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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의 소금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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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강 “사랑과 평화를 나누는 명절”(마5:21~26)
추석명절은 모처럼 일가친척이 다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나누는 참 좋은 날입니다. 이런 좋은 명절에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다툼이 더 심하다면 없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은 즐겁고 감사한 추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제사를 드리기 전에 - 23~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형제화목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2. 형식적 신앙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않는다.”(사1:1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는 내 앞에 보이러 오지만 말라. 그러한 행위는 내 마당만 밟는 일이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하게 여기는 것이고,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사1: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상한 심령을 받으시고, 저들이 서로 화해하며 용서하는 삶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놔두고 먼저 형제에게 가서 화목을 청하고 문제를 해결한 뒤에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3. 평화를 원하시는 하나님_ 5절에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하셨습니다. 사화(私和)라는 말은 법으로 처리할 문제를 서로 합의를 봐서 좋게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합의를 봐서 서로의 원한을 풀고 서로 화평하게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화는 빨리 해결할수록 좋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문제가 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타주 말라”(엡4:26)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회개를 빨리 할수록 좋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빨리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처럼 나를 고발하는 자가 나를 고소해서 법정에 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명절 추석을 앞두고 우리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길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마디를 많이 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 마디만 잘하면 이번 추석은 틀림없이 즐겁고 화목한 추석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의 강 “부끄러움을 아십니까?"(시25:1-10)
1. 부끄러움이 생기는 원인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인간의 교만 때문입니다. '나도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하는 사탄의 유혹은 자기의 교만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어기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두려워 마십시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실수가 많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지혜가 부 족합니다. 의지가 강한 것 같지만 의지가 심히 약할 때가 있습니다. 나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부끄러움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1:11) 부끄러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다 받으시고 치유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끄러움의 치유 - 부끄러움의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1)주님앞에 털어놓아야 합니다. 즉,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실수 우리의 약점을 다 아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한번 골절되었던 뼈는 다시는 부러 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끄러운 상처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때에 더욱 더 온전히 싸매어 주시고 다시는 그러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2)믿음으로 이해하는 거룩한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즉,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친교 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서로 교제할 때에 우리는 온전하게 서로 배우고 치유하면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교제 할 때에 우리의 상처가 깨끗이 사라지는 것 입니다. 서로 문제를 놓고 걱정해주고 기도하는 가운데 모든 상처가 치유되게 되는 것입니다. 3)열심으로 헌신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은 치유할 뿐만이 아니라 상급이 따르게 됩니다. 주저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선을 위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열심히 헌신할 때에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온전한 치유를 받게 됩니다.
3. 부끄러움이 회복되면 - 성경에 보면 우리가 볼 때 부끄러움 투성이요, 수치스런 인간이었지만 그러한 사람을 변화 시켜 영광스런 존재로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삼으신 기록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연필 위에는 지우개가 붙어 있습니다. 쓰다가 잘못될 때 지우개로 지우게 되면 올바르게 다시 쓸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부끄러움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부끄러움을 변화시켜서 영광된 존재가 되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대신 부끄러움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그를 믿는 자는 영광스런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이고 구속의 은총인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두려워 마시길 바랍니다. 문제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허물을 다 아시고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치유하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로 변화시키는 은총의 주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훤한 달,
마음이 끌린다.
다가설수록 선명한 끈
온몸을 에워싸는
생활의 기망
둥근달 볼 때마다
환하게 펼쳐지는 그물
기망의 경련이
달빛에 숨어 있다.
오늘 밤
내 속으로 들어온
저 달이 무척 위험하다.
인어왕자/김윤환
방학 내내 학비를 벌려 나간
아들의 등짝에 난
지느러미를 보았네
학과 생의 업이
어깨에 문신을 그릴 무렵
반인반어(伴人半漁)의 시간을 보낸
아비의 흉터가
아들의 아가미에 걸린 것을 보았네
고래의 내장에 갇힌 요나처럼
사람인 듯 물고기인 듯
지옥인 듯 천국인 듯
그렇게 유영하는 푸른 물고기를
거울을 보듯 오늘도 보고 있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그물에 갇힌 내 이름을
아들의 지느러미에서
차마 지울 수 없었네
수초도 없는 망망대해
내 아가미에 걸린
오래된 기도문을
아들에게서도 보았네
인어가 되어
또, 인어가 되어
빗소리 기도 / 김윤환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속에 고인 빗물 일렁거리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불러보니
빗물은 파도가 되어
가슴을 치네
부서지도록 치네
방언보다 눈물이 먼저
터지길 원하네
마음의 둑 무너지듯
그대 눈물샘 터지길 원하네
빗소리처럼
차르륵 차르륵
그대 마음 적시길 원하네
어둔 마음 씻겨가길 원하네
■은혜의 강 “거룩한 은총, 양선의 열매“(갈:5:22-26)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ajgaqwsuvnh”(아가도쉬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Goodness”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이 말은 “선함”, “착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선함 또는 착함은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선함 또는 착함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엡 5:8-9를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착함은 빛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가 된 뒤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착함, 선함이란 성령께서 나를 사로잡으셔서 이끄심으로 나타나는 착함 바로 그것이 양선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더욱 귀한 주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과정으로 사용되는 것 바로 그것이 양선입니다.
1.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사람 - 마26:41에 보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가 연약한 존재여서 늘 넘어지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런 연약함을 극복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면 이 연약함을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이 후 늘 기도해서 성령 충만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 연약함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끝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의 영광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을 실천하려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2. 선으로 악을 이기는 능력- 롬12:19-21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선을 행하려 할 때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악이 나타나 우리를 방해합니다. 그 때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선으로 그 악을 대항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내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물론 이러려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양선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선을 즉시 행하는 사람 - 눅10장을 보면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양선을 실천하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은 아는 데서 그치면 안됩니다. 선행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데서 멈추면 안됩니다. 알았을 때 즉시, 마음먹었을 때 즉시 행해야 합니다. 약 4:17을 보면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잘 압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라도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성령의 나무들입니다. 우리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선이라는 열매, 착함과 선함의 열매를 맺혀야 하겠습니다.
[출처] 2020. 09. 13 - “거룩한 은총, 양선의 열매“ (사랑의은강교회) | 작성자 공의와긍휼
주일서정
김윤환
저기 휘청이며 오는 교인들의
날숨소리를 주워 담는 예배당 계단
날마다 외롭거나 상처입거나
불안한 사람들의 익숙한 들숨을
주일마다 들어주는 벽에 걸린 예수상
그 위 어디쯤에 반쯤 깨진 창문사이로 들어오던 스산한 바람소리
장의자마다 낙엽이 쌓이고
성경위에는 말라붙은 나비들이
먼저처럼 폴락거리고
마침내 의식 없는 입례송이 흐를 무렵
구두대신 슬리퍼를 신은 나는
덜 깬 태양처럼 어스름 웃고는 강대상에 올라가지
오늘따라 예배당이 참 어둡다고 생각할 무렵
맨 뒤켠 어디쯤 남루한 청년 하나
물끄러미 손수건을 만지고 있네
먼 길을 돌아 온 나는
순간 예배당의 불을 끄고 싶었네
■은혜의 강 “밭도 되고 씨앗도 되는 믿음” (마13:1-23)
1. 씨 뿌리는 비유의 배경과 의미 - 씨 뿌리는 비유말씀에는 크게 두 가지가 대비됩니다. 한쪽은 잘 자라지 못하는 씨앗 군 세 가지이고 다른 쪽은 잘 자라 결실하는 씨앗 군 세 가지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잘 자라지 못하는 씨앗들이 분명히 있지만, 농부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하는 쪽을 생각하며 오늘도 씨를 뿌린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농부가 손해와 상관없이 씨를 뿌리듯 주님도 복음 선포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실 품은 하나님 나라는 마침내 온갖 수모와 실패의 기억을 상쇄하고도 남을 기쁨의 결실을 보게 됨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2. 천국 밭에 뿌려지는 ‘사랑’이라는 씨앗- 우리 신앙생활도 마치 농사일처럼 생명의 근본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농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심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하나님 나라는 당연히 사랑을 열매 맺는 나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라는 농사는 사랑의 씨를 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의 모든 인연들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농사꾼이 모든 땅에 고루고루 정성껏 씨를 뿌리듯, 삶의 자리에서 인연을 맺는 모든 이들에게 고루고루 정성껏 사랑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때론 완악해서 사랑을 원수로 되갚는 일도 있고, 때론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금세 잊기도 하고, 때론 세상논리를 앞세워 타박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사랑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작은 씨앗이 큰 수확의 기쁨을 안기듯, 마침내 사랑의 열매도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맺어진다는 진리를 품어 안고 기꺼이 내어주는 일입니다. 주님 말씀에 용기를 내야 하겠습니다. 농부가 먼 미래를 보고 씨를 뿌리듯 묵묵히 사랑을 심어나가노라면 농부의 기쁨을 우리도 신앙 안에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씨가 백배 천배의 결실을 맺듯 사랑은 기필코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되어있습니다.
3. 천국의 밭에 뿌려진 공의와 평화의 씨앗 - 생명의 하나님 나라가 공평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구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농사는 공의와 평화를 심고 가꾸는 일입니다. 우리도 지금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사역, 정의의 사역, 평화의 사역을 확신을 가지고 인내를 가지고 펼쳐나가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의 길을 따라 예수사역을 이어가는 신자라면, 지금 여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일을 예수님처럼 확신을 가지고 지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농부가 거친 들판에 씨를 뿌리듯, 정성껏 사랑을 나누고 정의와 평화를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더러는 씨가 뿌리내리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씨는 반드시 결실하여 그 모든 실패를 도말하고도 남을 만큼 풍요롭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결코 낙담하지 않으며 끝까지 정성껏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4. 말씀을 잘 받는 천국의 밭이 되어 - 씨 뿌리는 비유의 후반부는 그 초점이 씨를 뿌리는 자에서 ‘말씀을 받는 자’로 바뀝니다. 즉, 씨를 받는 밭을 중심으로 묵상합니다. 말씀이라는 씨를 잘 받지 않고서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없이 전해져 왔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듣는 귀가 열렸는가, 그래서 마음으로 듣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이 많다고 다 듣지 않습니다. 결국 마음으로 받아 새길 때 비로소 손과 발로 실천되는 온전한 깨달음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려면 땅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르며 날마다 제 밭을 들여다보는 농부가 되어 먼저 우리네 마음밭을 잘 가꿀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결실은 자연스럽게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앞의 일에 급급해서 대의를 놓치지 않는 인생 되길 바랍니다. 약간의 시련이 있다고 사랑을 포기하거나 불의에 굴종하는 인생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기본과 바탕을 잘 가꾸는 인생 되길 바랍니다. 마침내 하늘나라에서 우리 신앙의 선진들과 더불어 사랑의 결실을 경축하고 공의의 열매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 찬미하는 아름다운 인생이길 소망합니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 우리의 구원자이자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잘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은혜의 강 “감사의 삶, 기적의 삶”(신8:2-10, 눅7:39~50)
1. 감사의 기억 - 우리가 감사를 할 때 아무런 생각 없이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곰곰이 생각해서 감사할 제목을 발견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thank’의 기원이 동사 ‘think’입니다.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에서 ‘기억하라’는 동사는 신명기에서만 무려 17구절에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셨는지, 또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2. 두 빚진 자의 비유와 감사의 빚 - 오늘 신약 본문은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집에 초청한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대금업자)에게 두 빚진 자가 있었는데, 한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일당)을 빚졌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두 사람이 각각 채주에게 가서 사정을 했는데 그 채주가 워낙 사람이 좋아서 두 사람 모두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이 질문에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라고 답변하게 됐고, 주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고 하시고는 시몬의 주의를 그 여인에게 돌리게 하여 주님께서 하신 비유가 곧 두사람(시몬과 여인)을 겨냥한 것임을 밝히시고, 구원주요 메시야를 영접하고 접대하는 여인의 행위가 많은 죄를 탕감받은 자로서 행한 최고의 헌신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당대의 가장 지혜있는 자로 존경받던 시몬은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규정했으므로 죄인이라는 고백도, 죄를 대속하는 구속주의 필요성도, 하나님의 용서도 모르는 까닭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밝혀 눈을 뜨고도 메시야요 구주를 보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48절)"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친히 계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얻은 500데나리온 보다 훨씬 많은 빚을 진 자 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갚아야 할 은혜가 남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3. 감사가 주는 기적 - 한 어린 아이가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막6:41). 요즘은 보리떡을 건강식으로 먹지만 당시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생선 두 마리도 아마 말라비틀어진 작은 물고기였을 것입니다. 그저 어린이 한 명이 하루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놓고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5천명을 먹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떡과 물고기를 앞에 두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초라한 음식이지만 주님은 진심어린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기적을 나타난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출발은 계산 없는, 진실한 그 감사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감사기도의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는 소출이 없고, 게다가 외양간에 가축마저 없다면 완전히 실패한 상황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열정적인 감사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께 연결돼 있다면 결코 절망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발견하는 은혜에 대한 감사, 거듭되는 좌절 속에서도 내게 주어진 작은 의미들에 대한 감사, 생(生)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감사, 이런 감사가 있다면 우리들 각자의 삶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실 그런 감사 자체가 곧 기적입니다. 이번 맥추감사절은 여러분에게 이런 기적이 넘치는 풍성한 절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 “성령과 하나님나라” (요3:1-8)
1. 하나님나라와 구원 -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와 개념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개념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고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 포함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야만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으면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쉽게 말해서 항상 기쁘고 범사가 감사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과 식과 법이 통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보다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해야만 들어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해야만 들어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성공한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다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만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이루어집니다.
2. 성령으로 거듭나야 들어가는 세계 - 하나님의 나라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영생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잃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엉뚱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이고 위험해 보이지만 언제나 승리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수로 인생과 세상의 바둑을 두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질 수 없고, 실패할 수 없고, 패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기다라고 사모하다가 드디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 자리에서 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냥 그 자리와 모임이 즉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시기 바랍니다. 그것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13)
3. 성령으로 사는 삶이 구원의 삶 - 성령으로 거듭 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가난한 사람도 부자인 사람도,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다 하나님 나라에 큰 일군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다고 하면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똑똑하여도 유능하여도 결국은 실패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유엔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야만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일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시시하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달란트로 잘 활용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처럼 번져 나가는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 “성령과 세례” (마3:1~17)
1. 예수님의 세례 - 당시 유대교는 이미 선민으로 가득 찬 주류층의 종교였고 정결의식 행위 또한 그저 중산층 이상의 신분의 신자들에게 행해지던 특별한 종교행위였습니다. 요한은 유목민이나 이방인, 노예 등 비주류층 민중들도 죄씻음을 받고 일시에 세례를 받음으로 새로운 삶을 열어갈 수 있도록 단 한번이고 직접 체험 형식의 정결예식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로 볼 때 엄청난 혁명이었습니다. 물론 유대교 주류층이 볼 때는 일종의 반역이거나 이단의 행위로 볼 수 있었죠. 이러한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예식을 공인하고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걸어 친히 세례를 받음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즉 진리이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이 되어 세례를 받는 첫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지금껏 시골 가난한 청년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실행하는 공생애를 개시함으로서 마침내 전혀 다른 신생을 보여준 새로운 피조의 삶을 친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요한은 고백하기를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오시는 이 예수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 요한과 하나님의 독생자 메시아 예수의 세례에 대한 극명한 차이와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령 세례란? -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 혹은 관습으로 거듭난 삶,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즉, 진리가 실체적 삶이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세례 이후의 공생애, 즉 사람으로서 보여주신 세상을 사랑하되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의 양태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후 삶은 회당에 갇힌 특정 제사장이나 계급 중심과 충성과 율법 중심의 행위로 결코 새로워 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격려하시는 삶의 방식인 사랑이 필요한 곳에 사랑을,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양보가 필요한 것에 마땅한 양보를, 치유가 필요한 곳에 치료를, 억울한 자에게 위로를, 결박당한 자에게 해방을 누리고 나누고 전하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 나오는 바울의 3가지 고백을 통해 성령세례와 회개의 열매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성령세례 이전의 생활양식을 설명하면서 자신은 회심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전통에 열심을 내던 자였는데 잘못된 열심히 애꿎은 예수믿는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다고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며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지식에 갇힌 자신을 돌이켜 고백하는 단계입니다. 둘째는 바울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 예수를 만난 간증을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주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16절). 라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회심 이전의 잘못된 삶의 태도를 바꾸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는 삶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 것을 증언했다는 사실입니다.
3. 성령 세례 받은 자의 모습 - 성령의 세례가 주는 첫 열매인 회개는 우리 삶의 방식을 변화된 것으로 증명됩니다. 그동안 세상의 가시적 외형적 성취나 타인 보다 자신을 우선하는 삶에서 돌이켜 모든 결정을 성령님께 물어보고 기도가운데 결정하며 삶의 지혜는 말씀에서 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예배에서 회복하는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피동적 종교행위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넉넉한 사랑, 기다릴 줄 아는 여유, 공정한 나눔을, 막힘없는 평화를 누리고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 세례 받은 자의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이 예수님께 선포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는 칭찬을 들으실 것입니다.
■은혜의 강 “내 인생에 성령의 역사” (롬8:28~30)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전 생애를 주장하셔서 아름답고 복되고 형통한 삶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계획하여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성령의 역사로 살아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부르심의 단계(롬8:30)-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시는 섭리를 소명(召命,calling)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①어두운데서 부르셨습니다(벧전2:9) 어두움이란 ‘죄와 사망, 저주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부르셨습니다. ②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데서 부르셨습니다(마11:28) 이 세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의 쉴 곳은 예수의 품안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올 때에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마귀의 결박이 풀어지며, 지옥의 형벌이 면제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사43:1)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주님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④영광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벧후1:3) 우리를 부르신 이가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영광의 길을 걷게 될 줄로 믿습니다. ⑤한 소망 안에서 부르셨습니다(엡4:4)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고(벧후1:10),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갈5:13).
2. 중생의 단계(요3:5)-부르신 다음에는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면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사명의 단계(계2:10)-성령의 역사는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사명의 계단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사명이란 ‘임명을 받았다, 지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파견자,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거나 중단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죽도록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우리는 온 천하를 무대 삼고 숨지는 순간까지 예수를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라고 고백했습니다.
■은혜의 강 “고백과 체험으로 만나는 하나님”(롬5:1-11)
1. 삼위일체 신앙은 기독교의 기본교리- 삼위일체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을 가지신다는 기독교의 기본교리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신앙고백의 출발점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후에 부어주신 ‘성령님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적 틀은 이러한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이들 때문에 체계를 잡아 나온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28:18-20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모든 민족이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과, 당신의 가르침을 다른 이들도 깨달아 지키게 하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2. 삼위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 나시는가 -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특히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지상에 머무셨던 예수야말로 육화하신 하나님이셨다고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돌아가시며 당신의 숨결을, 당신의 영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셨는데(요20:22), 그 영은 바로 예수님이었고 동시에 하늘 아버지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 곧 이스라엘을 압제에서 해방시키신 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출애굽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체험한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 체험한 하나님, 성령을 통하여 체험하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역사상 분명 세 분을 만났지만 그 세 분은 셋이 아니라 하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요일 4:16), 세 분에게서는 사랑의 충만이 동일하게 드러났고 그 사랑의 고리에서는 셋을 분리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만났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성령님을 영혼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 사랑 안에 있게 되더라는 고백이 됩니다. 성부 하나님 체험과 성자 하나님 체험, 성령 하나님 체험은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깨달음이 삼위가 하나님으로서 하나라는 고백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3. 사랑의 관계로서 삼위일체 신앙 -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로 출발하여 이웃과 나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체험으로 다져지는 것이고,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앙의 본질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당신께서 사랑의 고리로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와도 ‘나와 너’로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기 바라시고, 우리들끼리도 ‘그’가 아니라 ‘너’로 여겨 사랑으로 하나 되기 바라십니다. 하나님을 타자화 시키지 않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오직 사랑으로 주님을 만나고 사랑으로 내 이웃을 만나고 사랑으로 역사를 끌어안아, 진정한 삼위일체를 사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삼위일체 주일을 지키는 이유일 것이고 삼위일체로 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바이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와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 하셨습니다(마 28:20). 세상 끝까지 삼위의 사랑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삼위의 주님이 사랑의 고리로 하나이시듯 우리와 함께 사랑하며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그 구원이 실현되는 증표입니다. 그 사랑을 믿고 우리도 사랑을 사는 주님 사랑의 파트너들이 됩시다.
■은혜의 강 “내 영혼에 가득한 생수”(요7:37-39)
1.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 성령으로 충만해야 믿음생활에 힘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저앉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변할 때에 변하더라도 잘 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받은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두 종류입니다. 기쁨으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있고, 마지못해서 의무감 때문에 감격 없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각자의 하나님이 다릅니까? 아니면 성령을 받지 못하여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 한 하나님을 섬기고, 다 성령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차이가 납니까? 성령의 충만함으로 신앙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느냐? 아니면 그 배에 생수가 메말라 있느냐의 차이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다!”라고 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같은 상황에서도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그 영혼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2. 영혼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려면 - 1) 내가 갈증을 느끼고 사모하여야 합니다. 3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여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고백이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2)예수님께로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만 하고 사모하고만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 주님께로 달려 와야 합니다.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생수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내게로 오라!” 주님의 부르시는 이 음성을 외면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눅24:49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성에 유하라”라는 말씀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성과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몇 날이 못 되어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서 기다렸습니까? 그들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약속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붙잡고 전혀 기도에 힘쓰는 이들에게 과연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입고 천국의 사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라고 하십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 “감리교회의 신앙유산”(잠11:23-31)
1. 성장배경과 회심사건 - 존 웨슬리는 훌륭한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지도와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웨슬리는 장학생으로 옥스퍼드에 입학, 희랍어 성서 연구, 신학서적 탐독, 세익스피어 등 많은 문학서적을 읽고 졸업한 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735년 미국 조지아 주 ‘Savannah’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그리스도와 관계(믿음의 확신)와 한 여인과 사랑에 관한 문제로 갈등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결국 웨슬리의 미국 선교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2. 성령의역사 회심과 중생 - 웨슬리는 심신이 피곤하고 무엇보다 미래가 불확실함으로 깊은 좌절에 빠졌습니다. 무엇보다 “믿음과 구원의 문제로 절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738년 5월 24일 오후 8시 45분, 런던 시내의 어느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도중 웨슬리는 구원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일기에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올더스케잇’ 거리로 가서 한 신도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에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변화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을 때 이상하게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받기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이 생겼는데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있었다.”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를 찾아가 “나는 믿는다!”라고 외쳤습니다.
3. 성령의역사 전도 - 그는 이제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서 무서운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옥스퍼드 대학생들에게 설교했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했습니다. 감옥에서도 죄수들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수많은 죄수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했습니다. 웨슬리의 설교는 날카로운 칼처럼 사람의 심령에 역사했습니다. 이러자 웨슬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은 ‘구원이 믿음으로만 된다면 교회의 제도와 성만찬은 쓸데없는 거냐?’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웨슬리가 설교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웨슬리는 이들의 타락을 지적하며 거리복음전도로 나갔으며, 더 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웨슬리가 설교하는 곳마다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처음 설교 때는 200명이 모였으나 5번째 설교할 때 1만 명 이상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이 구원을 체험하는 놀라운 사건이 계속되었습니다.
4. 존 웨슬리의 신앙유산 - 웨슬리의 체험된 신앙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했고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게 했습니다. 웨슬리가 보여 주었던 복음운동과 규칙적인 생활, 영성이 오늘 우리시대에 동일하게 요구됩니다. 제도와 조직이 강조되면 복음이 살아나지 못하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체험된 신앙이 웨슬리처럼 복음을 증거하며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용사가 되게 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는 복음전도자 웨슬리의 후예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의강 "눈물로 기도를 드릴 때"(욥기16:16~22)
1. 성경 속 눈물의 기도 -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역하고 거기서 멀리 떠나 있었던 죄로 인해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행2:37) 예레미야 선지자도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라고 기도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사16:9)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의 기자 다윗은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라고 눈물의 기도를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23:26에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눈물의 기도가 주는 씻음의 의미를 더 알게 해주셨고, 산상수훈에서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 눈물의 밑바탕에는 -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기저에 깔려 있는 그 실재는 름 아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부패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이 근본적인 죄성으로부터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모든 뒤틀리고 왜곡된 행동들이 나옵니다. 이 죄로부터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피 흘리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대의 모든 악과 모든 적개심을 그 몸에 짊어지시고 그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죄로 인해 파괴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3. 통회와 눈물의 기도를 경험하려면 - ▷첫째, 하나님께 회개의 심령을 구해야 한다. 마음의 회개는 우리의 힘만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담대함과 끈기를 가지고 통회하는 마음을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제게 눈물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둘째, 죄를 자백함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음, 그리고 마음의 강퍅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변명하지 말고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불신과 교만과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지극히 개인적인 범죄와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많은 죄악들을 다 자백해야 합니다. ▷셋째, 값없이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자신의 가혹하고 냉담한 마음을 묶어 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와 따뜻한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믿음으로 삶의 자리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넷째, 순종해야 합니다. 용서라는 말 속에는 순종이라는 요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우리가 불친절하게 말한 것이 떠오른다면, 즉시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과거의 불의한 행위가 생각나면, 즉시 가서 상응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열심을 가지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통해 순종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서를 깊이 묵상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완강한 마음'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겉으로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속으로 눈물을 흘려라.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육신의 눈에는 눈물이 없을지라도, 마음과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눈물 없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 누구 들으라고 하는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그만해야 합니다.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만이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눈물로 회개하고 간구하는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 세계, 이 나라, 이 교회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과 생애에 평안의 은총이 보여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강 “가정은 지상에 임한 천국”(행10:1-8)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인간의 최고의 본분은 위로 하나님 공경과 아래로 이웃 사랑인데 그 중에 첫번째가 부모 공경입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삽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았고 그의 사랑의 품에서 자녀는 양육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마땅히 자기 부모 공경을 최고의 생활 윤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건강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가정은 당연히 건강한 가정이 됩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받은 선물입니다. 축복된 가정은 하나님을 모신 가정으로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에는 악한 영이 침범할 수 없습니다. 악한 영은 온갖 유혹의 술책으로 가정을 파괴하려고 시도하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가정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므로 지켜 주십니다. 모든 식구들의 마음속에 악령과 세상을 이기신 예수의 영이 살아계시면 악의 세력을 이기고 가정은 보호받게 됩니다.
2. 자신과 가족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정 - 우리 생명은 부모님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새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에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첨부할 수 있다면 영혼의 양식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교통의 형식은 바로 하나님께로 오는 말씀과 우리가 드리는 말씀인 기도인 것입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있으므로 영적으로 경건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경건한 가정은 건강한 가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교회에서 또는 가정에서 하나님과 만나 대화하는 기도생활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생명인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대화이며 대화를 통하여 사랑이 교류됩니다. 그리고 가정의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며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온 가족과 더불어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해서 자기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3. 더불어 이웃에 봉사하는 가정 - 가정에는 자녀가 성장하면서 각각 집을 나가게 되고 자기 생활로 독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가정에서 남을 돕고 사랑을 실천함을 본 자녀는 그것을 보람과 자랑으로 삼게 될 것이고, 자기 독립생활을 하면서도 남을 위한 봉사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일생 이웃 봉사를 모르고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온 가족과 더불어 이웃에 봉사하는 기쁨을 나누도록 은연중에 훈련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항상 구제에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직책이 백부장이라면 현재 한국군의 대위의 입장입니다. 고넬료 가정의 구제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 기억된 바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정들은 고넬료의 가정처럼 경건과 기도와 봉사의 사명을 다 하겠습니다. 건강한 가정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말씀과 기도에 항상 힘쓰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가정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조금씩 변화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았으면 성도의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간에, 형제와 형제간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이 되어야 여러분의 가정을 보고 이웃이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저 가정을 보니까 우리가정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겠다는 간증이 들려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강 “어느 행렬에 서있습니까?”(눅07:11-17)
1. 찬양(감사)행렬과 통곡행렬(12절) - 성경 속 죽은 자 청년은 과부의 외동아들입니다. 과부에게 아들의 죽음보다 더 애통할만한 일이 있을까요? 땅을 치며 통곡하고 떠나가는 상여를 붙잡고 매달린들 죽은 아들이 돌아 올 리 없고, 어머니의 절규에도 상여는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녀의 눈물을 그치게 못합니다. 아무리 달래도 위로 할 길이 없습니다. 그녀는 한없이 통곡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들은 언제나 찬양이 있습니다. 찬양이란 날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따라 감사하는 고백의 삶입니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심지어 사람들이 죽어도 찬양합니다. 왜입니까? 죽음 뒤에 날빛보다 더 밝은 이 땅의 천국, 내세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구원의 삶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하는 찬양의 행렬입니다. 여러분 어떤 행렬에 가고 있습니까? 통곡의 행렬입니까? 아니면 찬양의 행렬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찬양하며 사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2. 생명행렬과 사망행렬(14절) - 예수께서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누구도 인생의 죽음을 향해가는 행렬을 멈추게 할 자가 없습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영원한 죽음을 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종국에는 죽음과 함께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가 있는 사람들의 행렬은 사는 길입니다.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는 예수님의 말씀에 죽은 청년이 즉시 일어나고, 말도 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남을 증거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있는 사람들의 가는 길입니다. 예수가 있는 사람들은 결코 두려움 절망 죽음의 무덤이 종착지가 아닙니다. 예수 안에 지금의 하늘나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있는 우리들은 천국백성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 안에는 죽음은 없고 오직 생명만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 없이 가는 죽음의 행렬과 예수와 함께 가는 생명의 행렬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행렬 속에 있습니까? 아직 예수를 진심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예수를 만나고 생명 길로 가길 바랍니다.
3. 빛의 행렬과 죄악의 행렬(16절) - 예수가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대체로 돈이거나 권력, 부귀영화이나 입신영달 출세입니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순간의 욕정에 못 이겨 수 십 년 쌓아온 명망도 사리지고, 돈에 눈이 멀어 범죄에 휘말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그 죄악의 행렬에 서 있을까요?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유한한 것들의 행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있는 행렬의 사람들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있으시다”(눅7:16)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나인성 동네에 의욕이 없던 무리들이 갑자기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울며 통곡하던 이들이 웃고 기뻐 뛰게 됩니다. 애곡 소리가 찬양으로 바뀝니다. 절망은 사라지고 소망이 넘칩니다. 그리고 원망대신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사망과 저주는 물러가고 생명기운이 약동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 사방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행렬과 예수가 없는 인생들의 차이점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어떤 행렬 속에 있습니까?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롭게 살고 있습니까? 아직도 참 자유의 길, 영생의 길을 모르고 사망 사슬에 걸려 있습니까? 예수 행렬에 서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사망에서 건지시고 이제 주님과 함께 라면 참 자유, 참 평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소유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복된 인생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은혜의강 “갈릴리로 다시 오신 이유”(마28:1-10)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다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1. 예수님과 제자의 첫 만남의 추억이 깃든 곳 - 갈릴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난 첫 사랑의 추억이 담긴 자리입니다. 누구에게나 늘 그립고 기억에 남는 곳이 있습니다. 어릴 때 자라던 고향일 수도 있습니다. 손때 묻은 책상과 친구들과 뛰놀던 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정든 시골 학교가 나의 추억이 담긴 자리이기도 합니다. 정답게 놀던 친구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곳 고향이 나의 추억의 자리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던 그곳이 나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즐거움에 묻혀 살다가 내 인생 속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을 내 삶의 자리로 모셔 들이며 주님과 함께 살기로 결단했던 그 감격의 순간, 그 기쁨의 자리가 나와 주님과의 추억이 담긴 갈릴리입니다.
2. 부인했던 제자를 용서하고 사랑하셨던 자리 - 갈릴리는 내가 위험하고 곤란할 때 예수를 모른다고 시치미 떼고 부인했던 비겁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내가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만 겁쟁이들이고 비겁한 배신자들이 아니라 나 역시, 우리 역시 주님을 모른다고 고개를 저으며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하던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시 만나주시고 나의 형제라고 불러주시며 옛날 처음 주님을 알고 뵙던 그 자리로 초청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의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는 거기가 우리의 갈릴리입니다.
3. 새로운 각오와 결단의 자리 - 갈릴리는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각오와 결단의 자리입니다. 베드로처럼, 다른 제자들처럼 우리가 아무리 큰 소리 하고 자신만만하지만 언제라도 무너지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런 우리를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기고 죄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시고 그 사랑을 힘입어 다시 시작하라고 격려하시며 기회를 주시는 만남의 자리입니다.
갈릴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가 힘을 잃고, 희망을 잃고, 살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하며 두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시는 추억의 장소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자리가 있습니까?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이 주님을 만난 그 우물가를 생수를 얻은 자리로 알고 그곳을 마음에 두며 살았을 거라고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교우 여러분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그런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이 자리가, 여러분이 기도하는 가정과 일터가 여러분의 갈릴리가 되고 생수를 얻는 우물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갈릴리가 있다고 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그 자리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죽음과 실패의 자리에 머물러 우울하고 절망하고 슬퍼하지 않도록 격려하시는 그 자리, 부활의 주님을 의심 없이 믿고 의지하도록 불러주시는 그 자리, 갈릴리에서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길 바랍니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이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강 “예수 부활의 선물” (요20:19-23)
1. 평강의 선물 -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이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빨리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19절)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다락방 깊숙한 곳에 모여 앉아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신 후에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못박힌 손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내밀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은 겁많고 나약한 배신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꾸중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끝없는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21절 재차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반복되는 이 샬롬! 평강의 축복은 단순한 인사도 형식적인 위로도 아닙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요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21절에서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6절에서도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왜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한마디에 제자들의 모든 과거는 용서 되어졌습니다.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은 눈 녹듯이 녹아졌습니다. 의심의 먹구름은 깨끗이 끝났습니다. “샬롬!”의 평강은 영적인 충만함과 정신적인 평안과 육체적인 건강 그리고 삶의 풍요로움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위로와 축복의 말씀이 들려진 것처럼 부활이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무엇보다도 평강의 은혜가, 위로와 평안이, 담대함이 넘시기를 주님은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선물 - ‘성령을 받으라(레베테)’는 말은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계속 간직하도록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격적으로 내주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사명을 감당할 사도들에게는 필수적입니다. 참된 평강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충만해 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평강과 성령이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슬픈 자를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냉혈적인 사람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눅24:49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행1: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들은 몇 날이 못 되어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베드로와 사도들, 한 목소리로 복음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합니다. 부흥의 물결이, 은혜의 물결이, 축복과 은사의 물결이 충만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받아 평강에 평강을 더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