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ver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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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Author: 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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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Radio 표준FM 98.1MHz
99 Epis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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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교회사 인식은 신학교에서 시작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세계교회사를 배우지만 사실은 유럽교회사 특히 서유럽교회사에 편중되어 있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교회사는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유럽과 북미가 세계 역사를 구성해 왔으나 이제는 달라졌고 교회사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호주를 포함하는 역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선교의 역사로 볼 때 19세기 서양의 기독교는 세계 보편적 기독교가 되어 복음을 주고 받았으나 여전히 북미와 유럽 중심 기독교가 잔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미와 유럽교회는 쇠퇴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는 도약하여 기독교의 중심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옮겨진 상황입니다. 지난 1963년 몬트리올 세계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사 연구가 북미와 유럽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논의했고 1970년 신학자 피셔는 전세계 다양한 교회들이 우주적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1981년에는 스위스 바젤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려 다양한 모습과 역사를 지닌 세계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논의했습니다. 아시아 교회의 경우 1960년대까지 유럽 중심 교회사 연구에 머물러 있었으나 60년대 중반 이후 인도와 스리랑카 교회가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사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0~80년대 들면서 인도교회가 자기 중심의 역사 관점 갖기에 노력하면서 아시아 교회 역사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연구 제1세대 연구로는 1927년 작성되고 1929년 출간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역사연구가 한국교회사연구의 효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선교사들이 서구중심연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2세대 연구는 우리 주체적 역사 인식에서 비롯되어 민족관점, 민중사관, 수용사관으로 표현되는 역사적 관점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신앙적으로 구속사 관점에서 한국역사를 바라본 것입니다. 제3세대 연구는 장신대 임희국교수 등이 중심된 것으로 글로벌 시대에 지역사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강자 독식의 역사인식에서 약자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시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근대 아시아지역은 정치적 독립 이후 갱신과 성숙이 과제를 떠안고 있었고 아프리카지역은 미완의 경제적 독립으로 인한 숙제를 지고 있었으며 서양국가들은 문화적으로 패미니즘과 흑인인권운동에 맞닥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웅과 엘리트 중심의 역사를 반성하고 남성극복과 저변으로부터의 역사연구, 보통사람 중심의 역사연구 방법이 제시되었고 70~90년대 들어서며 인간중심의 역사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 관계하는 역사로의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또한 20세기 후반 들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활자문명이 영상문명으로 대체되어 역사기술방법이 다양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승리자와 엘리트 중심, 남성중심, 기득권 중심, 서양중심, 거대담론 중심의 역사를 해체하고 다양성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일었습니다. 교회사도 범주와 관점이 변화하며 세계교회사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역사가 골고루 다루어져야 하고 한국교회 역사와 정체성도 서양교회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사실 전래초기 한국기독교는 선교대상이 일반인과 여성이었고 기존사회질서의 파열을 가져왔으며 사대부가 변화하여 낮아짐을 실천하는 현상과 함께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미시사를 비롯한 다양한 관점의 역사 인식은 한국교회역사 인식에 필수적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전체와 함께 지역과 개체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미시사적 연구방법과 함께 역사자료에 있어서도 기록자료에 의한 엘리트중심 역사인식으로부터 벗어나 구술에 의한 보통사람의 역사 자료를 확보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예는 임희국교수 등의 지역교회사 연구와 제주4.3사태 관련 역사기록, 한국교회 선교에 기여한 여전도사 역사 기술로 구현되었고 또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역사는 선교사들의 역사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되며 그 자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관점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또한 교회내의 역사 자료를 중시해야 하고 역사의 시각을 지역으로 옮겨야만 할 때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세계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과거를 보는 일이고 현재를 거울로 비추어 보는 일이며 미래를 향해 열린 역사를 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변혁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역사는 다음 세대를 위한 바라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재미있는 스토리 텔링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학에 진학하였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발견하였으며 취리히대학에 머물며 경제윤리학자로 그리고 학문의 실천가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에 주목했는데 츠빙글리는 두 개의 법 또는 두 개의 의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 정의의 기초와 목표는 하나님의 공의에 있으며 특히 산상수훈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죄의 용서가 필수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의 계명이고 속사람과 관련되어 있으며 인간의 정의는 겉에 드러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구분은 되지만 결코 나눌 수는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책속에만 머물 뿐 삶의 책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정의를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부단히 추구해야만 하는데 인간의 정의를 세우는 책임은 정부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은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당시 경제현실 가운데 이자율과 관련해서 인간은 모든 재물의 청지기일 뿐이므로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하지만 현실적 대안으로 5%의 이자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 그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하고 그에 따라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어야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을 아르투어 리히가 20세기 들어 재발견하였고 이를 기초로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제 윤리를 모색하였습니다. 츠빙글리의 사회윤리에 기초한 아르투어 리히의 경제질서구상 1989년 유럽의 동구권이 몰락하여 시장경제질서에 종속되자 냉전질서는 종식되어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도래했고 정치.이데올로기는 경제중심시대로 이관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다시 발견한 리히는 시장경제질서만이 존속하는 시점에서 어떻게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세울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 츠빙글리 사상에 기초한 실천 가능한 경제윤리를 모색하고 추구했습니다. 당시 동구권은 서구와 같은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경제욕구가 상승하며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시장이 확대되었고, 서유럽은 이런 움직임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새로운 시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는 낙후된 경제현실 속에서 열강에 의한 착취가 강화될 것을 우려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시장경제질서란 개인의 자유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기본으로 최선의 유용성을 추구하여 생산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구매자가 상호 만족에 이르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작용이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기중심적 존재 즉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추구하는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질서 속에 정의가 이루어지려면 아담 스미스의 말대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야만 하는데 리히는 그러한 손이 작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큰 손들이 작용하여 불공정과 불의가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이 경제 주체가 되어야 하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경제 게임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리히는 실제로 작용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손을 대신해서 정부가 개입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분배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자본 지분의 51%를 갖는 노동자 조합을 제안했고 환경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연이란 무한공급 가능한 소비재가 아니며 생산의 요소로 인정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경제 다윈의 법칙인 적자생존의 법칙이 작용하며 빈익빈 부익부 현상를 심화되었고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물결이 온통 세상을 덮으며 리히의 경제질서구상은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따른 개혁교회 전통과 기본정신은 새 시대에 새롭게 조명되어 다시 살아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취리히 개혁교회의 시작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함께 사회변혁이 추진된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먼저 취리히 교회 개혁은 예배개혁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세교회의 미사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고 예배 언어도 라틴어에서 토착어인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이끌어 온 라틴어학교를 정비해 선지학교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성경 주석 작업과 함께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529년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이때의 성경주석이 오늘까지 큰 가치를 가지고 전래되는 칼빈주석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교회 개혁은 폐지된 수도원을 사회복지 기관으로 바꾸어 행정당국이 관장하게 하면서 사회변혁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정법원제도를 신설해서 법률상담과 일상생활에 관한 상담을 했고 경우를 따져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변혁의 큰 이슈는 농민들의 조세제도 개혁 요구였습니다. 취리히의 교회가 새롭게 바뀌고 사회도 변혁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이자율을 조정하고 소출세 납부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라는 글을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농민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를 수용하지 못한 농민들과 수렵인들은 1522년 반기를 들고 시당국에 항의하는 한편 츠빙글리를 비판하며 소요를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취리히를 떠나 재세례파를 결성하였습니다. 스위스 전역으로 확산된 종교개혁 바덴의 공개토론회와 스위스연방공동체의 분열 취리히의 종교개혁이 스위스연방공동체를 향해 번져나가게 되자 스위스 연방 지역대표자회의는 1522년 츠빙글리는 위험한 선동자로 지목하여 위험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지역대표자회의는 1526년 바덴에서 공개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때 취리히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카톨릭교회 측에서 요하네스 에크 그리고 개혁교회 측에서 외콜람파디우스가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잘못된 것으로 기존 가톨릭교회 중심의 전통적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는 고립상황에 처해 고사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바벨과 베른이 취리히의 개혁을 지지하면 나섰고 훗날 제네바의 개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베른의 종교개혁 베른의 군사적으로 강력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귀족과 토호세력이 베른을 장악하고 있어 취리의 개혁 배경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베른이 개혁은 예술과 문화를 통한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성직자의 부패와 모순, 부패, 용병제 등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며 비판하였고 민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527년에 이르러 의회가 강력해지면서 전통 귀족 중심의 도시가 의회중심으로 바뀌었으며 1528년 1월 의회중심의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토론회는 츠빙글리의 영향 하에 진행되어 교회관과 성경의 권위, 미사, 성자 숭배, 성화, 성직자 결혼 등을 다루어 미사의 폐지와 성화 철거를 결정했습니다. 이제부터 베른은 취리히의 뒤를 따라 교회개혁을 시작했고 이러한 결정은 스위스연방공동체이 세력 다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취리히는 연방공동체 전역으로 개혁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와 베른 그리고 바젤은 개혁의 삼각형을 이루어 정치세력화 하였고 연방공동체는 기톨릭과 반가톨릭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카펠전쟁 스위스 연방은 이제 취리히, 바젤, 베른 중심의 군사동맹체와 루체른 등 5개 도시 중심의 군사동맹체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529년 6월 1차 카펠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뜻밖에도 무기 대신 음식을 나누는 사태로 말미암아 전쟁은 계속될 수 없었고 제1차 카펠평화조약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개혁도시가 증가하자 가톨릭세력은 분노하여 루체른 등이 도시가 중심이 되어 반종교개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더구나 이들 지역이 개혁도시들에 의해 지리적으로 고립되자 제2차 키펠전쟁이 벌어졌고 여기서 가톨릭 세력이 승리하고 개혁의 주창자 츠빙글리가 사망하면서 스위스 전역으로 개혁운동을 추진하려던 그의 의지도 꺾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이후 취리히에 블링거가 취임함으로 츠빙글리의 개혁은 지속되었고 오늘날 츠빙글리의 후임자 블링거는 개혁교회의 교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취리히의 1차 공개신앙토론회 1529년 1월 29일에 열린 공개토론회에는 시 당국자와 일반시민, 가톨릭사제, 개혁가 등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토론회에 앞서 츠빙글리는 기존 설교를 축약하여 67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으로 중세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주장했습니다. 드디어 토론회장에서 맞붙은 중세교회대표 파브리와 츠빙글리는 권위논쟁, 공의회논쟁을 펼쳤고 그 결과 츠빙글리가 승리하여 취리히에서 중세가톨릭 교회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련의 변화가 따르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가 라틴어 대신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예배당에서 성상과 성화가 철거되었으며 성직자의 금혼이 깨어져 다수의 성직자가 결혼하였습니다. 1차 공개토론회 결과로 개혁의 물살이 급류를 타면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되자 그 잔류재산과 업무의 처리가 취리히 종교개혁의 중요한 주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잔류재산은 시당국에 귀속하기로 하고 환자와 나그네 돌봄 그리고 복지사업, 교육 등은 시 당국이 맡으며 교회는 신앙문제에 전담하기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시민사회 성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의 개혁 작업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취리히 사회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취리히의 2차 공개신앙토론회 새롭게 개혁된 취리히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혁과정 중 교회의 성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점차 집단화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개토론회가 소집되었는데 1523년 10월 26일부터 사흘간 350여명의 성직자를 포함하여 전체 연방에서 일반시민 등 9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의제는 성화와 미사였는데 한시적으로 성화를 허용하기로 하는 등 시의회는 중도적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두 번의 토론회를 통해 츠빙글리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중세교회는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즉 사순절 금식 전통은 차츰 소멸되었고 중세교회의 미사는 예배로 바뀌었으며 취리히 시는 완전히 종교개혁도시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동참하지 못한 세력인 농민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노출신인 이들은 10%의 소작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츠빙글리는 이를 5% 내외로 조정하자는 안을 제시했으니 농민들은 완벽한 자치권과 독립권 그리고 농지 소유를 요청하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노에서 동등한 관계로 신분변화를 제시했으나 농민들은 농노제도의 완벽한 폐지와 교회재산을 농민들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며 결국 독자노선을 택하여 재세례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취리히 개혁 교회 1. 예배개혁 개혁된 교회는 미사를 설교와 성만찬 중심의 예배로 바꾸었습니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시행할 것을 권했으나 1년에 네 차례 시행되었고 성찬기는 화려하지 않게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교회 안의 성상을 철거하고 말씀 집중을 위해 악기 연주도 금지했습니다. 2. 새로운 체제 츠빙글리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교회체제를 구상했는데 이는 교회가 행정당국의 감독을 받되 경제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토지를 소유하여 임대료와 소출로 목회자 사례를 지급하는 등 교회를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3. 새로운 목회자 양성기관 설립 츠빙글리는 교회의 라틴어학교를 정비하여 선지학교를 개교하여 중세교회 성직자들을 재교육하는 등 개혁 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새롭게 청빙된 히브리어교사 펠리칸과 츠빙글리가 성경교육 특히 원어로 성경 읽기를 중심으로 교육했는데 히브리어 주석과 라틴어 해석 그리고 토착어 설교로 이어지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형식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어 성경이 토착어 성경으로 번역되어 1532년 완전한 독일어 신구약 성경이 완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설교의 원류를 츠빙글리의 선지자학교에서 찾기도 합니다.
츠빙글리 신학사상의 변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청빙 받은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개혁에 나설 즈음 당시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츠빙글리는 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발병 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음악을 짓는데 몰두하던 그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에라스무스적, 인문적 개혁 의지를 버리고 성경에 몰입하여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연구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내용을 깨우친 후 오직 예수의 화해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며 본격적인 종교개혁에 나섰습니다. 1551년 츠빙글리는 뮌스터교회를 이끌어 가는 24명의 수사회원 중 한 사람이 되어 목회자와 감독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자신의 교회개혁 의지와 구상이 지지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522년에는 ´권위 문제‘에 부딪혀 기존 교회의 제도와 공의회, 교리,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인문주의자들과 갈라서게 됩니다. 이들의 노선과 달리 츠빙글리는 기존 교회의 권위를 모두 부정하고 오직 성경 즉 하나님 말씀만을 새로운 권위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 개혁에 나선 것입니다. 이 때 츠빙글리는 성경주석을 통해 설교로 이어지는 과정을 가르치는 선지학교 즉 목회자 양성학교인 프로페찰을 신설하였고 철저히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당시 취리히 상황 그로스뮌스터 교회에 행해진 츠빙글리의 강해설교에 영향을 받은 청중들은 기성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시작했습니다. 즉 마리아 상과 그에 대한 숭배, 성자숭배, 수도원 부패, 성직자의 독신제도 등을 공개 비판하였고 그 가운데 당시 가톨릭교회 영향으로 사회제도로 정착된 사순절 금식과 고기 취식 금지 등 경건운동의 율법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 규례를 깨뜨리려 했습니다. 즉 1522년 3월 열 두 명이 출판업자의 집에 모여 의도적으로 소시지를 먹었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져 여러 곳에서 소시지 사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사순절 기간 중 고기취식을 죄로 여겨 이를 처벌할 성경적 근거는 없으나 기존의 전통을 존중해야 하며 다만 공공질서를 파괴하거나 여러 사람을 시험 들게 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즉 사순절 기간 중 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이나 공공의 질서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금식규례는 교회를 떠나 사회적 쟁점이 되어 시의회 사안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시의회는 그로스뮌스터교회 상임위원회에 이 문제에 대한 진단을 의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며 갑작스럽게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견해를 밝혔고 취리히의 성직자 대다수가 이에 찬성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콘스탄츠주교가 특사를 파견하여 협의한 결과 한시적이라는 단서를 달아 금식규례를 지키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의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중세교회의 권위가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이 말씀과 충돌하는 사건이었으며 츠빙글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중세교회의 전통인 교부보다는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참된 권위이며 따라서 마리아 숭배와 마리아의 중재사역, 경배대상 등에 반대하고 성인 숭배 또한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취리히 시의회도 이에 동조하고 따랐습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1522년부터 결혼을 유지하여 네 자녀를 두었으며 이를 취리히의 사제들이 따르다가 교회로부터 파면되자 스위스 공동연방체에 자신을 의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츠빙글리의 성경이해 당초에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인문학적 이해와 기반 위에서 출발한 츠빙글리의 개혁은 이 무렵 에라스무스와 갈라서게 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즉 1522년 에라스무스와 결별하면서 츠빙글리의 성경이해는 더욱 분명해졌는데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은 죄에서 자유 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이에 응답할 수 있으며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성직자나 그 어떤 매개체로도 대신할 수 없고 셋째 인간의 사사로운 성경해석과 인문주의 적 성경해석에 반대하며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함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식 논쟁 사순절 금식논쟁과 관련해서 취리히 시는 양분되었고 시의회도 양분되었으며 이 문제는 스위스 연방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었습니다. 연방은 취리히 시가 양분되는 것을 막고 어떻게 해서든 통합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광장 민주주의식의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시 대의회가 성직자를 초청해서 공개토론회 열었는데 이 토론회는 시의회가 주관하여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일반대중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으며 성경에 근거해서 의견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교회주도의 성직자 중심토론회나 대학중심 토론회가 한정된 지식층만 참석해 라틴어로 진행되었던 것과 확연히 비교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구적인 직접 민주주의적 공개토론회였고 이 직접 민주주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시대의 자식, 시대의 리더 츠빙글리 당시 시대의 자식으로서 교육을 통해 두루 시대를 섭렵한 츠빙글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됩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양성된 츠빙글리는 바젤에서의 교육을 통해 중세 고전을 습득하고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열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때 츠빙글리는 나중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될 펠리칸과 유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글라루스 시절의 츠빙글리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츠빙글리는 콘스탄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관례대로 고향마을에서 첫 설교를 하고 인근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서너 개 교회를 돌보며 성실한 사제로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위스의 용병제도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시절 스위스의 용병제도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벌써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이 제도는 처음 젊은이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성해 전쟁을 일삼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정부가 이를 해결하거나 추인해 왔으나 14세기 이후 전사 계급으로 자리 잡았고 부르군도 전쟁에서 타국 제후 대신 싸워주며 그 군사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국제사회에서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1494년 이탈리아가 유럽의 전장이 되자 프랑스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 이에 대항해 합스부르크 왕조도 참전했는데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프랑스를 이탈해 상대진영에서 프랑스를 공격하고 다시 급여를 받은 일부 용병이 프랑스 진영에 복귀하면서 용병들끼리 전쟁을 치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1503년 스위스연방공동체는 외국과 용병계약을 하려면 모든 연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만장일치로 체결하였으나 지켜지지는 못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용병에 대한 글 발표 1510년 츠빙글리는 스위스 외교정책과 용병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밝힙니다. 여기서 그는 어느 편이든 용병이 되어 치르는 전쟁을 반대하며 굳이 용병이 되려면 교황의 편에 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는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를 가지고 용병은 교황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그는 50굴덴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의 포상을 매년 교황청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1513년 노바라 전투에 참여하고 1515년 글라루스 군사 500여 명이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글라루스에서는 프랑스 편을 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면서 츠빙글리의 교황지지가 설득력을 잃었고 그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회의를 느껴 용병제도의 전적인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점차 평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갔고 그로 인해 평화를 외치는 인문주의자들과 접촉하였고 특히 에라스무스에 주목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평화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아인쩨델른의 츠빙글리 1516년 교황지지자인 츠빙글리는 정치적 이유로 인찌델른으로 인사조처를 당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2년여간 전적으로 목회에 열중하며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에 치중하였습니다. 특히 중세 철학과 고대 교부들에 관해 연구하고 무엇보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동조해 원전으로 성경을 읽기 위해서 헬라어를 공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론에 치중하는 기독교가 아닌 실천적 기독교, 윤리적 기독교가 되어야 함을 인지하고 평화 사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점차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성향과 개혁의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취리히 목회자 츠빙글리 1518년 후반에 취리히의 행정기관인 소의회는 용병 등으로 인한 도시의 퇴폐를 청산하기 위한 정신적 지도자겸 개혁가로 츠빙글리를 청빙했습니다. 이는 소의회가 츠빙글리의 개혁성향에 주목한 결과이자 스위스연방의 국제외교를 주도하던 취리히가 교황 편으로 기울면서 교황지지자로 알려진 츠빙글리에 주목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츠빙글리는 이 청빙을 받아들여 자신의 35번째 생일인 1519년 1월 1일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부임했습니다. 부임한 츠빙글리는 설교를 최우선과제로 여기고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성경 본문 강해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윤리적, 도덕적 모범으로 삼아 사회정화를 구현하고 윤리중심의 에라스무스식 교회갱신을 추구하는 한편 수도사와 성직자의 경제적 풍요, 비밀결혼, 성도 기만, 성인숭배. 수도사의 나태와 타락을 비판하며 교회갱신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또한 용병문제 등 사회 현실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개인과 사회의 윤리적 개혁을 주창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사회전반에 대해개혁을 시작하던 츠빙글리는 당시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1. 종교개혁의 배경 스위스 앞서 살펴본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그 내부의 정치역학관계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나라인 스위스는 모든 면에서 이와는 매우 다른 환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스위스에는 왕이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즉 중앙집권 정부가 존재한 경험이 전무했으며 지리적으로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기대있어 골짜기마다 작은 부락을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291년 호수가 많은 루체른 호수를 중심으로 한 다섯 마을이 계약연방체를 결성하면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연방체에 각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점차 발전되었으나 중앙집권체제로 가지는 않았고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할 뿐 각 지역 대표 두 명씩이 정기적 회합을 통해 만장일치로 모든 사안을 의결하는 등 각 지역의 자치권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체제를 굳히게 됩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 취리히는 이 계약 공동체에 공동체 결성 뒤 60년 후인 1351년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도시국가 취리히는 인근 짤츠부르그의 소금과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교역하는 국제 상업, 무역 도시였습니다. 이 때 취리히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정치와 행정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즉 취급품목별 동업조합인 길드 형태의 쭘프트를 결성한 상인, 수공업자, 금융가 등이 직종을 대표하는 162명으로 대의회를 구성해 입법권을 행사했으며 따로 동업조합 대표 25명으로 구성된 소의회가 행정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의회는 주로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반면 행정을 맡은 소의회는 도덕과 윤리에 기반을 둔 건강한 사회 조성에 관심을 두어 두 기관은 종종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등 늘 긴장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반면 취리히 근교의 농촌마을 사람들은 행정 관료가 될 수 없이 소외되었으며 소의회의 청빙을 받아 추진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도 취리히 행정당국과 긴밀히 결속된 도시기반의 개혁이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농민중심의 개혁세력은 나중에 재세례파로 분립하게 됩니다. 당시 인구 약5천여 명으로 바젤이나 제네바의 인구 만여 명에 비해 절반 정도에 그쳤던 국제무역도시 취리히는 소금과 곡물, 가축, 견직물 등의 무역이 점차 쇠퇴하고 수공업이 침체되면서 16세기 들어 큰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도시에서 기반을 잃은 세력이 농촌지역에 진출하려했으나 기존 농민과 충돌하게 되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진출할 곳을 찾지 못하자 마침내 인근 국가들 간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에 참여하여 수입을 올린 용병들이 귀국하면서 그 임금을 유흥비 등으로 탕진하는 등 윤리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자 행정을 맡은 소의회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시를 구원할 정신적 지도자로 개혁자 츠빙글리를 청빙하게 된 것입니다. 2.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도시가 아닌 농촌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농촌의 작은 단위 지도자였습니다. 스위스의 농촌은 주로 밭농사와 초지에 기반을 둔 목축으로 이루어 졌는데 목축의 경우 험준한 산악지형과 혹독한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두레와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동부 알프스 지역에서 출생했으며 성직자인 삼촌을 따라 어릴 때부터 바젤로 가 라틴어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년 뒤 베른으로 가서 공부했으며 이때 좋은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성악과 기악 모두에서 매우 뛰어났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당대 최고 대학중 하나인 비엔나대학에 4년간 유학했고 바젤로 돌아와 인문학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바젤에는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인문주의자들은 인쇄업을 하며 고전과 교부들의 작품을 출판했는데 츠빙글리는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 츠빙글리는 인문학 학위를 취득하여 시대의 지식인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완결편 1522년 비텐베르크로 귀환한 루터는 4년 여간 개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즉 칼 슈타트와 결별하고 농민전쟁을 반대하는 등 점진적이며 온건함으로 표현되는 루터 자신의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1524년과 이듬해에 걸쳐 루터는 당대 대 인문학자이자 개혁지향자인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사람’이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선하며 타고 난 선한 씨앗을 교육을 통해 발아시켜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인간은 철저히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칭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므로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루터를 지지하던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의 위기상황 1525년에 이르렀을 때 95개조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동료 개혁가 또는 지지자들이 다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지지 세력은 지식인과 농민 그리고 개혁의 동료 등이었으나 이들 안에서 분열과 갈등이 점차 자라가며 증폭되었습니다. 게다가 중세 가톨릭교회는 모든 개혁세력을 ‘루터파’로 규정하고 가톨릭 세력 자체 동맹을 통해 보름스칙령의 시행을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칫 사멸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의 극복과 루터교회의 탄생 이 때 헤센지역의 영주 필립이 루터를 지지하는 정치, 군사적 동맹을 주창하였고 루터의 활동 지역인 작센의 영주가 합세하는 등 1526년 토르가우 동맹을 결성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즉 가톨릭 세력인 황제의 힘에 대항하는 영주들의 동맹으로 개신교 탄생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인데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보름스 칙령을 보류하기로 결정하면서 개신교가 실체로 등장하였고 이것이 독일개신교 즉 루터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세력과의 관련 속에서 태어난 개신교는 루터를 지지하는 영주의 힘에 의해 실체화되었으므로 영주에 의해 교회 시스템이 가동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세속 당국이 독일 루터교의 예배 순서까지 관리하고 감독하는 특징을 지닌 배경입니다. 즉 교회의 수장이 중세교회의 수장인 교황에서 지역 영주로 이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당시 새로운 교회의 시스템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안이 제출되었는데 목회자 청빙과 대의적 의결 기구, 네트워킹 등을 특징으로 하는 1안과 중앙감독의 지시에 의해 교회가 작동되는 감독제의 2안이었는데 루터는 2안을 선택하여 오늘까지 루터교는 감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안의 모습은 오늘날 장로교회를 통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양 교회 체제의 확정 개신교인 루터교가 실체화된 1526년부터 30여 년간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대립구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영주들의 정치적 세력 다툼도 종교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톨릭세력은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한 14개 도시의 대표와 귀족 400여명이 반기를 들고 항의서를 제출하여 루터를 지지합니다. 이 ‘항의서’에서 비롯된 이름이 오늘날까지 개신교를 일컫는 용어인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이 때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터키의 침공을 막아내었으며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힘을 키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5세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세력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루터교를 인정하려는 의도를 담아 신앙고백서 제출을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루터가 아닌 멜란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그는 가톨릭과의 조화를 위해 연옥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츠빙글리 등 여타 개혁세력과는 선을 긋는 내용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루터교의 신앙고백서가 되었고 루터교는 이 신앙고백서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에 불만을 품은 군주들이 이탈하여 두 세력의 타협은 무산되었고 이탈한 군주들은 1531년 작센과 헤센 경계지역인 슈말칼덴에서 군사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에는 점차 참여 세력이 늘어나 외국 세력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95개 조항을 적은 대자보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마침내 유럽 전체의 정치 구도를 변화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고 1546년 마침내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 황제와 지역영주연합 그리고 가톨릭세력과 루터교 세력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종교개혁의 주창자 루터는 그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55년 황제 카알5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1530년 작성된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맺어 두 종교 지역을 분할하였는데 한 지역 한 종교 방식을 유지하되 지역 영주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뜻을 이어 실체화된 개신교인 루터교는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위에서 새로운 교회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환편 루터 부재의 비텐베르크 상황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 숨어 지내던 10개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개혁이 계속되어 점차 과격한 양상을 보였고 이에 따라 소요와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 상황으로 먼저 루터를 추종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이탈했고 루터의 개혁 동료인 멜란히톤은 성만찬에서 회중에게 분잔을 시행했으며 독신 수사나 사제들이 독신서원을 깨버린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제들의 독신 전통은 2~3세기 남녀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어 11세기 교회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으며 1139년 라테란공의회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후 강하게 유지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대학동료이자 종교개혁자인 칼 슈타트는 미사 철폐와 설교중심 예배로의 개혁, 전통적 성직자 복장 폐지,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예배 진행, 고해성사와 사순절 금식의 폐지, 교회의 성화 철거 등 상당히 과격한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개혁론을 폈던 루터와는 차별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이들 둘은 나중에 결별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시장경제 형성단계에서 시 행정의 자율권을 가짐에 따라 비텐베르크 시 당국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 가난한 자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비어 있는 수도원과 교회 재산으로 공동금고를 조성하여 개혁 재원을 마련하는 등 매우 개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센의 선제후가 이러한 시 당국의 개혁에 반대함으로써 시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근 광산 도시인 츠비카우에는 한 예언자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나 유아세례 폐지를 주장하는 등 사회적 불안 상황을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귀환 1522년 3월 1일 루터는 잠행을 마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만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하며 사순절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개혁의 구상을 밝혔습니다. 루터는 이 구상에서 급진적 개혁 안에는 분노가 존재하여 끝내 폭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개혁의 방법은 온건하게, 개혁의 속도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개혁이 본격화 되던 비텐베르크는 여러 상황과 노선이 혼재되어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루터는 이렇게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라틴어 예배로의 복귀와 성만찬에서 분잔 시행, 설교중심의 예배로 개혁, 회중이 예배순서 참여 등이었습니다. 점진적인 교회개혁을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 당국과 함께 국가와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이 때 루터는 먼저 결혼은 악마의 작용이 아니고 부부가 파트너로서 가족공동체를 구성해야 하고, 사회 약자와 빈자, 소외자를 돕기 위해 중세교회재산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금융경제가 시작된 시점에서 푸그 가문의 부의 독점과 고리채 등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 교육제도 개선으로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을 시행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 즉 정교분리로 두 개의 왕국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교회와 하나님의 권세를 위탁받는 국가권력에 모두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교회개혁과 마찬가지로 국가, 사회 개혁에 있어서도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개혁의 동료였던 칼 슈타트 등 과격한 개혁 세력들과 끝내 결별하였고 이 때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하여 칼 슈타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축출되어 스위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루터와 대립된 노선을 걸었던 칼 슈타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강조하며 신비주의적 성향을 띄었고 외형적이며 가시적인 것은 부정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서 끝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개혁 세력으로 토마스 윈츠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칼 슈타트보다 더욱 과격하고 더욱 신비주의적인 사람으로 농민전쟁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금욕적이었고 내면의 말씀에 집중했으며 주관적 확신에 의해 행동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1524년 농민들과 접촉하여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주장하며 그 나라를 위해 칼을 들고 일어서자고 선동해 농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과격한 개혁에 루터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고 전쟁을 이끈 토마스 윈츠는 1525년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1520년 루터의 중요한 저술활동 1.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 당시 중세교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비판한 루터는 이러한 구조의 타파가 성직자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평신도인 황제와 귀족 등에게 이를 호소하는 글을 씁니다. 즉 독일의 지배세력인 귀족이나 영주 등이 공의회를 주도해야 하고 평신도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평신도 내부의 계급도 사회유지를 위한 기능적 역할만 할 뿐 근본적으로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역할과 기능이 있을 뿐 계급이나 계층을 이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것이 곧 만인제사장제이며 세속적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교황의 종교권력 폐지, 성직자의 결혼, 보헤미안에 대한 공정한 대우 및 평화공존, 빈민보호, 대학교육개혁 등을 주장했습니다. 2. “교회의 바벨론 유폐에 대하여” 당시의 교회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제목의 책에서 루터는 교회의 7개 예전 중 2~3개만 인정했는데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이었습니다. 여기서 ‘후스’가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그의 사상에 따라 평신도의 분잔 참여를 주장하고 화체설을 부인했으며 말씀에 대한 이해로서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그리고 “계시된 말씀”으로서 말씀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씀의 삼중적 형태를 주장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자유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럽 정신이 근간이고 유산이며 덕목입니다. 자유는 집단보다는 개인을 생각하며 결국 개인의 평등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는 폭력이 아닌 사랑을 바탕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신앙인은 믿음으로 자유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따라서 어떤 신앙인도 노예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1519년 6월 독일의 카알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루터가 속한 작센 선제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교황은 다시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을 재개합니다. 그리고 루터의 95개 조항 가운데 41개 조항에 이단성이 있다는 결론에 따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보냅니다. 그러나 1520년 12월 루터는 전달된 파문장을 대중 앞에서 불태워 버림으로써 교황청과 정면충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루터 문제를 황제에게 의뢰하고 황제는 1521년 3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열어서 루터를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루터는 ‘기왓장보다 많은 악마가 보름스를 장악한다고 해도 보름스로 가겠다.’는 말로 자신을 심정을 피력하며 제국의회에 출두했고 황제의 주장철회의사 질문에 사회에 대한 물의는 사과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느니 차라리 불에 들어가겠다고 답했습니다. 마침내 황제 카알5세는 최종판결 성명을 통해 루터는 이단이라고 규정했고 5월8일 루터를 제국에서 추방하며 루터의 글을 구독하거나 반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보름스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1521년 판결은 확정되었으나 형을 집행할 공권력은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정불안으로 황제가 이십여 년 스페인에 머물게 되었고 오스만터키와 전쟁을 수행하느라 보름스 칙령은 삼년간 집행이 연기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독일 남부지역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루터의 지지자들과 종교개혁 세력이 확산되었고 한편으로 다양한 개혁 세력들이 우후죽순 발흥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즉 1521년 4월부터 10개월간 루터는 고독하고 힘겨운 잠행시기를 보냅니다. 이 때 독일남부 아이젠나흐의 바르트부르그성에 칩거하며 묵상과 수행에 몰입했는데 이때 지은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 나오는 ‘성’은 바로 그가 머물던 바르트부르그성을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주로 자신의 신학과 행위가 옳았는지를 성찰하는 시기였으며 헬라어 원전을 바탕으로 살아있는 대중적 독일어를 사용한 성경번역을 하며 위험한 시기에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루터의 종교재판 한국교회는 오는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로 삼아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터가 면죄부 토론을 위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그城 교회 문에 붙인 것을 종교개혁의 시발로 여긴 것입니다. 이 논제의 핵심은 “과연 교회와 사제가 죄의 사면을 위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러나 토론에 응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향은 점차로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이듬해인 1518년 3월 95개 논제들을 요약해서 발표했는데 역시 그 내용은 면죄부는 면죄의 효과가 없고 단순히 건축헌금용이며 차라리 가까이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 교회가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면죄부 판매를 맡았던 ‘테젤’이 소속 수도원을 동원하여 루터를 이단재판에 넘기도록 선동했고 실제로 1518년 혐의입증을 위한 청문회를시작으로 재판과 파문결정 그리고 1521년 보름스 칙령으로 추방령이 내려지기까지 2~3년여간 루터는 아주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즉 이 기간에 루터는 중세교회와 스콜라 신학 그리고 자신의 신학 등에 대해 깊이 성찰하였고 결과로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되었습니다.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은 루터가 속한 작센지역 영주인 선제후의 배려와 당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바티칸이 아닌 독일 아우구스부르에서 열리게 되었고 교황청에서 파견된 당시 대신학자 카예탄추기경이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은 논쟁의 중심인 구원의 문제를 놓고 신학토론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루터는 떠나고 종교재판은 무산되었으며 신성로마제국 후임 황제 선출을 둘러싼 정치상황에 따라 협상과정이 진행되었고 밀티츠의 중재로 루터는 공개적 교회 비난과 대중 선동을 중단하고 교황청은 루터 문제를 독일교회에 일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루터를 비난하고 나서면서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1518년 하이텔베르그 논쟁으로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내세우며 지지자들을 확보했던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당시 중세교회 대학자인 요하네스 에크와 다시 신학논쟁을 벌입니다. 여기서 루터는 보헤미아 후스의 입장이 옳았음을 천명하며 논쟁의 중점인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교황과 공의회를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로서 성경 즉 복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중세교회를 따르는 보수주의자들과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는 인문주의자 및 후스파로 양분되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 루터는 더욱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였고 그와 더불어 글쓰기에 집중하게 되는데 1519년 시편강해와 갈라디아서 주석을 편찬하고 1520년 교황권과 중세교회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이시며 교황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이는 성경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착한행실’에 대해서 인간은 죄인이므로 오직 하나님이 은총에 따라 예수를 통해 새사람이 되어야만 착한행실을 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착한행실인 일상의 선행과 금식기도나 성지순례 심지어 미사 등 종교행위 조차도 믿음에 뿌리를 두지 않고는 소용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일상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그로 인해 예배의 일상화가 이루어지며 그것이야말로 참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교회는 마땅히 루터의 사상과 실천을 눈여겨 보고 한국교회 갱신과정을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하며 이를 한국교회의 유산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루터의 사상 형성 과정, 비텐베르그 시절 루터의 비텐베르그 시절은 박사학위를 목표로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던 시기였습니다. 1512년 비텐베르그로 옮겨간 루터는 학문에 몰입하는 한편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를 편찬하는 등 성경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세워나갔습니다. 당시 성경을 이해하는 오리게네스식 방법을 넘어서서 루터는 성경의 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즉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경은 성령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성경은 기록된 시대에 사람이 이해하는 언어로 하신 말씀이며 기록자가 처한 문화와 사회,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당시 언어로 하신 말씀으로 여겼습니다. 즉 비로소 복음의 눈으로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중세로부터의 혁명적 변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의 원천은 오직 성경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가 되어야 하므로 설교는 철저히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며 설교의 중심은 말씀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505년 벼락사건으로 시작된 영적시련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17년 종교개혁에 이를 수밖에 없는 대폭발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종교개혁의 폭발적 힘은 성경으로부터 나왔으며 그 말씀의 핵심은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무서운 하나님을 만족시켜 의에 이르고자 힘썼던 루터는 참회와 금욕, 고행에도 불구하고 자유함을 누리지 못했으며 끝내 율법적 의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감에 하나님을 증오하기에 이르렀으나 바로 이 말씀에 따라 나 대신 예수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 결과 내게 미쳤으며 그로 인해 비로소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것을 믿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큰 변혁이었고 특히 당시 교회의 성인신앙이 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발화점 면죄부 루터는 이렇게 재발견한 복음을 통해 종교개혁 신학을 세웠고 이 신학은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을 통해 성숙해 갔습니다. 그러한 루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시 기존교회의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당시 면죄부는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한 일시적 사면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판매되었고 구원과는 무관했으며 교회의 제정 확충과 신도들의 죄에 대한 의식 고양을 위해 운용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성지순례나 십자군 참여 등 몸으로 그 대가를 치르던 것이 1303년에 이르러서는 성베드로 성당 입구에서 돈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면죄부는 발행처인 교황청과 실제 집행자인 마인츠대주교 그리고 화폐를 생산하는 푸그 가문의 3자 역학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신도의 영혼구원을 빙자, 악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중세교회의 대표적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사제였던 루터는 거대한 구조악으로 판단했고 이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요청하는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내걸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토론되기를 기대했던 내용들은 진정한 회개, 연옥에 있는 영혼의 구원과 신자의 일시적 면죄, 면죄부 판매를 통한 교회 재산의 증식, 교인 설득의 폐해 등이었으나 실제로 토론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이 내용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최초 루터의 95개 조항은 이후 요약본으로 발표되었고 루터는 교회 건축헌금보다는 가난한 이웃이 더 중요하고 먼 곳의 교회보다는 가까운 이웃을 구제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면죄부 구입은 죄의 면제와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신자들이 죄를 쉽게 보는 신앙생활태도를 갖게 되는 폐해를 일으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면죄부 판매자인 ‘테젤’은 소속 수도원을 동원하여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한편 교황청에 보고하여 처벌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가 주창했다기보다는 루터가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이 일에 먼저 나섰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모습인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새롭게 나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이는 루터만이 아니라 16세기 다양하게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이 공통된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후년에 맞게 되는 루터의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원조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고함으로써 세상의 신뢰를 잃고 고립되어 가는 우리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의 정신과 원리가 각성되기를 기대하는 몸부림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루터의 초기 생애와 사상 형성 과정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북부 독일 아이스레베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광부였으나 나중에 광산물 제련소를 차려서 소자본가로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는 9남매의 장남이었고 영민한 편이어서 부친의 기대가 컸던듯합니다. 어려서 라틴어 학교를 거쳐 성당 부설 기숙학교에서 공부했고 부친의 소망대로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엄한 양친의 영향을 받아 심리적 억압을 매우 심하게 겪었고 그로 인해 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으로 규정된 신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루터는 법률 공부에 앞서 인문학적 소양을 위한 철학공부를 했는데 이때 오캄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유명론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대체로 평이한 대학생활을 했고 성악, 기악 등 음악과 시에도 깊은 소양과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후 법학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명한 벼락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길에서 벼락을 만나면서 죽음의 공포를 극적으로 느낀 루터는 참회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자리에서 수도사 서원을 했고 실제로 보름 후 엄격한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벼락사건으로 시작된 루터의 영적시련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았고 마침내 스승 슈타우피츠의 도움으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어서 신학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권유로 비텐베르그로 옮겨가 박사학위를 목표로 성경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비텐베르그 생활 5년여는 루터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당시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95개조항의 대자보를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후스파와 지그문트 왕의 12년전쟁 체코의 벤젤왕이 사망하고 동생인 지그문제의 왕위 계승 시도에 후스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양진영간이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때 후스파는 전쟁에 임하는 각오를 ‘프라하 신앙고백’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후스의 개혁정신을 되살려낸 것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자유로운 선포, 차별없는 성찬, 성직자의 재산과 정치력 배제, 보헤미아 민족의식 획복 등이었습니다. 양 진영은 12년에 걸쳐 다섯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다가 협상에 들어갔으나 네가지 항목중 성찬에 관한 것에만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후스파는 ‘보헤미아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존속되었습니다. 후스를 정점으로 한 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은 무산된 것이 아니라 체코를 넘어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으며 마침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하나의 교회 개혁의 관점을 떠나 한 시대의 거대한 사회변혁의 물결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15세기 중세 가톨릭 교회 이때 새 교황인 마틴5세는 문화 예술을 장려하여 바티칸 도서관 확장과 베드로 성당 건축에 나섰습니다. * 무너지는 중세사회질서 중세 후기가 되자 화폐경제가 도입되고 이에 따라 시장과 도시가 발전하면서 상인과 수공업자 계층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금융업이 흥왕하고 다양한 지식이 창출되면서 수도원까지 도시로 진출하고 새로운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별히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지식이 대량 확산되었고 이는 성경번역과 출판을 통한 종교개혁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유럽 전체 변혁의 획기적 역할을 했습니다. * 인간이해의 변화 흑사병이 창궐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자 사람의 가치와 존엄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단이 아닌 개인에 대해 인식이 증대되었고 개인주의가 싹터 교육에 눈을 떴고 대학이 설립되면서 교회가 독점하던 지식과 정보가 개별학교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질병과 관련하여 사람의 몸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면서 해부학 등 의학이 발달했고 인체를 다룬 예술 또한 발전했습니다. 우주를 관찰하는 등 자연과학이 발달했고 화폐단위가 증가하면서 ‘백마’ 단위가 처음 등장하고 둥근 모습의 지구를 인식하여 신대륙발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교회의 내적변화 당시 신학은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사변적이었으나 점차 단순하게 실천지향적으로, 신앙교육과 경건훈련을 실천하는데 중점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인문주의자 등 새로운 지식인이 등장하여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하고 중세교회에 얽매이지 않으며 교부들과 고대 고전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 성경 등을 원전으로 읽고 주석함으로써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바탕을 마련하였습니다. * 시장의 역할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은 종교개혁의 좋은 토양이 되었습니다. 기존 교회와 예배의 형식은 농부중심의 신자가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참여해서 전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유지했던 것에 비해 종교개혁자들은 시장에서 토착언어로 설교하고 토론함으로써 새로운 교회와 예배의 형식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는 면죄부 판매 비판으로 그동안 지지를 받던 황제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자 망명길에 나섰습니다. 남쪽으로 이동하며 이르는 마을마다 민중언어인 체코어로 설교함으로써 기존 예배와 차별화된 개혁성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후스는 세 가지 신학사상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10계명 해설과 주기도문 강해, 사도신경 강해가 그것으로 이후 매우 중요한 교육자료가 되었습니다. 후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리와 교회’였습니다. 특히 당시 중세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였던데 반해서 후스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이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로 이루어진 교회가 참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어거스틴과 위클리프의 교회론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전통 중세교회와 후스가 주장하는 교회 사이에 중도적 입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교황과 사회지배계층으로 대변되는 평신도의 협의체 즉 council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점차 대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414년 첫 공의회가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렸으며 이 공의회의 주된 쟁점인 후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황제가 망명중인 후스를 소환하였습니다. 그러자 후스는 황제가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자기 변호를 위해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체포, 감금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단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어 당일 화형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체코 전역이 들끓게 되었고 특히 젊은 귀족 450여명은 연명으로 편지를 교황에게 보내 체코의 종교문제는 자율적으로 해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후스의 신학에 따라 날마다 성만찬을 행함으로써 중세교회를 부정하고 예배 참여자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새로운 교회를 유지해나갔습니다. 이 체코교회는 이후 후스 종교개혁의 상징이 된 분잔을 포함한 성만찬을 이어나갔고, 체코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는 전통을 확립하였으며 마침내 체코 전역이 후스파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도시에서는 프라하대학이 신학과 신앙적 근거를 마련하는 등 독자적 신앙의 길을 걸었으나 농촌지역에서는 과격한 행동에 의한 개혁이 진행되어 기성 교회에 대한 성직자 테러행위와 재산탈취 등이 자행되었고 점차 체코파는 폭력집단화 되었습니다. 그러자 상대진영인 가톨릭 또한 공격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체코 전역이 후스파가 되었으나 여전히 가톨릭 편에 서 있던 벤젤왕은 교황청과 지그문트 황제의 압력에 밀려 후스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419년에는 양 진영이 무력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2015년 5월 31일 방송
2015년은 한국교회로서는 기독교공식선교 130년을 맞는 해이며 종교개혁사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 6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때 ‘맛있는 교회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의 정신과 역사를 살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철목사로 대표되는 저항의 순교와 손양원목사로 대표되는 사랑의 순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본질을 잃고 위기에 직면한 이때에 교회 갱신을 위해 순교한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살피고 자성함으로써 백색순교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중세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권력 다툼이 내내 지속되던 시기였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로마제국의 몰락 등으로 세속권력이 교황권을 넘어서게 되자 마침내 교황권이 몰락하면서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 등장하게 되면서 점차 웅장한 건물과 피라미드 구조를 지닌 가시적 교회에서 벗어나 성도들이 공동체가 주를 이루는 비가시적 교회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는 주권재민으로 정치권력을 설명한 마르실리우스의 주장을 교회에 적용한 것으로서 결국 교회란 평신도 중심의 공의회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며 이에 따라 세속 군주와 귀족 등이 중심이 된 평신도 협의체 즉 공의회가 1414년에 열렸고 이후 교회 운영의 큰 방향이 되었습니다. 2. 체코 프라하의 종교개혁 체코 프라하의 종교개혁은 14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1세대인 그람시와 2세대인 야노브 그리고 3세대인 후스로 계승되었습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은 엘리트와 대중이 연합한 개혁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1세대 종교개혁자 그람시의 종교개혁 그람시는 고위 공무원 출신으로서 성직자의 타락을 목도하고 사직하여 설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주장했으며 교회갱신을 통해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함으로써 예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는 1372년 사회 하층민 300여명으로 교회 밖에 새로운 공동체인 새예루살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 교회에서 금기시되던 성만찬 중 분잔을 시행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매우 개혁적이며 파격적인 사건으로써 이에 따라 교황청이 그람시의 교황청 출두를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기 위해 교황청으로 가는 길에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 등 아픔을 통해 기독교가 확산되고 로마의 극심한 박해로 오히려 교회가 성장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서북지역 중심의 기독교는 서울과 피난지 부산으로 확산되는 등 전국으로 그 지경을 넓혀나갔으며 애통의 현장에서 회복을 꿈꾸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기독교의 중심 또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다양한 기독교가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고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석진영의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여러 단계에 걸쳐 숱한 발전과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간략히 표현하자면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다문화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 사회를 간략히 다문화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고 또한 이 시대 한국교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CCM ‘기대’는 주 안에서 하나 된 우리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찬송이라는 창을 통해 교회사를 바라보았는데, 교회사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찬송은 신앙의 고백이고 삶의 이야기이며 성도의 교제이고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정의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며 세상이 종말까지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존재들임을 나타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찬송이자 ‘찬송으로 보는 교회사’의 결론적 찬송은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기로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정립된 시기였으며 이 시기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 한편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전반부 한국교회는 출애굽의 하나님, 민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후반기 들어 교회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면서 고난 받은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변화되어 내면화되었습니다. 한편 신비주의 운동이 일면서 이단이 발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한국교회는 이미 평양대부흥운동과 장로교의 독노회, 총회 조직을 통해 전국적 체계를 갖춤으로써 민족운동을 내부에서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교회와 선교사의 분열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일제에 맞서 일부는 반일정서를 가지고, 일부는 교회와 선교의 유지를 위한 공존을 모색하며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그 가운데 함경도에서 선교한 로버트 그리어슨은 캐나다의 공식 파송 선교사로서 함경도 지역은 물론 멀리 유랑하는 조선인을 찾아 시베리아까지 찾아가 선교하는 폭넓은 선교를 37년간 계속했고 복음과 의료, 교육 모든 분야에서 반일 정서에 기반을 두어 선교하며 예수 사랑과 조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시대 신앙인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찬송으로 남궁억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편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받아 끝내 총회차원의 신사참배 결의를 하게 됩니다. 이는 일제의 ‘국가의식’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우상숭배로써 이후 한국교회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교단차원의 신사참배 결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난과 순교를 감당하며 신앙을 지킨 무리와 교회와 신앙의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무리 사이에 진정한 회개와 용서 그리고 화합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한국교회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한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치욕과 고난의 시기였으며 신사참배로 인한 배교와 일제 침략전쟁에 협조한 죄는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을 위해 반드시 회개하고 청산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 시기를 보여줄 거의 유일한 찬송으로 우리에게 전영택의 ‘어서 돌아오오’가 찬송가에 남겨져 있습니다.
구한말 한국교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오직 예수를 구주로 삼고 살았습니다. 당시 선교가 시작되던 때 우리 나라는 국권을 잃어 임금이 강제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었으나 하늘나라의 임금인 예수가 선포되고 하늘 군대인 교회가 설립되는 영적 회생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대부흥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내용과 형식을 갖춤으로써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낼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헌신했던 선교사들 중 홀 선교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 선교사 중 부인인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선교지 조선에서 잃고도 당시 가장 고통 받던 서북지역 여성 어린이 그 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여아를 위해 헌신한 특수 선교의 선구자였습니다. 기홀 병원을 지어 의료선교를 시작하였고 시각장애인 시설을 마련하여 봉사하였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교육받는 통합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헌신한 로제타 홀은 남편과 딸, 손자, 아들, 며느리와 함께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여섯 식구는 생전에 한 번도 같이 모여 생활한 적 없이 오직 자신의 생명을 드려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당시 서북지역에서 헌신한 스왈론 선교사의 찬송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양대부흥운동은 모진 고난의 시기를 견디도록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1890년 평양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하디는 선교비가 끊어지는 등 고난 가운데 사역했으니 실패하고 강원도로 이주하였으나 역시 그곳에서도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산의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여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하디의 고난과 회개 그리고 기쁨과 소망을 우리 겨레 전체의 것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를 위해 원근 각처에서 모여든 성도들에 의한 말씀운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열정 위에 하나님께서 회개의 은혜를 더하여 주셨고 그것이 기쁨으로 나타나 삶의 변화로 이어졌으며 날 연보를 비롯한 헌신에 이르러 마침내 대부흥운동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부흥운동은 교회의 연합을 촉진하여 교단 신문과 잡지 그리고 찬송가의 일치를 가져왔고 나아가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시켜 엄혹한 일제 강점기 36년을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찬송 ‘예수 나를 위하여’를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고난의 시기를 지나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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