶어서 하나님께 밥상 차려 놓고 초대장을 전달한 것입니다.
사실 아브람은 목축업자로서 목이 탑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의 초대에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림끝에 애굽 여행을 결정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애굽 사람들은 이쁜 여자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아내와 깊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브람과 10년 차이고, 75세에 떠났으니
대략 사래의 나이는 65세라고 계산해 봅니다.
아브람의 제 눈에 콩깍지인지는 모르는데,
사래가 얼마나 이뻤길래 저정도까지 말했을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내 사래와 함께 오빠 동생으로 하자고 협약을 했습니다.
사실 사래는 이복 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한 것을 속인 것은 거짓입니다.
애굽에 가니 예상했던 대로 아내 사래를 욕심내는 애굽 사람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가외 수익도 크게 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래의 일로 그 애굽인의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는 애굽왕 바로였습니다.
어떤 계시와 어떤 방법이었는지 몰라도 바로는 사래가 범상치 않은
여인이며 아브람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브람을 불러 자신을 속인 일을 묻고는 쫓아냅니다.
평안을 찾으러 갔던 아브람은 위협을 당하며 다시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옵니다.
문제는 어떤 내용이 아브람을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떠난 것은 아브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람과 그의 자손으로 복을 이루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생각은 자신만 해를 받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래를 팔고라도 자신만 생명을 잃지 않으면
하란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래는 아마도 이런 아브람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복오빠이며 남편인 아브람을 살려보겠다는
사래의 지극한 정성의 마음이었을지로 모릅니다.
이 상황을 감찰하신 하나님께서 급하게 바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계시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0:5~7절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이 말씀은 그 후에 아브람이 또 한번 사래를
블레셋 왕에게 주었을 때 그 왕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로 보면 애굽왕 바로 때에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런 일을 겪었어도 아브람의 마음에는
생존의 가치는 자신에게만 있고 사래에게는 없다고,
즉, 자신의 씨만이 완전해야만 한다는
신념에 빠져있는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돌아와서도 아내는 자녀를 낳지 못하자,
몸종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맞은 것입니다.
아마 애굽에서 바로에게 아내를 팔아먹었을 때
바로가 사래의 시녀로 보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아브람이 사래와 함께 동침한 것을 보면,
여자는 누구여도 관계 없고 오직 자신의 자녀만 낳아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굳어져 있는 아브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7:15~19절
15 하나님이 또 아브람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잘못된 생각,
'자신만 살면 된다, 아내는 누구여도 상관없다'라는 신념을
무너뜨리시고 결국 말씀하십니다.
“오직 사래에게서 낳아야 하며 그를 존중히 여겨라,
내가 그도 선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생각은 백 세와 구십 세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 바로에게와 블레셋 사람에게
아내를 팔았던 것입니다.
부름을 받고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온전했습니까?
온전해지는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약속의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은 지난 시간을 생각할 때
이는 자신의 연약함과 사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믿음에 실망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도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돕고 계십니다.
한가지는, 자신의 교만한 신념만 내려 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빠르게 저와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알라는 교훈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23:13절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욥 42:5절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께 향한 믿음이
아브라함처럼 욥처럼 온전하여 주를 뵙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아브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바벨탑 사건과 셈의 자손을 나누었습니다.
셈으로부터 9대손이 아브람입니다.
노아로부터는 10대손이 됩니다.
노아 홍수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나이를
120년으로 정하신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창 6: 3절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홍수 후에 인간의 나이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음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로 보면, 하나님께서 죄를 짓기 전에
인간에게 허락하신 많은 능력들이
에덴동산의 사건과 노아 홍수심판 이후에
서서히 진행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급작스럽게 또는 그다음 날부터 나타나지 않고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 안에서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래서 나홀은 데라를 이십 구 세에 낳고
백십 구 년을 지냅니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데라보다 먼저 그 땅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데라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아브람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데라 때부터 인류의 모습이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이십 년으로
제한된 생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류는 죄의 결과를 뼈아프게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죽은 하란을 묻고
자신과 남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하란에 머물고 장막을 세웁니다.
세월이 흘러 데라도 죽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이 데라 가족의 족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정착한 아브람을 향해 부르십니다.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목적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려고 하심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곧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자신이 견뎌야만 하는
거대한 심판 앞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아브람은 친척을 떠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경우여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은 분명히 친척인 롯이 함께 갔다고 기록합니다.
나홀은 여전히 하란 땅에 머물며 작은 종족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롯은 갈대아 우르에서 먼저 죽은 하란의 아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하란의 부족을 이끌게 되니
큰 아버지 아브람의 권위가 필요해서 쫓았을 수도 있고,
당시 작은 혈족 부족들이 모여서 힘을 합했기에
아브람이 일부러 데리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마침 아들어 없었던 터였습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지,
다시 말해서 아브람에게 어떤 정당한 핑계가 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롯이 아브람을 떠나지 않은 시간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롯이 떠난 후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순종에 대한 조건을
아주 세밀하게 지켜보는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란을 떠난 때의 나이가
칠십오 세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아브람을 다음과 같이 평가해서 기록합니다.
히 11:8절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데라의 인솔로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다가,
중간에 있는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그 땅을 데라가 보니 목축하기에 충분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목축을 합니다.
아브람의 동생이며 데라의 아들인 나홀은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남았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 손실을 감수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은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땅을
찾으러 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보여진, 혹은 알고 있는 곳에 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가진 가축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혹시라도 몇 날 초장을 찾지 못한다면,
혹은 많은 짐승에게 포위를 당한다면,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쫄딱 망하는 신세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계산하면서도 떠나는 것입니다.
사실 하란이 주는 안정감은
떠나야만 하는 아브람에게는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가야만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 어떤 음성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 하나님의 음성을 부인할 수 없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브람의 느낌과 생각에서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만 하는
권위가 있는 음성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잠깐 벗어난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갈대아 우르에서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려 했던 사람은
아브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겠습니다.
창 15:7절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느 9:7절
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두 곳은 모두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낸 것은 아브람으로 기록합니다.
우리가 이 내용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더 앞에 세워 일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약속의 땅은 데라를 위해 예비한 곳이 아니라
아브람을 위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과정에서 아브람 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적을 두고 행하시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약속을 하시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 안의 소원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오히려 데라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인솔하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때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의 말에 순종했을 뿐인데,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아브람의 첫 발자국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도록
한 걸음씩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믿음으로 그 땅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러분, 오늘의 주제는 ‘부름’과 ‘순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람이 받은 ‘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큰 복을 받기 원하는데,
그 복이 세속적 성격을 가진 복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을 받을 생각을 하기 전에
아브람이 복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목말라 합니다.
선교사로 부르셨다, 목사로 부르셨다....등등
하나님은 누구나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만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에서 부르심에 대한 축복은
이런 사람의 것이라는 뚜렷한 교훈이 있기 때문에
이 교훈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시면 무조건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부르심에서 그의 무게를 달아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구약과 신약 모두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순종을 보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순종을 달아 보셨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집과 열두 겨리가 되는 소를 버리고 따르는
순종을 보였습니다.
선지자들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부름을 받았을 때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곧 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복종함으로
이 땅에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버렸던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로
다시 얻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순종이 중요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에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의롭게 되는 모습이 바로 순종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난다고 야고보 기자는
자신의 서신에 기록한 것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더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 순종을 하려면, 자신의 몸이 자유로와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버려야 온전한 순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이루어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브람의 부르심의 축복에 목말라하면 안 됩니다.
그가 행한 순종에 목말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순종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최고의 축복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장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요약하면,
그냥 여호수아에게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떠나지 않고 모세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면 주신다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내가 네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네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이라고
예수님은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헌물을 드리면, 무엇인가 봉사로 수고하면,
금식하면, 예배 빠지지 않고 지각하지 않으면’이 아닙니다.
‘내 말에 순종하면’입니다.
아기의 착각은 울면 다 이루어지는 줄 안다는 것이고,
우리의 착각은 목사의 말에 ‘아멘, 아멘’하고 순종의 고통을 피하고
말로만 해도 얻어지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이 ‘순종’이 복의 도화선이 되는 것입니다.
교사를 하면 복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사기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 땅에서 누리는 복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영원한 생명의 처소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주여, 주여.' 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얻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많이 받고 누리고 벌고 건강한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 한 가지고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는 먼지일 뿐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83장이 있습니다.
‘구름 같은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 나는 분토와 같이 내어 버리고서
오직 천국의 복을 사모하며 사니 구원 받은 내 이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성경 역사에서 처음으로 아브람을
복의 중심에 세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을 그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주의 땅에서,
그의 정착의 땅에서,
아버지 데라로부터 값없이 물려받았던
모든 안전 그 이상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름과 약속만 의지해서,
모두 버리고 떠납니다.
자기의 것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의 처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축복에 목마르지 말고, ‘순종’에 목말라라....
순종에 목마르면, 자기 것을 버려라입니다.
아멘.
오늘 나누는 창세기 말씀은 10장과 11장입니다.
10장 전체는 홍수 후의 노아 아들들의 자손을 기록합니다.
자, 성경 본문에서 족보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역사적으로 사실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먼저, 창세기 10장 1~5절은 야벳의 후손들입니다.
창 10:5절
5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세기 10장 6~20절까지는
함의 자손과 가나안 자손들의 계보입니다.
다음 말씀을 눈여겨서 봐야 합니다.
창 10:8~10절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 10:18절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창 10:20절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창세기 10장 21~32절까지는 셈의 계보를 기록했습니다.
창 10:31절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이 말씀에서 온 땅은 노아 자손들로 채워졌다고 기록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노아 대홍수 심판 때 끝이 나고,
오직 노아 가족만 남았고,
그 가족에게서 현재 인류가 나온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후손도 맞지만,
노아의 자손이라고 해도 맞습니다.
노아의 자손들은 그들의 언어를
각각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인종과 언어의 나뉨까지도
노아 자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11장으로 갑니다.
앞에서 시날 땅은 누구로부터 시작합니까?
창세기 10장 10절을 보면,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의 뜻은 ‘건장한’입니다.
그러나 문맥 전체를 보면,
‘앞에서’는 ‘대면해서’, ‘앞쪽에서’입니다.
‘용감한’은 ‘강력한’, ‘폭군’, ‘우두머리’, ‘강한 사람’입니다.
좋은 뜻이 아닙니다.
‘사냥꾼’은 ‘추격자’, ‘포획자’입니다.
9절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9절 말씀을 다른 풀이로 하면, 이와 같습니다.
‘니므롯은 여호와를 대면해서 강력한 추격자가 되었다’.
니므롯에 대한 설명을 짧게 표현한다면,
‘여호와를 거역하는 자’,
혹은 ‘여호와의 뜻에 반역하는 자’
‘여호와를 포획하려는 힘이 센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서
건장하고 늠름한 존재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뜻을 펼칩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에 노아 후손들 모두를
한 곳으로 집결하게 합니다.
바로 시날 평지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선동하며 거대한 탑을 쌓습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이들을 지면에 흩으시는 것인데,
니므롯이 이 뜻에 거역하고 대항해서,
반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모이자’ 하고 탑을 쌓은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이들이 ‘구음’과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거대한 탑을 쌓았으니까,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서로 언어가 이해되지 못하고
통하지 않아서 온 지면에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노아 후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언어끼리 모여
부족국가를 세우고 국가로 발전합니다.
언어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언어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로마서 10: 9, 10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의 권세를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11장에 ‘구음’과 ‘언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구음’은 ‘사파’로, 말을 하는 기관인 ‘입술’입니다.
‘언어’는 ‘다바르’로, ‘말의 내용’입니다.
즉, ‘한 언어’라는 뜻이 한 종류의 언어가 아닌,
‘말의 내용’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알아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의 기록은 셈 자손으로 좁혀집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내용으로,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생략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중에서 바벨탑 심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교훈은 얻기 위해서는 ‘니므롯’을
자세하게 보아야만 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니므롯에 대한 설명을
우리의 생각대로 오해하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즉, ‘여호와 앞에서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말을,
문자대로 이해해서,
다른 사람보다 먹잇감인 야생동물을 잘 포획하는
늠름한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니므롯은
‘하나님의 정면에 서서
여호와를 포획하려고 앞장선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지배하는 땅이 바로 시날 땅이었고,
하나님을 대항해서 쌓은 거대한 바벨탑을 쌓던 곳이
바로 시날입니다.
니므롯과 시날 땅과 바벨탑은
절대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의 판단은 어떠했습니까?
‘흩어야겠다.’
심판입니다.
요약해 보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받는다는 내용이,
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부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지겠습니다.
홍수가 그치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농사를 짓습니다.
그때 노아가 포도주로 인해서 곤혹을 치르는 내용입니다.
먼저 성경은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온 땅에 사람들이 퍼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이후,
다시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나안의 아버지 혹은 우두머리가 함이라고 기록합니다.
노아는 포도열매로 술이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홍수 이전 그 때가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한편 노아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대략 짐작이 됩니다.
노아의 모든 생존하는 조상들은
그 홍수로 인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노아와 친인척의 관계였습니다.
방주에서 나와보니 모든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처음 보는 산과 강들과 계곡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기온차도 홍수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아마도 저의 생각에서는, 노아가 옛 생각이 나서,
홍수 이전에 다른 이들이 만들어 먹었던 포도주가
그리웠을 법도 합니다.
노아 뿐 아닙니다.
그의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1년의 시간동안 방주 안에서만 지냈던 두려움의 시간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때,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는
제정신으로써는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 모습을 보았던 함은, 술에 취한 아버지 노아의 모습이
매우 신기해 보이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곧 형들에게로 달려가 자신이 보았지만 믿기지 않은
아버지 노아의 흉을 형과 동생에게 모두 고했습니다.
함은 단순한 생각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한 말과 행동을
낱낱이 알렸을 뿐아니라 몸으로도 흉내낸 것 같습니다.
한숨 잘 자고 일어난 노아가,
자신이 술에 취했을 때의 내용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함에 대하여 저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에 대해서는 좋은 말로 위로합니다.
항상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지금 자신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고 이 본문을 기록하셨는지
꼭 기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교훈이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내용을 생각하면서 좀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함 자신이 아버지 노아가 깬 후에 스스로 가서
자기의 행동을 고했기 때문에
노아가 알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두 형제 셈과 야벳은 함과 달랐기에,
아버지 노아에게 함의 흉이 될 수 있는
약점을 고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노아의 아내가 또는 며느리들 중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노아에게 함의 행동에 대해 일렀을 때에
순수하지 못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한 것이었다면,
함은 꽤나 억울해지는 것입니다.
함이 자신의 행동을 어린아이같이
본대로 흉내 내는 순수한 동기에서 했더라면 말입니다.
저는 지금 셈과 함과 야벳의 혈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종이나 피부색으로 분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록에 대하여 주의 깊게 관찰해야만 합니다.
만약에 앞에서 제가 추측한대로였다면
성경 본문은 다르게 기록했어야만 합니다.
창 9:25절
25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만약에 형이나 동생 혹은 어머니나 다른 사람들이
잠이 깬 노아에게 말을 전해준 것을 들은 것이라면,
성경은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듣고’라고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알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비록 술에 취했었지만,
취한 자신을 조롱하고 부끄럽게 옷을 빼앗은 함의 행동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난 후 함의 행동에 대하여
심히 부끄럽도록 저주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과 그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은 깊은 배려를 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섣부른 판단으로 성경 본문을
임의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드립니다.
제가 하루는 매우 늦은 시간 공터에 앉아 있는데
형제와 자매가 지나가며 이야기합니다.
자매 : 날씨가 너무 덥다, 그치?
형제 : 내가 며칠 전에 사준 손선풍기 가지고 다녀!!
(그러니 자매가 바로 대답합니다.)
자매 : 아~ 그 미약한 손선풍기???
형제 : 미약했어? ‘너희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이다’
자매 : 헐~~~
형제 : 미약해도 계속 틀고 있어 봐. 점점 창대해질 것이야.
너무 늦은 시간이라 고쳐 주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교훈을 받기를 기도하고 멈추었습니다.
사실 형제가 인용한 성경 본문은 욥기서 8장 7절에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수아 사람 빌닷이
하나님의 사람 욥을 책망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입만 살아서 조잘대면서 한 말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성경 말씀을 앞뒤도 없이,
달랑 한 소절만 떼어내어서 사용하기 위해 인용한다면,
참으로 문제가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보다 더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새로 음식점을 시작하는 기독교이
벽에 쉽게 걸어 놓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심방이라고 하고선 선물하는 교회도 문제고,
이 말씀을 받아들고 하나님의 계시인 양 감격해서 고마워하는 성도들도
문제가 없다고 하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함은 아버지 노아가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행동을
직접 아버지 노아에게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이 받은 저주는 당연한 일입니다.
한때는 노아의 행동이 너무나 예민한 것으로 보고,
지나친 행동이라고까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노아는 그저 감으로 느껴지는 대로가 아닌,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함을 판단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비교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에서는 이와 같습니다.
마 7:16절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갈 6:7절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리고 홍수가 끝나고도 노아는 삼백 오십 년을 더 살고 죽습니다.
그는 새로운 인류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함을 판단한 결정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달아 보시며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난 우리의 행동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근거를 가지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상 2:3절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다음 시간에 창세기 10장 말씀으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멘.
지난 시간으로 홍수가 끝났습니다.
성경 묵상의 최종 목적은,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읽는 내게 무슨 교훈을 주시려는가?'입니다.
주실 교훈이 없는 성경 본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대할 때마다 긴장됩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내용의 기도가 셀 수 없이 많아야 합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정작 내게 감동되고 깨달아지는 말씀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의 기도 역시 같은 내용입니다.
‘하실 말씀도 많은데 그냥 의미 없는 내용을
기록하시지는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이해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내게 지혜를 주시고 깨달아 주의 생각에 다다르게 하소서.’
이와 같은 기도의 반복과 계속되는 묵상을 저는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의 읽는 재미를 제공해주는
하나님의 서비스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따끔한 교훈입니다.
이해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내가 노력해야만 하는
땅에 뭍힌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재미가 있고 이해가 되어서 읽는 책이 아닙니다.
반드시 읽어야 하고 감춘 교훈을 캐내어야 하는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끝없는 간구는 필연적인 우리의 수고와 노력입니다.
오늘 서론이 길었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자녀들 그리고
방주에 함께 있던 모든 땅과 하늘이 짐승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듣고 또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시간입니다.
창 7:17~21절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라
20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명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7장 홍수의 시작에서 성경은
‘십오 규빗’에 높은 산이 다 잠겼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한 규빗은 대략 45cm입니다.
675cm로 약 7m가 되는데 높은 산이 다 잠긴 것입니다.
이 말씀은 노아 홍수 이전의 땅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산의 높이와 계곡의 깊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노아가 1년 만에 방주 밖으로 나와 봤더니,
1년 전 노아가 알고 살았던 세계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 달라진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유로 하면, 잠을 잘 때는 지구였는데
깨고 나니 달에 있더라....혹은 다른 은하계에 있더라.....
이렇게 비유하면 될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자녀들이 놀랐을 일을 생각하면
몸이 떨려 옵니다.
하물며 노아와 그의 자녀들은 어떤 마음과 생각이었겠습니까?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8장 20절의 ‘제사’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달라져 보이는 세상에서 노아가 가져야 할 마음은
두려움 외에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찾던 노아였기 때문에
그의 제사는 더욱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1~17절까지 말씀을 요약하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짐승과 물고기를 노아의 후손들에게 먹을 것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피조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모든 자연의 동물들과 교감이 되지 못하도록
큰 담이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면 싸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싸우는 이유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이후에 모든 동물과 조류와 어류가
인간과 공존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공존이 아닌, 먹고 먹히는 관계로 바꾸셨습니다.
둘째, 모든 육식이 허용되는 대신에 조건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값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피는 곧 모든 생물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육류에서 피를 최대한 제거한 후
요리를 해서 먹습니다.
셋째, 노아와 그의 후손들 그리고 모든 생물들과 언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무지개를 두어서 언약하십니다.
그 언약에는 두 가지 그늘이 있습니다.
하나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에
다른 것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물로는 더 이상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에
또 다른 심판이 여전히 남겨져 있다는 뜻을 포함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온 세계의 종말과 마지막 심판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아 시대에도 온 세상에 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심판하셨기 때문에,
이후의 세상도 곧 악이 가득할 것을 예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 축복입니다.
1절 말씀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7절 말씀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이 말씀과 함께 비교해서 읽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홍수 이전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창 1:28절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략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정복하고 다스려라’는 말씀이 없어졌습니다.
다스림에 필요한 요인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부르면 와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간을 두려워하도록 해서 불러도 오지 않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생물을 다스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죄인’으로서는 불가능해진 영역입니다.
언제 회복합니까?
이사야서에 그리스도의 나라 즉, 새 나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11:6~9절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시간이 이르기 전까지는 인간과 생물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갈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인간이 죄를 지은 대가를 지불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상기하고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이 땅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다스림의 영역이 제한되고,
생물은 인간을 두려워 피하여 순종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오늘 창세기 9장을 모두 하려고 했는데, 시간과 내용이 많아서
17절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을 읽고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습니까?
혹은 받아야만 합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내용의 가장 두드려진 면은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일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잘못한 일을 고백한 것으로
보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아닌,
하나님의 자백서 또는 반성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무지개 언약으로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홍수 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인간은 온 세상을 죄로 가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인간들아 너희가 다시 죄로 내가 창조한 온 땅을 더럽히면
물이 아닌 다른 것으로 온전히 심판할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참....또 한가지가 있는데 생물의 고기를 주는 대신
피는 먹지 말라. 내가 그 피 값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이 내용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디서 많이 읽은 것입니다.
바로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온 세상에 인간은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주시고 금령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켜 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계신 하나님을 창세기 1장은 기록합니다.
이제 심판으로 온 세상에 남겨진 인류는 노아를 포함해 여덟 명뿐입니다.
이들에게 다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금령 대신,
땅에 있는 모든 것 생물의 고기를 포함해서 먹어도 되지만
그 생물의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먹으면 반드시
그 생명의 값은 다시 찾으시겠다는 금령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인류의 시작은 아담에게서 노아 이전까지,
노아 후손들에게서 오늘 우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을 지켜 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내용이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이제 무지개 언약에만 몰입하시지 말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살펴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예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아들을 위해
닭고기의 맛있는 부위를 주고
엄마는 버려진듯한 뼈에 남은 고기를 드시면서
맛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닭을 먹는데
아빠가 된 아들은 자신이 먹고 남은 닭뼈에 조금 남은 것을
어머니에게 주었답니다.
할머니에게는 손주가 되는 아들이 물었습니다.
“그걸 왜 할머니께 드려?”
아빠는 대답합니다.
“원래 할머니는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을 맛있다고 하셨어.”
아들은 분명히 효자입니다.
그런데 아직 다 자라지 못하고 어린, 그리고 어리석은 효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 내용의 깊이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읽어 내지 못하고
성경을 대한다면, 예화에서의 그 아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신앙생활이 오래이면서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만 하는 자녀일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방송으로 뵙니다.
샬롬.
오늘은 좀 긴 노아 홍수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은 후 그 말씀의 교훈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 본문을 최소 2회 이상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 성경에 사용된 단어와 내용, 그리고 앞뒤 문맥의 연결을
따지며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단어가 무엇인지 찾아봅니다.
이 단계가 관찰입니다.
본문이 길어도 혹은 짧아도 반복되는 읽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해석합니다.
그 해석은 내용 파악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을 위해 몇 번이든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면 성경 본문을 최소한 3~5회는 읽게 되고,
내용이 머릿속에서 거의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고 하는지 묻는 기도를 합니다.
본문이 기억에 남아 있다면 기도하기는 훨씬 더 쉬워집니다.
이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기도와 묵상에서 알아지고 깨닫게 된 내용을 다시 정리합니다.
그리고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한 것을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그리고 마무리하면 묵상이 끝납니다.
이런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고 저와 함께 말씀 묵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번에 노아는 홍수 심판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7장 1절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가족을 데리고 배로 들어갈 시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암수 쌍으로
방주에 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을 배에 실으라고 하십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땅 위의 모든 생물은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은 인간이 먹어야 하며,
제사로도 드려져야 하기 때문에 일곱을 명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정한 짐승은 번성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배로 들어가게 했지만,
9, 16절에 각종 짐승과 새들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나오게 하시고
노아의 인도를 따라서 방주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칠 일 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하늘의 창이 열린 듯이, 땅에서도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사십 일을 꼬박 밤과 낮으로 물이 땅을 덮어 버렸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땅에서 숨을 쉬는 모든 동물은 새들도 포함해서 죽었습니다.
이제 배가 떠다닙니다.
그 물의 높이가 15규빗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1규빗은 대략 45cm로, 7m정도가 된다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산이 다 물에 잠겼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 당시 큰 산이 없이 거의 평지에 가까운 혹은
작은 언덕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홍수의 물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인해 흘러가
오늘의 산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렇게 물이 쌓여있는 날이 백오십 일 동안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땅을 원래대로 회복하셔야만 했습니다.
바람을 이용해서 땅의 물들을 말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노아의 방주에 들어갔던 동물과 새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여러분 잠깐 ‘심판’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심판은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그 생명을 빼앗김을 당하는 사람들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기준을 두고 ‘구별’ 하십니까?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라고 기록했고,
창세기 7장 1절에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다’라고
기록합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으로 또한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증명해 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인’ 혹은 ‘의롭다’는 뜻을 성경에서 이와 같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창세기 6장 22절과 7장 5절에 이런 내용으로 기록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그대로 다 지켜 행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행동이며, ‘의롭다’는 기준입니다.
착하게 살아서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노아는 누구와 비교해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바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하지 않은 사람은 죄인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한 노아를 의인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8장은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게 하셔서 물로 덮인 땅을
드러내시는 시간의 과정입니다.
이때 노아는 땅이 말랐는지 알기 위해 비둘기를 보냅니다.
마침내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와서
다시 날렸을 때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진노가 식어진 것과
땅에 물이 마른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일 년이 넘도록 물의 넘침으로 방주 안에만 있었던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나와도 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에서 노아는 자신의 한 발자국도
자기의 임의대로 내딛지 않습니다.
순종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입니다.
모두 방주에서 땅으로 나왔습니다.
노아의 첫 번째 행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 곧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노아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그 큰 홍수에서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방주에 있는 동안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기억은 감사로 가득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매우 많은 사건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이 말씀을 보면 이제 다시 심판하신다면
땅과 함께 심판하시지 않고
오직 인간의 악함으로만 심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9장 11절에는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하실 것’을
무지개로 언약하십니다.
이 말씀도 다시 생각해 보면, 물이 아닌 다른 것으로,
불, 지진 등과 같은 다른 것으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도 됩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 첫 물의 심판을 나타내심으로,
능히 하나님은 두 번째 심판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홍수의 심판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제 다시 인간의 악이 온 땅에 가득함을 보실 때
다른 방법으로의 심판을 나타내시겠다는 예시입니다.
그 두 번째의 심판도 역시 인간의 죄입니다.
무슨 죄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의 방주를 짓는 기회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 쉼 없이 그리고 중단 없이
꼭 믿음의 방주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
남은 심판에서 벗어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은 노아 시대와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먼저 노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곧 그 시대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11 온 땅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했다”
“12 땅에서 모두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그 결과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13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본문의 기록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악이 가득하다고 판단하신 분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보실 때에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태의 조건을 인간이 보는 기준에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모든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 기준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때에 아무런 이유 없이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 생각과 행위가 모두 악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왜 인간은 나면서부터 생각과 계획과 행위가 악하게 되었습니까?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아담과 하와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의 뜻과 욕망을 더 신뢰하고,
더하여 뱀의 꼬임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이후 인간은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서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6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모두 아내로 삼았다는 말씀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물의 심판을 갑자기 행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암 3:7절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래서 노아에게 은혜를 나타내시고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유는 물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아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노아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노아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완전하여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입니다.
‘완전한’의 뜻은 ‘온전한’, ‘흠이 없는’, ‘성실한’, ‘올바른’입니다.
‘동행했다’의 뜻은 ‘걷다’, ‘따르다’, ‘함께 가다’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도덕적이며 믿음 안에서 흠이 없고 성실하여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과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만 이 물의 심판을 알리셨던 것입니다.
14~21절까지의 말씀은 방주를 짓는 설계도를 알려 주시고,
그 방주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동물의 수와,
먹을 양식을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말씀으로
‘노아는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는데 노아만은 신뢰하고 순종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에서입니까?
아직 비, 혹은 홍수의 그림자가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노아는 하나님의 물의 심판을 믿고 순종해서
커다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한
노아와 그 가족들 8명만 그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도록 깊은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노아가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았던 원인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있습니다.
당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방주를 지을 수 있도록
설계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재료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에 들어갈 동물의 수까지도 정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제 노아가 순종함으로 행하여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방주를 수고롭게 짓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동물의 수를 세어서 방주에 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먹을 양식도 준비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내용을 깊이있게 묵상하는 분량은 적지 않습니다만,
이 부분에서는 짧게 하도록 합니다.
구원의 방주는 누가 직접 만들어야만 합니까?
바로 노아 자신과 그의 자녀들입니다.
먹을 양식도 스스로 모아 준비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동물의 수를 세어서 들이는 것도
노아와 그 가족이 행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노아의 일을 도와서 방주를 완성하라고
조력자를 붙여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시 하나님은 노아가 충분히 그 방주를 지을 수 있도록
산에는 나무를 나게 하시고, 역청을 주시고,
동물들은 모두 노아에게로 나올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고,
양식을 충분히 저장될 수 있을 만큼 수확하도록
이미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이 내용을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에
다시 적용해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제물 삼으시고,
구원의 완성을 예배하셨습니다.
마치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시면서
모든 것을 예배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해라”
다시 말해서
“네가 종말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도록
믿음의 방주를 네 스스로 지어라.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 마지막 불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아라.
그 믿음으로 방주를 짓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어서 지어라.
의심하지 말아라.
곧 불의 심판이 온 땅에 임할 것이다.
아직은 심판이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아도
내게 네게 명하는 것이니,
나의 명령을 명령을 믿고 지어라.”
노아가 물의 심판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 준 그 방주는
다른 사람이 대신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노아 대신 방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노아 자신이 지은 것이며,
그래서 노아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아무나 들어가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아담과 하와 이후에
자기의 생각과 경험 보다, 또는 사단이나 뱀의 꼬임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온전히 신뢰하여 순종한 사람은
노아가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노아가 스스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고페르 나무와 연장 그리고 설계도면과 같은
방주를 짓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방주 자체는 노아의 수고입니다.
마치 마지막 시대에 불의 심판에서 구원할 방주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꼭 예수님을 보내시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노아 시대에 고페르나무와 기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준비하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비유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노아가 지어야만 하듯이,
오늘날 믿음의 방주는 나 자신만이 세울 수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자기 경험이나 지식 그리고 자기 생각대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수치로 하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충이 아닙니다.
노아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처럼 믿음의 방주를 만드는 우리에게도
믿음의 분량과 크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믿음의 분량의 치수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믿음의 분량을 재는 것은 자신이나 혹은 목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재시고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다시 요약합니다.
어떻게 요약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있을 불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너는 믿음의 방주를 지어라.”
믿음의 방주를 만들기 위한 모든 준비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비한 사랑으로 예비하시고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 준비의 설계도가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온전한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설계도인 말씀을 읽고 외워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설계도 대로 믿음의 방주를 만들지 않으면
불의 심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1~27절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기로 결단하고
시작하는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앙생활입니다.
꼭 이루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 기록은 지금 믿음의 방주를 짓게 하시기 위한
예시적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샬롬.
오늘 나눌 말씀은 노아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5장에서 라멕이 낳은 노아를 향해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길고 짧은 모든 시간이 수고일 뿐이라고 나누었습니다.
6장의 첫 말씀은 <성경 용어 강해-결혼>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에
이 내용은 생략하기로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결과에 대해서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노아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물의 심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물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물의 심판을 하셨는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유도 목적도 없이
온 인류를 노아의 가정 8명을 제외하고 모두 멸하셨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정당하고 분명한 심판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창세기 6장 앞부분에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하는데,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결혼을 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한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이들과 같이 있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이유라면 좀 부족할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니,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아내를 취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 결과 이들의 자녀들은 더욱 하나님을 알지 않는
사람들로 장성했습니다.
그들의 힘과 기량이 어떠했는지 성경은 ‘네피림’이라고 이름했습니다.
‘네피림’과 ‘용사’의 뜻은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네피림’은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 ‘폭군’, ‘거인’, ‘장부’입니다.
‘용사’의 뜻은 ‘폭군’, ‘전사’, ‘우두머리’, ‘거인’, ‘강한 사람’, ‘힘쎈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심판하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해석할 때,
‘하나님이 아들’을 ‘천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좀 다릅니다.
앞에서 족보 기록에서 보면, 가인의 자손의 족보와
아담과 ‘셋’의 자손의 족보가 서로 병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이며 셋의 후손인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의 후손들은 완전히 세속화되었음을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양편의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생활구역은 공동구역입니다.
이들이 서로 결혼의 조건으로 아름다움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폭군이 되었습니다.
노아 때의 홍수는 죄악이 최고로 가득할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앞으로도 세상의 악이 가득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결의 원칙입니다.
율법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정한 사람이 부정한 것을 만질 경우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정한 사람이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려고 할 때
스스로가 부정한 것을 멀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부정한 것을 만져도 부정해지지 않는 분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부정한 사람은 성 밖에서 살도록 하셨고,
부정한 병 중에 있던 혈루증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만졌을 때
율법적으로는 예수님이 부정케 되어야 하지만,
대신 부정했던 여인의 몸이 완전히 정결하게 된 사건을
마태복음 9장 20절에 기록했습니다.
때로는 믿음의 청년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율법의 시대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혼의 조건이 충족될 때에 가능합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이제 모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잊은 시작한 것은,
죄를 지은 후 인간의 결혼은 모두 자신의 눈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가정이 불완전해지고,
자녀를 양육할 때 하나님을 잊은 채로 양육되었습니다.
이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사람을 지은 일을
‘한탄하시고’, ‘근심’이 되셨습니다.
‘한탄하다’는 ‘한숨 쉬다’, ‘숨쉬다’, ‘뉘우치다’, ‘안심시키다’입니다.
‘근심하다’는 ‘(나쁜 일로) 걱정하다’, ‘불쾌하게 하다’, ‘슬프게 하다’입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십니다.
바로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물로 심판하실 것을 계획하십니다.
그래서 노아를 향해 산 위에 배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노아는 순종하고 그의 자녀들을 구원받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점점 세속에 물들기 때문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방주를 지어야 하고,
방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11:7절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벧전 3:20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성경은 오늘날에도 구원의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여전히 구원의 방주를 짓고
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방주를 지으려고 결단할 때입니다.
문제는 노아에게도 우리에게도 방주를 지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는 ‘은총’, ‘호의’입니다.
‘입었다’는 동사는 ‘나오다’, ‘나타나다’, ‘발견하다’, ‘소유하다’,
‘제시하다’, ‘발생하다’ 등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호의 또는 은총을 나타내셨다’ 또는,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을 발생하게 하셨다’입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산 위에 방주를 세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소유하도록 역사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의 방주를 산 위에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첫 발을 내딛을 때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덮인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방주를 지으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의 방주에 들어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행하실 두려운 심판에서
믿음의 방주에 들어간 이들만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부족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가득히 채우셔서,
우리가 믿음의 방주를 완성하기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 나눌 말씀은 창세기 5장입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아담의 계보를 따라서
그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계보가 기록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기록의 인물들은 역사적 사실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외에 다른 성경인 역대상에서도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도 같은 뜻입니다.
성경의 역사와 그 인물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허구가 아닌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아니면
몇 살까지 살았는지를 살피는 것은
사실 성경의 기록 목적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인간이지만
그들의 생명이 몇 년을 유지합니까?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하게 오랜 시간 생존합니다.
많이 부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이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봐야 하는 성경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그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살았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이후 인간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9장 27절에 이같이 기록합니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생은 죽음으로 매듭짓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이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도 죽음을 지나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외의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에녹과 엘리야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들도 역시 땅에 묻히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지
죽음이 건너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의 단계를 지나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어디든지 문자적으로 해석만 하려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8절에서 라멕이 백팔십이 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5장 29절 말씀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우리는 생각할 때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래 사는 것 자체를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오래 살았던,
성경 속 조상들의 고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라멕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인생은 수고롭게 일한다’입니다.
그럼 우리만큼만 살았던 시편 기자는 어떻게 고백했는지 봐야 합니다.
시편 90:10절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오랜 역사가 흘렀어도, 수 백년을 살았던 조상들과
백 년도 못 되게 살았던 선배들의 고백은 똑같습니다.
수고한 시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이것을 비교하면서
교훈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첫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둘째, 인생은 오래 살아도, 짧게 살아도 오직 수고만 있다.
즉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과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위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구원의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마치려 합니다.
마태복음 11:28절
“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의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멋진 주일의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지난 시간에 나눈 말씀은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믿음이 온전한 아벨을 죽였을지라도
가인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이 땅에서 우리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고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표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표와
계시록에 용이 주는 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이 주는 표를 인정하시지 않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표를 받을 때에 보호가 있지만,
용이 주는 표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나누었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내용은,
저는 지금 바코드나 생체이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이 주는 표를 종종 바코드나 생체이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살펴야만 합니다.
오늘은 가인 자손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으로 가서 거주하며
에녹을 낳고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창세기 5장 18절에
‘야렛은 백 육십세에 에녹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4장은 가인의 후손으로 에녹이고,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자손으로 에녹입니다.
에녹은, ‘드려진 자’, ‘시작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름은 같아도 시작이 다른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계속해서 에녹은 라멕을 낳고 라멕도 자녀를 낳습니다.
문제는 라멕이 두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자신이 어떤 다툼에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소년을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 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무슨 뜻입니까?
라멕의 말에서 무엇인가 지워지고 생략된 것을 느낄 수 있습니까?
가인을 위한 벌의 배수는 하나님께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자손 라멕은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가인을 위한 벌 보다 더 큰 배수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 내용에서 너무나 많은 내용을 생략했습니다.
왜 가인의 후손인 라멕이 하나님께 부탁하지 않았는지....
라멕은 왜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기록하지 않았는지를 생략한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놋 땅에 스스로 거주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후손들도 하나님은 들어서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가인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찾도록
설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라멕이 자신 스스로가 말한 내용입니다.
칠십칠 배.
이제 하나님을 잊어버린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 없는 자리에 자신을 놓고
자기의 신념과 말을 하나님 말씀과 같은 권위의 말씀으로
스스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향해
자신을 해하는 자는 벌이 칠십칠 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인간 그 자체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자손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자손의 계보가 기록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족보입니다.
이렇게 족보와 계보를 기록한 이유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후손 라멕의 고백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는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그 역사적 사실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하나님 아닌 자신이 곧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우상’에서
이와 같은 인상 깊은 대사가 나옵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지 않아,
무엇을 믿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당신이 예수야!!!’
매우 직설적으로 기독의 약점을 꼬집어
비하한 대사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예수의 자리에 지금 당신이 앉아도 돼.
다른 사람들이 너를 믿게 해.
그러면 네가 곧 신이며 절대자가 되는 거야’
죄로 인해 하나님을 잊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은
이렇게 변질이 되어갔고,
사단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록에 기록된 용의 표 666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표 외에는 모두 심판이 될 뿐입니다.
그럼 이제 다시 가인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다음 25절에서 아담은 셋을 낳습니다.
셋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던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들입니다.
26절에는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에노스는 아담의 손자이지만,
믿음의 사람 아벨의 자리에 있는 손자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후손과 믿음 없는 후손을
비교하고 대조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매듭지을 시간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교훈은 어떤 내용입니까?
저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 라멕 스스로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선포한다고 해서
자신이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믿음을 자신이 옳다고 바르다고 온전하다고 여긴다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측량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둘째, 우리는 어찌하든 자녀들이 부모입니다.
믿음의 아벨을 따라 셋의 혈통을 이은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가인처럼 자신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감추고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않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방법도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도록 할 것인지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기를 원합니까?
자신의 믿음을 자신이 판단하지 말고,
믿음의 본을 따라 우리의 자녀들에게 본을 보임으로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함께 나눈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가인의 후손들과 공존하면서도
그들과 구별되는 믿음의 제사를 드린
아벨의 자손이며, 셋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창세기 4장 1~15절입니다.
이 내용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이후의 시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때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분명히 가인과 아벨 이외에 자녀는 더 많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해서
그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이 두 사람의 사건에 집중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제사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살인사건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고,
자신은 여호와 안에서 아들을 얻었다고 말하며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뜻은 ‘얻다, 획득하다’입니다.
둘째 아벨의 뜻은 ‘숨, 증기, 공허’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에 대한 매우 짧은 설명을 합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으로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목축하는 사람으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가인의 제사에 대하여 피의 희생 제사가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제사에서 추수한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가 있기에
이와 같은 해석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해석도 역시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은 다음의 경우뿐입니다.
창세기 4: 6~7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차이점은
선한 마음으로 드렸는지 또는
선하지 않은 마음으로 드렸는지로
판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생각한 결과로 본다면
아벨은 선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 자신도 선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향하여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즉, 죄의 유혹을 받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죄가 문에서 엎드린다’는 뜻은, ‘죄가 손을 뻗어서 잡으려 한다’입니다.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죄의 뻗은 손에 걸리게 된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에,
이제 어찌하든 가인과 우리는
죄를 스스로 통제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보면, 가인은 스스로가 알듯이
정직하고 올바른 마음과 자세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시 히브리서를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4절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의 제사에는 믿음이 없었다고 설명한 것으로써,
창세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차별하신 하나님의 판단을
정확하게 우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믿음이란 설명도 되겠지만,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에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뜻이 됩니다.
동물의 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동물의 피가 아닌 땅의 열매로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신 제사는 오직 믿음으로 드린 것이라는,
전체 성경에 일관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고,
오히려 아벨을 쳐 죽입니다.
우리는 생각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혹은 왜 가인은 아벨을 죽일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을까?
혹은 우발적인 경우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가인이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했다면
과연 아벨을 죽일 용기가 있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받지 않으신
가장 중요한 관건은 믿음의 여부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았다는 것과,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예배참석에 의의를 두거나
봉사행위에 아무리 의미를 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실 수 있는 예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벨의 피의 소리를 말씀하시면서,
이제 이후로는 땅이 가인에게서 열매를 내지 않을 뿐 아니라,
땅에서 유리하는, 즉 떠도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땅에서 안주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진리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때 가인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협받을 일에 관해서 염려하면서
하나님께 간곡한 말로 청원하는 내용의 말입니다.
이 말씀으로 보면,
그때만 해도 온 땅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들의 자녀가 가인과 아벨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사람이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했든 하나님께서 가인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신 후,
가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 표를 주시는 기록입니다.
지금으로써는 그 표가 어디에, 또는 어떤 모양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가인을 봤을 때
단번에 알 수 있는 위치와 표식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제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거주합니다.
여기에서 잠깐 다른 내용으로 갑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표와
짐승이 주는 표가 다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받은 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계시록 13장에 기록된 내용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사람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준 표를 예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수의 조합을 육백육십육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표입니다.
이 말씀의 비교로 우리가 얻어야만 하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를 받는 사람은 보호를 받지만,
짐승으로부터 표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짐승이 주는 표가 바코드냐 아니면 몸 안에 심는 것이냐,
서로의 해석과 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사실 표식이 어떤 모양인지에 대해서,
바코드이든, 큐알코드이든, 전자칩이든, 생채 이식이든
우리에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숫자로 표기된 육백육십육은 상징적일 뿐이고
그 결정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첫 책인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표가,
(비록 사람을 죽인 가인에게지만)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는 짐승의 표가 각각 기록이 되어
서로 비교와 대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지금은 가인이 아벨을 죽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이 말씀을 기록하셨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인의 분노입니까?
아니면 가인의 시기심 때문에 아벨을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까?
또는 죽을지 몰랐는데 실수로 쳐서 죽인 것입니까?
가인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아벨을 죽이려 했고,
자신의 눈앞에서 제거하려 했던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과연 성령 하나님은 어떤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기록하셨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예언의 말씀,
그리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실 목적으로 쓰신 성경 기록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 말씀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첫 살인에 관해 읽어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까?
이 부분이 바로 일반적인 큐티의 마지막 적용의 단계이지만,
저는 교훈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행동, 판단의 근거, 분노의 조건, 심판 등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하시기 위해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려 주는 책이 바로 성경이며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만 하는 큰 교훈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행위는 모두 믿음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마음에 믿음이 예식의 행위로 나타나야만 하지,
내면의 믿음은 없고 행위만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인정하는 마음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조심스러운 행위가
바로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행위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가인과 같은 죄의 후손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표를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심판의 기준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다음의 말씀에서 보겠지만, 하나님의 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향해 자부심을 가지려는 표도 있습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 외에는 어떤 표든지
하나님을 대신할 보호의 표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서 몇 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가장 우선으로는, 문자적인 해석을 하여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잠깐 생각합니다.
성경 본문에서 ‘가인은 농사하는 자고 아벨은 목축하는 자’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다른 예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입니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물은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유대인들도 보통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이혼의 타당성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했고 행했습니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문자적인 해석은 이와 같이 문자의 의미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단어 그 자체의 뜻에 충실히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에 기록된 문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의미적인 해석입니다.
의미를 따라서 해석하는 것은,
성경 본문의 문자가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서
의역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는 내용에서,
왜 받고 받지 않으신 것은 성경 본문에 기록이 없습니다.
그 문자가 내포한 의미를 히브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지 혹은
믿음 없는 행위로만 제사를 드렸는지에 대한 분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앞에서 말한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대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간음한 연고 없이 이혼하는 것은,
본래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모세가
왜 이렇게 해도 된다고 기록한 것이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그렇게 말하였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율법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이 있지만,
형제를 향하여 못된 소리 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고,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는 예수님의 해석은,
문자적인 해석이 아닌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을 알게 해 주는
의미적이고 의역적인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풀이와 해석이 바로
문자를 넘어서 그 문자에 포함된 의미로,
더 정확한 이해를 말씀하고 있는 해석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적이고 의역한 해석입니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영적인 해석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문자적이기도 하지만,
예언서 대부분은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계시를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대체하여 기록할 때,
비슷한 상징성을 빌어서 기록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인간의 지식으로써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일정한 시간 동안 그 뜻을 감추기 원하셨을 때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문자와 의역을 가지고
인간의 세계에서 일어날 부분과 영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영해라고 합니다.
영적인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의미와 의역의 해석이 가능할 때,
영적인 해석을 덧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해석을 어떤 직통계시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신비주의에 치우친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하면서,
인간의 부부가 한 몸 된 친밀성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으로 비유해서 해석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해석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영적인 해석으로 확대해석해야만 하는 경우는,
종말론적인 계시의 말씀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이 세 가지 모두 사용해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서로 교차 되는 경우가 있고,
한 가지 해석이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해석의 선택에 있어서
어떤 본문에서 어떤 해석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경계 또한 불분명하기에 쉽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기록한 말씀이라는
믿음에서 생각할 때,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그 경계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기록하셨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언제나 그리고 항상
하나님은 실존하시고, 나 자신과 동행하시며,
나 자신의 모든 일에 예비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행동하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죄의 중한 짐을 지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표를 받았습니까?
이와 같은 물음의 답을 우리의 입술로만이 아닌,
성령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물음을 자신 안에 두고 믿음으로 예배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회로
하나님의 표를 받았는지 자신 안에서 확인하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가인 후에 그의 후손에게 있었던 일들을
계속해서 나누며 하나님의 교훈을 찾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창세기 강해는 3장 1~24절
죄에 관해 생각할 첫 번째 시간입니다.
이 내용에 제목을 붙인다면 ‘죄는 무엇인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죄를 말할 때,
죄의 종류만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뿌리가 있고 시작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죄는
종류이지 죄의 근본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바르게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먼저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뱀과 하와의 대화입니다.
뱀에 대한 형용사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간교하다’라고 했는데,
다른 성경에서는 ‘교활한', '영악한’입니다.
그 뱀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찾는다면 ‘모든’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급하게 하는 말이,
먹을 수는 있는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
그리고 먹으면 죽을까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성경에서 ‘죽을까 하노라’를 직역하면,
‘죽지 않도록',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만지지 말라’는 말은
하와의 생각에서 덧붙여진 내용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처럼 말입니다.
이 내용은 아담의 경우로 돌아가서 봐야 합니다.
창세기 2장 16, 17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동산의 나무의 열매는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죽는다는 동사를 반복함으로 강조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사역동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뜻도 있습니다.
물론 정식적인 번역은 아니지만, ‘먹는 날에는 너를 죽게 만든다’입니다.
이 말을 하와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와는 당시에 없었고,
이후에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담을 통해서 들은 하와는 뱀에게 대답한 것입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지 않으려면 먹지 말라’로 대답합니다.
하와는 죽음을 본 경험이 없을 것이기에,
죽는다는 의미를 잘 몰랐을 것입니다.
또 자신을 죽게 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것을 알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순종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단은 자기의 대답으로 유혹합니다.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변화가 있는데,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일 뿐이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보니,
정말 보기에도 좋아 보일뿐 아니라
먹으면 정말 지혜롭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단의 꼬임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먹지 말라’는 명령을 ‘모든’이라는 말로 긴장하게 합니다.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로 확신을 줍니다.
그리고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눈이 열려 선악을 알게 된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선과 악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다’는 말을 합니다.
하와의 호기심을 극대로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와의 기울어진 마음을 확인한 뱀은
더는 하와를 붙들고 유혹을 이어가지 않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아담까지 걸려들 것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담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저들의 눈이 떠졌다’라고 기록하면서,
‘스스로 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곧
선악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같아 질 줄 알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벗은 몸만 알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아무튼 급한 나머지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몸을 가리게 됩니다.
정리해서 성경 본문의 기록을 대화로 재구성해서 생각합니다.
뱀은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을 먼저 걸어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의문문입니다.
‘모두 먹지 말라하시더냐?’ 라고 말입니다.
하와는 당황하여 급히 말을 냅니다.
“다 먹어도 괜찮은데,
죽지 않으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래.”
사단은 이어갑니다.
"아니야 결코 죽지 않아.
참 넌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구나.
죽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만들고 좀 걱정이랄까
아니면 두려움 같은 것이 생겼어.
그게 뭐냐면,
너희가 그 과실을 먹으면
선과 악을 아는 눈이 열리기 시작하게 되거든,
그러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단 말이야.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하는데,
너희까지 합세하면 하나님 편에서는 좋을 것이 없잖아.
그래서 그것을 알고 너희에게는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신 거야.
너희만 먹지 못하게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하게 하시려고 말이야.
아직 그것을 몰랐구나.
이제 알았으면 잘 생각해 보고
먹든지 말든지 하와가 결정해...."
사단은 잠시 유혹의 자리를 비켜 줍니다.
이제 하와가 뱀과 헤어진 후
곧 동산 중앙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나무를 유심히 보니....
아무래도 아담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 보다
뱀이 전해준 말에 더 믿음직스러운 신뢰가 생겼습니다.
자신도 먹고 또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아담은 단지 하와를 믿었을 뿐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문자적인 사실의 내용의 분량보다는,
상징 그리고 비유적으로 더 많은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 ‘벌거벗음’, ‘죽다’ 등은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고,
사단의 말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눈이 열어지기 시작해야지,
왜 자신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게 됩니까?
그렇다면 ‘벗은 몸’과 ‘선악’은 같은 의미가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에 같은 의미라면 비유가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결코 그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자신들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겼는데,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어떤 것이 선과 악인지,
벌거벗었다는 것이 왜 부끄러움이며 두려움이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없으면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마음만 갖게 된 것입니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되돌릴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일단 가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누구 앞에서 가립니까?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두 번째 내용입니다.
창세기 3장 8~13절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한동안 아담과 하와는 대답 없이 숨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계속된 하나님의 부름에 아담과 하와는 대답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담과 하와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누구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
"네, 하나님이 내게 만들어 주신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습니다."
“하와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아담에게 그 나무의 과실을 줌으로 먹게 하였느냐?”
"하나님께서 만드신 뱀이 저를 유혹하므로 먹었습니다.
사실 전 먹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뱀이 먹어도 된다고 해서 먹었을 뿐입니다.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아담과 하와가 먹었을 때에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누가 너희 벗었음을 고했느냐? 먹지 말라고 한 과실을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물론 이미 아셨지만, 현장을 보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결과로,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은 유혹의 말이었고,
오히려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결과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마음 가득히 채웠다'입니다.
아직 죄는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죄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벌거벗었다’는 의미와 비유는 조금 이후에 나누기로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창세기 3장 17절
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 보다 하와의 제안을 더 신뢰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있었음에도
뱀의 유혹의 제안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난 모든 것이 죄입니다.
창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한 가지 조항을 빼놓고는
모두 긍정적인 명령문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 하신
부정명령문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긍정명령문 모두는 부정명령문 한 조항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면 그 모든 것은 값없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을 경우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모든 긍정명령문을
빼앗아 가고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지만
긍정명령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보다 하와의 말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의 명령보다 뱀의 유혹의 말을 더 신뢰했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 계명, 규례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에서 첫 번째 계명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나 외에는’의 뜻은 ‘위에, 넘어, 바로 위에, 둘 사이에....’입니다.
‘하나님 위에, 하나님을 넘어, 하나님 바로 위에, 너와 하나님 사이에’란 뜻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 위에 또는 하나님이 명령을 넘어 하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 사이에 뱀의 유혹의 말을 두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거 사람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명령하셨을 때에,
가장 우선으로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명령 외에 다른 것을 더 신뢰하지 말라고
십계명의 조항 첫 번째 조항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에 무엇을 두든지, 그것은 죄입니다.
생각만 있었던 것과 그것을 실천함으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요한복음 12장 42절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제 ‘벌거벗었다’는 의미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둘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움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의 내용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지만,
오히려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신 하나님 스스로가 가려주시고
덮어 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뜻을 이렇게 풀어 봅니다.
부끄러움은, 곧 불완전함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보기에 좋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만족한 것이었지,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혹은 온전하게 만드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온전한 분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장 큰 경계선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경계선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 됩니다.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무엇을 두었습니다.
바로 우상입니다.
그 우상 중에는 형상도 있지만, 자기 자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는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일부러 잊으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죄와 우상에 관해서는 성경 용어 이해 팟캐스트와 홈페이지에
다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에
더는 그 풍요함과 채워짐에서 누림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자신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았을 때,
그 때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그것을 가리려는 부끄러움에 휩싸여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세우고,
실제로는 자신이 자신 안에 우상의 자리에 앉았지만
아닌척하기 위해 형상을 세우는 죄에 죄를 더하여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부끄러움의 연속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세상이 이렇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악의 연속인지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지금 인류의 문제를 인간의 선한 생각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간 자체가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절대자, 신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간의 교만이
지금 온 세계를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진행을 멈추게 하셔야만 합니다.
곧 있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죄를 지은 인간의 삶의 영향을 연이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짐작되시겠지만, 미움, 살인, 도적질, 악한 말, 불순종 등등은
죄의 열매일 뿐입니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 위에, 하나님보다 더 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다른 무엇을 두거나 높이는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인간의 마음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인간에게는 ‘흑암’이고 ‘어둠’입니다.
곧 ‘죽음’이며, ‘자신을 죽게 만든 사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은 결과는,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 위에 있으려는 욕망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열매’는 곧 ‘벌거 벗은 몸’을 의미하고,
이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는
영원히 불완전하다’는 ‘진리’입니다.
다음 시간에 나눔은 이어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