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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목사의 직설/直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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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5 수요일.
제주도에서 동료 목사 일행이 방문하앴습니다. 전하는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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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태도는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인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극복하는 핵심적인 처방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발생하는 근원과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염려와 불안의 근원: 인간의 상상력
불안과 염려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내일을 생각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동물은 백 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사는 것이 똑같으며, 당장 배가 고픈 경험을 했으면서도 씨를 뿌리고 결실을 보는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 고통의 발생: 상상력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동물에게는 없는 고통, 즉 내일에 대한 염려와 삶에서 느끼는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 극복의 어려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와 달리, 우리는 내일을 상상하는 능력이 없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상상해 버린 내일을 상상하지 않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 키에르케고르의 관점: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불안을 숙명이라고 보았으며,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 즉 선택할 수 있기에 따르는 불안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벽 끝에 서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자유의 가능성)이 불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2. 염려와 불안에 대한 처방: 지금 여기에 집중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안고 살아야 하는 이 불안과 염려의 현실에 대해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 내일 일은 내일의 몫: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원문의 해석: 헬라어 원문(αὔριον μεριμνήσει αὑτῆς)에 따르면, 이 말은 염려가 '내일 그 자신의 몫' 이라는 의미입니다.
• 지금 여기에 사는 삶: 염려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며, **"나는 단지 지금 여기 살 뿐입니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서지 않으면 결코 불안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3. 염려 극복의 실천적 태도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태도는 미래를 통제하거나 예측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현재 존재의 자리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 내일의 상상을 믿지 않기: 우리가 지금 여기를 지키는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이 삶이 어떨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상상은 하되 상상한 그것을 믿지는 않아야 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며, 염려하는 모든 것(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오직 옳은 것을 구하는 삶: 지금 여기에 사는 삶은 단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옳지 않은가'만을 최고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일(나중)을 믿고 상상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옳은 것을 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 삶의 자리 인식: 삶의 자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이며, 우리가 구할 것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여기, 이 삶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 주시기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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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적 이해: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태도는, 마치 운전 중인 사람이 전방의 1미터만을 확실하게 보고 운전하며, 100km 떨어진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핸들을 바르게 잡는 데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목적지(미래)에 대한 상상은 계속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운전을 제어하는 것은 **이 순간의 옳은 행동(지금 여기)**이며,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미래)은 차량의 시스템(하나님의 섭리/아버지의 아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가
· 요.4,27~42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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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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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승화하면
·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라는 사실 인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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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한복음 4장 27-42절 분석
핵심 요약
본 문서는 요한복음 4장 27-42절을 중심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핵심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육체적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θέλημα, 델레마)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영적 양식이라는 것이다.
문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여인은 자신의 본래 목적인 '물을 긷는 행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새로운 사명을 받아들인다. 이는 육체적 필요(ἐπιθυμία, 에피뒤미아)가 하나님의 근본적인 원함(θέλημα, 델레마)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또한, 형식화되고 타락한 종교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 유대교의 제사 중심주의와 오늘날의 '교회주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조직이나 집합체가 되는 우상숭배적 행태를 지적한다. 참된 예배는 영(πνεῦμα, 프뉴마)과 사실(ἀλήθεια, 알레데이아)로 드리는 것이며, 거짓이 섞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영생(永生)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아버지를 앎으로써 이루어지는 현재적 사건임을 역설한다. 이 구원의 메시지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인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 예수는 특정 민족을 넘어선 '세상의 구주(σωτήρ, 소테르)'임이 선포된다.
1. 참된 예배의 본질: 제사주의와 교회주의 비판
본문은 참된 예배의 의미를 재정의하며 시작한다. 예배를 의미하는 원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즉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행위 그 자체이다.
타락한 제사 제도: 당시 성전 중심의 제사는 종교 세력(산헤드린)이 하나님을 가리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진실함이 결여된 제사였다.
예수의 제사 폐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제사 제도를 폐지했다. 이는 요한복음 2장 19절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으로 선포되었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 (교회주의):
일부 목회자들이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핑계로 대대로 이익을 취하려는 탐욕(ἐπιθυμία, 에피뒤미아)의 발현으로, 타락한 제사장들과 다를 바 없다.
예배당을 '성전'이라 칭하고 '일천 번제' 등을 언급하며 예배를 구약의 제사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교회'라는 집합체가 되는 '교회주의(全體主義)'가 만연해 있다. 이는 교회를 뒷배경으로 삼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참된 예배의 조건: 예수께서 제시한 참된 예배는 '영(πνεῦμα, 프뉴마)과 사실(ἀλήθεια, 알레데이아)로' 드리는 것이다. 사실은 거짓과 함께할 수 없으므로, 거짓이 섞인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2. 제자들의 침묵과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끝날 무렵 제자들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
제자들의 놀라움과 침묵:
제자들은 예수가 사마리아인, 그것도 여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ἐθαύμαζον, 에다우마존) 여겼다. 이는 유대인의 금기를 깨는 파격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께 질문하지 않았는데(οὐδεὶς μέντοι εἶπεν, 우데이스 멘토이 에이펜), 이는 궁금함을 압도하는 경외심 때문이었다. 신앙이란 '이해를 앞설 만한 경외에 따른 신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사마리아 여인의 극적인 변화: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던 본래의 목적을 잊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갔다. 이는 예수와의 대화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삶으로 인해 위축되었던 모습과 달리, 확신에 차고 당당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μήτι οὗτός ἐστιν ὁ χριστός)"고 증언했다.
여인의 확신에 찬 증언은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3. 두 가지 양식: 육체의 양식과 영적 양식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해 와 예수께 드렸지만, 예수는 이를 통해 더 근본적인 차원의 양식을 설명한다.
물리적 양식의 한계:
우물물과 제자들이 가져온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이는 고통을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책(臨時方便策)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
예수의 참된 양식: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양식(βρῶσις, 브로시스)'은 '먹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단어다.
이후 34절에서 예수는 "나의 양식(βρῶμα, 브로마)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밝힌다. 여기서 '양식(βρῶμα)'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실체로서의 음식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것은 물리적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θέλημα, 델레마) 그 자체이다.
4. 삶의 동력: 에피뒤미아(ἐπιθυμία)와 델레마(θέλημα)
인간의 삶은 '원하는 것'에 의해 움직인다. 본문은 이 '원함'을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구분 | 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 | 델레마 (θέλημα)
의미 | 육체가 원하는 것 | 본질(나)이 원하는 것
번역 | 소욕, 욕망 | 뜻, 원함
특징 | 태어날 때부터 먼저 발동하여 삶의 동력이 됨 | 하늘로부터 온 근본적인 원함.
결과 |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든 성취가 허사로 돌아감 | 하나님과 조우(遭遇)하게 하며 신성(神性)을 발동시킴.
승화의 과정: 인간은 육체의 욕망(에피뒤미아)을 삶의 동력으로 삼지만, 이는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신앙의 여정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근본적인 원함, 즉 '델레마(θέλημα)'를 인식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델레마'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의 신격화(神格化):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신의 존재'로 승화한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אֹלִהים, 엘로힘 - 복수형)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것은 신의 복수적 개념을 암시한다.
요한복음 10장 34-35절(시편 82편 6절 인용)에서 "내가 너희를 신(θεός, 데오스/ֱאֹלִהים, 엘로힘)이라 하였노라"는 구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격체(神格體)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외부의 대상(객체)으로 인식하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
5. 현재적 구원과 복음의 확장
구원과 영생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실적 사건이다.
현재적 종말론: 예수께서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심는 것이 거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영원의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이 사라지며, 구원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임을 보여준다. 지금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사후에도 이룰 수 없다.
삶의 유일한 의미: 이 삶이 의미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곧 영생을 깨닫는 것이다.
복음의 확장 (랄리아에서 로고스로):
39절에서 여인의 '말(λόγος, 로고스)'을 통해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 저자 요한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녀의 증언에 신적인 권위와 하나님의 뜻(델레마)이 담겨 있었음을 의미한다.
42절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λαλιά, 랄리아)로 인함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랄리아'는 일상적인 대화를 의미한다.
종합하면,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일상적인 말(랄리아) 속에서 신적인 말씀(로고스)을 발견했고, 이후 예수를 직접 만나 그 '로고스'를 확증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구주, 소테르(σωτήρ): 이 사건은 구원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요한은 예수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참으로 세상의 구주'임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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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 요.4,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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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승화하면
·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라는 사실 인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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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27절에서 42절의 내용을 강해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와 영생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적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설교자는 예배의 원어적 의미인 ‘프로스퀴네오’(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감)를 설명하며, 당시 성전 중심의 세속적 종교 행위(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한 제사 등)를 비판하고 교회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핵심 주제는 물리적 양식이나 육체의 소욕(에피뒤미아)이 아닌, 하나님의 뜻(델레마)을 행하는 것이 참된 생명의 양식이자 인간을 살게 하는 근본적인 방법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생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닌 현재적 사건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신적 본질의 회복임을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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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본질에 대하여 | 기독 신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 요.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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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가
·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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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본질을 향한 현대적 갈망과 신앙의 역할
'삶의 본질'이라는 근원적 질문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인간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본질'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핵심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핵심 전략이 되었습니다.
반도체 설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짐 켈러는 한때 함께 일했던 일론 머스크를 "본질을 빼고 다 버리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가 열광하는 미니멀리즘의 철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란 단순히 적게 소유하는 것을 넘어, '비움으로써 본질에 다가가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이는 어떤 것의 본질을 그것이 '아닌 것'을 제거함으로써 이해하려는 철학적 방법론(via negativa)과도 같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는 행위는 우리를 옭아매는 비본질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삶의 진짜 핵심을 발견하게 하는 강력한 방법론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우리를 하나의 중요한 질문으로 이끕니다. 그렇다면 신앙, 특히 기독교 신앙은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단순히 정해진 종교적 행위를 따르는 것을 넘어, 인간의 근원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밝히는 여정입니다.
2. 본질을 상실한 신앙의 현실
종교는 본래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을 탐구하는 길이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 본질에서 벗어나 외형적인 형식과 세속적 이익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진리를 찾는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탐구를 왜곡하고, 오히려 내면의 갈증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제가 다니는 면 소재지 미용실의 주인이 겪은 일화는 이러한 현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녀는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위로를 얻고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교회의 권사들이 찾아와 "이런 데서는 교회에 소속을 두어야 장사를 할 수 있다"며 교회 등록을 강권했다고 합니다. 전도라는 명목 아래 행해진 이 접근 방식은, 신앙을 내면의 탐구가 아닌 다른 것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과 충돌합니다. 종교의 본질은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조차 버리겠다'는 결단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잃고 형식과 이익만을 좇는 신앙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을 남깁니다. 수가 성의 한 여인이 예수 앞에서 토로했던 그 깊은 목마름은 바로 이러한 본질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3. 예배의 본질을 묻다: 장소에서 관계로의 전환
수가 성 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보여주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이 대화는 단순한 문답을 넘어, 예배의 개념을 장소와 형식의 문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근본적으로 재정의합니다.
이 대화의 무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의 배경에 깔린 깊은 역사적 상처를 알아야 합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이 동참을 요청했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을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스 4:3). 이 거절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낳았고,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322년경 그들의 성소인 그리심 산에 독자적인 성전을 세웠습니다. 약 200년간 두 성전은 경쟁적으로 공존하다, 기원전 110년경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가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두 민족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여인의 질문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0)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궁금증이 아닙니다. "어느 장소가 진짜 성전인가?"라는 질문은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이 걸린, 수백 년 묵은 갈등의 표출입니다. 이는 예배를 특정 '장소'와 정해진 '의식'의 문제로 한정하는 피상적 신앙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1)
여기서 원문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Πίστευέ μοι)"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믿음의 근거를 장소나 율법 조항에서 '예수 자신'이라는 인격으로 옮겨놓는 중대한 선언입니다. 또한 "때가 이르리라 (ἔρχεται ὥρα)"에서 동사 '이르다(ἔρχεται)'는 미래가 아닌 현재 시제입니다. 즉, 새로운 예배의 시대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 이미 시작했다는 폭발적인 선포입니다. 이로써 장소와 제물 중심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통로가 아님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제사(祭祀)'가 '예배(禮拜)'라는 개념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변화를 목격합니다. 영어 단어 'worship'이 때로 형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반면, 원어는 그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예배의 원어인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을 향하여 입맞추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는 제물이 오가는 거래적(transactional) 관계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과의 친밀한 인격적(relational) 관계와 속마음을 중시하는 내면적 행위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민족의 예배 방식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지적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요.4,22). 이는 유대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한 반면, 유대인은 율법서와 더불어 다양한 선지서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다각적인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한적인 계시는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이해를 제한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배의 장소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는 그 답을 '영과 진리'라는 두 개념에서 찾습니다.
4. 진정한 예배의 조건: 영(πνεῦμα)과 진리(ἀλήθεια)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원리를 응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선언입니다.
'진리(ἀλήθεια)'의 재해석: 삶의 현실을 직면하는 용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급진성을 파악하려면, 현대 철학적 정의를 넘어 성경 원어가 가진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진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추상적 교리나 심오한 이념이 아니라, 훨씬 더 실제적인 '삶의 적나라한 사실(reality)'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2)는 말씀은, 나의 삶이 처한 상황과 그 현실을 정직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남자도 내 남편이 아니라"는 자신의 삶의 부끄러운 사실(ἀλήθεια)을 있는 그대로 직시했을 때, 자신을 옭아매던 사회적 편견과 내면의 갈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 행위는, 이제 '살아있는 물'이신 예수를 만났기에 더 이상 낡고 불충분한 방법으로 자신의 갈증을 채우려 하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영(πνεῦμα)'의 역할 분석: 내면의 영을 깨우는 길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이 '영' 즉 '프뉴마(πνεῦμα)'는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과는 구분한는 '나의 영'을 가리킵니다. 이 나의 내면적 영은 독자적으로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진실(ἀλήθει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때 비로소 깨어나고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오직 나의 깨어난 영(πνεῦμα)만이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종합: 진정한 예배와 구원의 재정의
종합하여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사실(ἀλήθεια)을 정직하게 직면함으로써 깨어난 나의 내면적 영(πνεῦμα)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야말로 장소와 형식, 제물을 초월한 참된 예배의 본질입니다. 이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합니다. 구원을 뜻하는 '소테리아(σωτηρία)'는 흔히 오해하듯 단순히 죽음 이후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소테리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개념으로, '지금 이 삶에서' 육체의 헛된 욕망(ἐπιθυμία, 에피뒤미아)과 사회적 편견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삶의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 자유가 곧 구원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삶을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이론적 분석을 넘어, 이제 우리는 실천의 문제로 나아가야 합니다.
5. 결론: 본질을 살아내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
이 에세이의 논지를 종합하면,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행위는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가 흔히 던지는 "어떻게 하면 잘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본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짐 켈러가 말했듯, 본질이 아닌 것을 과감히 버릴 때 비로소 잘사는 방법이 드러납니다. 이는 삶의 현상에 매몰하지 않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자신의 삶의 사실(ἀλήθεια)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을 연습하라" (딤전.4,8)고 권면했습니다. 본질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바로 이 '경건의 연습'입니다.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실(ἀλήθεια)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자신의 내면적 영(πνεῦμα)을 단련하고, 이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심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삶의 실체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칩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며, 장소와 형식을 넘어선 참된 예배의 여정을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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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본질에 대하여 |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 요.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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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가
· 기독 신앙은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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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제로 다룹니다.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 신앙의 핵심이며, 이는 물질주의적 욕망(에피뒤미아)을 버리고 본질적인 원함(델레마)을 찾는 미니멀리즘적 접근과 유사합니다. 특히 예배의 참된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구약 시대의 제사가 아닌 영(프뉴마)과 진실(알레데이아/사실), 즉 내면이 사실의 상태로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짐 켈러가 일론 머스크에 대하여 말한 것을 인용하여 본질을 추구하는 태도를 예시로 듭니다. 구원(σωτηρία소테리아)은 현실적인 삶의 자유를 얻는 것이며 이는 삶이 이렇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있는 그대로 인식하므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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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존의 원함(θέλημα) | 삶이 이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 요.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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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실존이 실제로 원하는 것
·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을 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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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다시 보게 만드는 4가지 놀라운 통찰: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론: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대하여
"이렇게 사는 삶은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나름의 성취를 이루고, 부지런히 살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이것이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일까?" 하는 질문이 조용히 고개를 들 때, 우리는 삶의 근원적인 목마름과 마주합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놀랍도록 날카롭고 깊이 있는 답변을 찾아보려 합니다.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향한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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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 안에는 두 가지 '원함'이 있습니다: 충동적 욕망(에피뒤미아)과 본질적 원함(델레마)
우리가 일상적으로 '원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성경이 구분하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성숙의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첫 번째는 에피뒤미아(ἐπιθυμία)입니다. 이는 ‘위에(ἐπί)’라는 말과 ‘열정(θυμός)’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감정이 위로 확 치밀어 오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본능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욕망입니다. 성경은 이를 '육체의 욕심' 또는 '소욕'이라 번역했는데, 이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살덩이(σάρξ사르크스) 자체가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는 델레마(θέλημα)입니다. 이는 이성적이고 결단적인 의지이며, '나의 실존'이 진정으로 바라는 본질적인 원함입니다. 마음의 방향이 정해진 의지, 즉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 향하는 방향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 원함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 대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내면의 전쟁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영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갈라디아서 5:16-17
여기서 우리는 흔히 '영을 따라 행하라'는 말을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이해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지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프뉴마 하기온)이 아닌, 그냥 '영(πνεῦμα프뉴마)'입니다. 이 통찰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싸움의 첫 단계는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나의 영'의 결단입니다. 육체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 그 요구를 '나의 진짜 원함이 아니다'라고 알아차리고 저항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영(πνεῦμα)'이 깨어나 행하는 첫 번째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신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치열한 내적 싸움에서 나의 영이 육체를 이겨낼 때, 비로소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과 교감할 수 있는 상태에 이릅니다.
육체의 요구를 나의 진정한 원함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 바로 이 영적 분별과 결단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2. 수가성 여인의 진짜 문제: 그녀는 '죄인'이 아니라 '목마른 영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원함'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녀를 남편을 다섯이나 둔 부도덕한 여인으로 단죄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녀의 진짜 문제는 '죄'가 아니라, 채울 수 없는 깊은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자신의 본질적 원함(델레마)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대상을 바꾸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택했던 남편들은 일시적 갈증을 해소해 줄 뿐인 충동적 욕망(에피뒤미아)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물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시는 순간에는 갈증이 해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더 큰 목마름이 찾아오는 끝없는 반복. 그녀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이 근원적인 목마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해결책인 '생수'를 제안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한복음 4:14
예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을 때, 여인의 대답은 그녀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영적 각성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것은 사실을 숨기려는 거짓말이나 회피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이 말을 "참되다(ἀληθής알레데스)"고 인정하십니다. 그녀는 그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실존적 진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다섯 명의 남편 중 누구도 자신의 근원적 목마름(델레마)을 채워주는 진정한 의미의 '남편'이 될 수 없었음을, 예수의 말씀 앞에서 비로소 깨닫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영혼 안에서 생수가 솟아나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습니다.
3. 예수의 제자들도 놓쳤던 핵심: 우리가 오늘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
이처럼 본질적인 삶의 전환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깊은 오해 속에 있었는지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을 목격한 직후에 던진 질문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사도행전 1:6).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다윗 왕국의 회복'이라는 지상적 목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강력한 '자기 관념'의 틀 때문이었습니다. 이 견고한 생각의 틀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을 때조차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벽이었습니다.
이 자기 관념의 비극은 예수 승천 이후 더욱 명확해집니다. 방향을 잃은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지도 않은 일, 즉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행정적인 일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그냥 할 일이 없었던 겁니다." 영적인 목적을 상실하자 익숙한 세상의 방식으로 공백을 메우려 했습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섬뜩하게 닮아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이라는 삶의 근본적인 질적 전환보다, 눈에 보이는 현세의 '복'—자녀의 성공, 사업의 번창, 무병장수—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는 '자기 관념'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이 '다윗의 나라'라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듯, 우리도 우리의 왕국을 세워줄 현세적 해결사를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4. '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이정표입니다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 경험하는 '복'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복의 진정한 역할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모든 좋은 것들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메이온(σημεῖον)', 즉 '표시' 또는 '이정표'입니다.
이 이정표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는 무엇일까요? 바로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다른 차원의 삶,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시작하는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입니다. 삶에서 복을 받는 경험은 그 복 자체에 안주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고 그분을 향해 더 깊이 나아가라는 강력한 초대장입니다.
이정표를 목적지로 착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우리는 정작 그 길이 향하던 영원한 생명의 목적지를 놓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아니라면 그저 유한한 목마름의 연장일 뿐입니다. 복은 감사히 받되,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복 너머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복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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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당신의 삶은 어떤 '목마름'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내면에는 충동적인 '욕망(에피뒤미아)'과 근원적인 '원함(델레마)'이 끊임없이 공존하며 싸웁니다.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에서 보았듯, 진정한 만족과 해갈은 일시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 원함을 따를 때,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생수를 만날 때 비로소 시작합니다.
당신은 매일 어떤 물을 길으러 가고 있습니까? 마셔도 다시 목마른 물입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입니까? 당신의 삶이 진정으로 향하는 그 '목마름'이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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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실존이 원함(θέλημα) | 갈증이 없는 삶을 위하여
· 요.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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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실존이 실제로 원하는 것
·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을 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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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적 실존과 구원의 본질에 대해 논하는 강론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인간 실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θέλημα, 이성적 의지)이 육체의 욕망(ἐπιθυμία, 충동적 욕망)과 대립하며, 이는 곧 영(πνεῦμα)을 따라 행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ὕδωρ ζῶν), 즉 영생을 이해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세례나 성전(그리심 산 대 예루살렘)과 같은 외적인 종교 행위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아는 삶이 진정한 목적임을 역설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독자들에게 죽음으로 끝나는 현세적인 삶이 아닌 영생하는 삶을 지금 추구할 것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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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믿고 싶은가 | 우리는 어떤 메시아(מָשִׁיחַ)를 기대하는가
·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기초하는가
· 요.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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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사상과 영생에 관한 심층 분석: 요한복음 3장 31-36절 강해
핵심 요약
본 문서는 성경 이해의 핵심 열쇠인 '메시아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본질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요한복음 3장 31-36절을 심층적으로 해설한다. 문서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메시아 사상의 본질: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 국가를 상실한 역사적 고통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핵심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다윗 왕국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구원자, 즉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대망이었다.
초기 공동체의 오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세례 요한조차도 이러한 시대적 관념의 한계 속에서 예수님을 이해했다. 제자들은 부활 이후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사도행전 1:6)라고 질문할 정도로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신약 시대의 전환점: 진정한 신약 시대는 사도행전 2장 4절의 성령 체험을 통해 시작된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넘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육체(σάρξ)의 요구가 아닌 영(πνεῦμα)의 요구를 따르는 존재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요한복음의 핵심 신학: 요한복음 3장 31-36절은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오신 이'로 규정하며, 땅에서 난 모든 인간과 근본적으로 구별한다. 예수님의 증언은 하나님의 진리를 담보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의 본질이다.
영생의 의미: 영생은 단순히 사후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생명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관계적으로 알아가는 것(γινώσκω)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인격, 즉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그의 삶 전체를 믿는 것을 통해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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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시아 사상의 이해: 성경 해석의 열쇠
성경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는 메시아 사상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가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있다.
1.1. 시대적 배경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는 로마의 지배와 성전의 타락으로 인해 사회가 극도로 혼탁했다. 백성들은 기댈 곳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뒤엎을 메시아가 오리라는 희망에 의지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회개를 촉구하자 수많은 사람이 그를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따랐다.
1.2. 메시아 사상의 역사적 전개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시대가 아닌, 왕국의 멸망과 함께 시작되었다.
왕국의 형성 및 분열: 사울 왕을 시작으로 다윗 왕 때 기틀이 잡힌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나 다윗 왕가는 한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 시드기야 왕 때 바빌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다윗 왕가의 맥이 끊겼다. 이때부터 '왕국의 회복'이 민족의 핵심적인 소망으로 자리 잡았다.
페르시아 시대 (BC 538-333):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고레스 왕의 관용 정책으로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으나 독립 국가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스룹바벨, 느헤미야 등을 중심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신앙 공동체' 의식 강화에서 찾으려 했다.
헬레니즘 시대 (BC 333-167):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유다는 그리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알렉산더 사후 제국이 분열되면서 유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집트)와 셀류쿠스 왕조(시리아) 사이의 전쟁터로 전락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우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
하스모니안 왕조 (BC 167-63): 마카비 혁명으로 약 80년간 독립 왕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이 정치와 종교 권력을 독점했고, 후계자들 간의 권력 다툼은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로마 시대 (BC 63~ ):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헤롯이 로마의 승인 하에 분봉왕으로 통치했으나, 그의 사후 아들 아켈라오의 폭정으로 인해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 통치령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유대인의 왕'(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이라는 칭호는 단순한 호칭을 넘어 로마 제국의 질서에 대한 정치적 도전의 의미를 담게 되었다. 메시아 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다.
2. 초기 공동체의 오해와 신약 시대의 시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던 세례 요한조차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례 요한의 의심: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전해 듣고,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다고 느꼈다. 그는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누가복음 7:19)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누가복음 7:23)라고 답하며 요한이 실족했음을 암시했다. 예수님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이'라고 칭찬하시면서도, 그가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임을 분명히 하셨다.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기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제자들의 오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며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사도행전 1:6)라고 질문했다. 이는 그들의 인식이 여전히 다윗 왕국의 재건이라는 정치적 메시아상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약 시대의 개막: 진정한 신약 시대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시작된다. 성령 체험은 '나는 없다'는 자기 부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기다려온 나라가 지상의 왕국이 아님을 깨닫고 변화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성경과 무관한 자신들의 관념을 믿는 교회의 모습과 비교될 수 있다.
3. 육(σάρξ)과 영(πνεῦμα)의 대립
성령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자기 존재의 판단 기준이 육체의 요구(σάρξ)에서 영의 요구(πνεῦμα)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인간 존재 내면의 투쟁을 묘사한다. 거룩한 영(πνεῦμα ἅγιον)이 내 안에서 역사할 때, 나의 영(πνεῦμα)이 되살아나 육체의 요구를 인식하고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영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자신의 요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아는 데 있다.
유대인이 생각한 메시아는 현실의 왕이었고, 오늘날 일부 교회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현실과 무관한 관념적 존재이다. 두 관점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4. 요한복음 3장 31-36절 심층 분석
이 본문은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의 본질을 증언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님의 신적 기원 (31절):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이'(ἄνωθεν)로서 '땅에서 난 이'인 모든 인간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는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요한복음 3:6)라는 말씀과 연결되며, 예수님께서 육체(σάρξ)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영(πνεῦμα)적 존재이심을 강조한다.
증언과 수용 (32-33절):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ὃ ἑώρακεν καὶ ἤκουσεν)을 증언(μαρτυρία)하신다.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다'(ἐσφράγισεν), 즉 확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는 말의 핵심이다. 의인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믿음의 본질: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진실', '확실함'을 뜻하는 '아멘'(ָאֵמן)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헬라어로는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 즉 '사실'에 해당한다. 따라서 믿음은 맹목적인 신념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삶의 태도이다.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익과 육체의 요구가 아닌, 사실과 진리에 기반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성령과 신성 (34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그 영'(τὸ πνεῦμα)을 한량없이 주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이 온전히 거할 수 있는 신성(神性)을 갖추신 분임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한복음 1:14)는 선언과 같은 맥락이다.
아들의 절대적 권위 (35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라는 구절은 요한 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 안에서 본질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적은 곧 하나님의 행적과 동일하다.
영생의 길 (36절):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선언은 이러한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이다. 믿음은 단순한 인식을 넘어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5. 영생(永生)의 개념과 믿음의 의미
영생의 본질: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영생은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복음 17:3)이다.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는 지적 동의를 넘어선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앎을 의미한다. 즉,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맺는 '생명의 연합'이자 '삶의 연합'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인격'을 믿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격은 그가 무엇을 가치로 삼고 살았는가로 드러난다. 예수님의 인격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다'라는 하나의 가치로 일관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삶과 인격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관계적으로 알아가며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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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아(מָשִׁיחַ)의 탄생 | 구세주(메시아) 사상은 어떻게 생겨나 발전했는가
· 요.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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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기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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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구약 시대부터 이어져 온 메시아 사상과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회복에 대한 소망을 설명하며 시작합니다.
저자는 세례 요한이 위대했지만, 예수님이야말로 하늘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땅의 것에 속한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영생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임을 신학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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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 세팅 문제로 음질이 좋지 않습니다.]
·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왔던가 | 요한 공동체 또는 예수 공동체
· 요.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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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예수님보다 유명했던 세례 요한에 대한 다섯 가지 사실
소개: 오프닝 액트 아니면 메인 이벤트?
우리는 보통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오프닝 공연’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는 주인공인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 무대를 잠시 데우는 역할, 즉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로 기억합니다. 성경의 최종 결론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관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함께 활동하던 1세기 유대의 역사적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고 드라마틱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자체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슈퍼스타였고, 그의 인기는 한때 예수님의 인기를 압도할 정도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에 숨겨진 다섯 가지 사실을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이 사실들은 왜 초기 교회가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정리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이 과정이 성경을 어떻게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1. 당시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더 큰 '슈퍼스타'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무려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암흑기’ 끝에 그가 홀연히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회개를 외쳤는데, 이는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로 존경받던 엘리야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고, 사회 전체가 그를 주목했습니다. 그의 존재감은 너무나도 메시아적이어서, 당시 최고 종교 권력 기관이었던 산헤드린조차 조사단을 파견해 그가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인지 심각하게 물었을 정도였습니다. 요한 자신이 직접 부인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그를 그리스도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질문 자체가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합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한복음 1장 20절)
2. '요한 공동체'는 오랫동안 '예수 공동체'와 경쟁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는 ‘요한 공동체’라는 뚜렷한 그룹을 형성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든 ‘예수 공동체’와 상당 기간 동안 양립하며 존재했습니다. 성경은 그 증거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 파’(Apollos Faction)라는 분파가 생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지도자 아볼로는 처음에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8장 25절). 이는 요한의 가르침이 당시 교회 내 유력 인사들에게까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요한의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의 존재는 들어본 적도 없는 제자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사도행전 19장 1-3절).
이는 세례 요한에 대한 충성심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까지도 계속 이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선포해야 했던 초기 교회에게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3. 사람들은 '구원자'가 아닌 '해방자 왕'을 기다렸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이 이해했던 ‘구원’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죄(ἁμαρτία)로부터의 구원과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 즉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히브리어: מָשִׁיחַ, 헬라어: Χριστός)는 죄(ἁμαρτία:)를 사하는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처럼 강력한 힘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정상적인 유대인의 왕국’을 회복할 현세적인 인물, 곧 왕을 갈망했습니다.
이 오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예수님의 제자에게서도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모두 목격한 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해방을 기대하며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사도행전 1장 6절)
4. 요한복음은 이 '라이벌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당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던 ‘요한 운동’으로 인해 ‘본질이 아닌 것이 본질보다 관심을 더 끄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시하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명확히 설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요한복음의 전략은 매우 명확합니다.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라이벌이 아닌,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증언자’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은 독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각인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는 성경이 단순히 추상적인 교리를 나열한 책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구체적인 도전들에 응답하며 공동체의 신앙을 형성해 나간 역동적인 기록임을 보여줍니다.
5.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러한 모든 경쟁 구도와 신학적 논쟁을 종결시키는 결정적인 한마디는 바로 세례 요한 자신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 말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을 넘어, 두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합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예수님)이며, 신랑의 친구(세례 요한)의 역할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기쁨은 신랑이 신부(하나님의 백성)를 얻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고 주인공인 신랑이 기뻐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신랑 친구의 기쁨’입니다. 자신의 사명이 끝나고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마땅히 받아야 할 주인공에게 넘겨주는, 역할 완수자의 충만한 기쁨인 것입니다.
요한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의 사명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자신을 따르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공식적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장 30절)
결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인간적인 이야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복음서의 이야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인 현실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안에는 당대의 오해와 경쟁, 그리고 점진적인 깨달음의 과정이 생생하게 녹아 있습니다.
초기 제자들조차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안 지금,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익숙한 생각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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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메시아? | 요한 공동체 vs 예수 공동체
· 요.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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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22~30절 본문을 중심으로 세례 요한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강해입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할 당시 유대 사회의 배경을 제시하며, 그가 400년 만에 나타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로 여겨졌기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요한 공동체가 예수님 승천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재했기에,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쓰면서 세례 요한의 이미지를 정리하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했음을 논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세례 요한이 자신을 주인공이 아닌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로 규정했으며, 독자들에게는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님께 초점을 맞출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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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믿어도 될까 | 從心所欲不踰矩 | 사실(ἀλήθεια)과 자유
· 요.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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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란 무엇인가
· 사실의 삶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 영(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이 드러나게 하려면
· 영의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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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본 영생과 심판의 현재성: 현대 한국 교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
서론: 문제 제기
현대 한국 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강단은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는 탐욕의 메시지로 채워지고, 신앙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 이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복음에 대한 관심은 실종되었고, 목회자들은 교회를 등진 채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이용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교회가 복음의 핵심 가치인 '영생'의 참된 의미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세상의 가치에 잠식당한 교회는 신앙의 본질을 잃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신학적으로 깊이 재탐구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이 말씀은 단순히 구원의 공식을 나열한 주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영생'과 '심판'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개념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통속적인 이해를 넘어 이 개념들의 본질적 의미를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현대 교회의 병리 현상을 진단하고 치유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본 에세이는 설교 본문에 제시된 핵심 헬라어 개념들을 분석의 도구로 삼고자 한다. 인간 내면의 영적 실체인 '프뉴마(πνεῦμα)', 구원의 유일한 길을 의미하는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ὴς)', 그리고 삶의 기준이 되는 사실 그 자체를 뜻하는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과 심판의 '현재성'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1. 영적 위기의 근원: 영(πνεῦμα)과 육체의 갈등
모든 신앙적 고뇌의 근원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영(πνεῦμα)'과 '육체(σάρξ)'의 근본적인 대립에 있다. 이 내면의 갈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직면한 문제의 뿌리를 진단하는 출발점이다. 교회가 물질주의와 정치적 편향성에 매몰되는 현상은 결국 이 영적 투쟁에서 육체가 승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서 이 갈등의 핵심을 명확히 제시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영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프뉴마, πνεῦμα)'을 무조건 '성령聖靈'으로만 번역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헬라어 'πνεῦμα'는 본래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바울의 권면은 외부에서 오는 성령의 능력에만 의존하라는 수동적 명령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내재한 영적 실체, 즉 '나의 영'을 깨워 그 인도를 따라 살라는 능동적 촉구에 가깝다.
문제는 '육체의 소욕'이 끊임없이 이 영을 거스른다는 점이다. '육체가 전부인 줄 알고 육체를 좇아 사는 삶'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기괴한 모습에서 구체적으로 발현된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트럼프가 구하러 오기를 기도하고, 워싱턴까지 날아가 자국 대통령을 내쫓아 달라고 외국 지도자에게 애원한다. 자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미국의 무역 정책(현대차 조지아 공장 사태)에 박수를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보수 논객이 이를 두고 "그들이 무슨 보수냐, 매국노지"라고 일갈했을 정도다. 이는 영의 요구를 묵살하고 육체의 본능적 욕망—생존과 이익 추구—에 굴복한 명백한 증거다. 복음을 자신의 정치적, 물질적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외식'이며, 영적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독소와 같다.
진정한 신앙적 자유는 육체의 요구를 무분별하게 따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면의 영을 살려내어 하나님의 뜻과 나의 원함이 일치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이 주체가 되는 삶이야말로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영생'의 참된 모습이며,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탐구할 주제이다.
2.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의 재해석: 관계적 삶으로서의 구원
'영생'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이지만, 그 의미는 종종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통속적 이해에 머물러왔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라는 양적 개념을 넘어, 삶의 질적 변화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미래의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꾸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최대의 난제가 되는 이유는 자신의 주체를 '육체'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 내 안에 본디 심겨 있던 영(πνεῦμα)을 살려내고 그것을 나의 참된 주체로 인식하게 될 때, 육신의 죽음은 더 이상 근본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의 중심이 된 사람에게 육체의 소멸은 존재의 끝이 될 수 없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이 깊은 영생의 차원에 대한 관심 없이, 오직 땅의 것, 즉 '육체가 주는 희망'에 집착한다는 점에 있다. 육체가 주는 희망은 본질적으로 소유에 기반한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혹은 가진 것을 지키려는 불안 속에서 신앙은 결국 공허함에 이를 수밖에 없다. 육체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덜 가졌거나 다 가졌거나 그게 그거"인 상태로 귀결할 뿐이다. 더 가질 능력이 없거나, 혹은 모든 것을 다 가져버렸을 때,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 이것이 육체를 따른 삶의 필연적 종착지이며, 바로 이 절망의 지점에서 우리는 영생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급진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영생은 소유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이다. 그것은 육체의 요구에 휘둘리는 삶이 아닌, 하나님과의 교감 속에서 영이 주도하는 다른 차원의 삶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생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셨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구원의 유일한 길로 인도한다.
3. 구원의 유일한 길: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삶을 주시기 위해 제시하신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독생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구원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많은 오해를 낳았던 이 단어는 혈연적 관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구원 계획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독생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모노게네스 휘오스(μονογενὴς υἱός)'이다. '모노(mono)'는 '유일한, 하나'를, '게네스(genēs)'는 '종류, 기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노게네스'는 하나님이 아들을 단 한 명만 낳았다는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기능적 의미를 갖는다. 전광훈 목사가 자기 아들을 '독생자'라고 칭했을 때 신학적 무지와 자기 욕망이 드러났듯, 이 단어는 혈연적 유일성이 아닌 구원 계획의 유일성을 가리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수많은 자녀들 가운데서,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하여 온전한 자녀로 나아가게 할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자 '특별한 계획' 그 자체이신 분이다.
이 개념은 구약의 '놋뱀 사건'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은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는 의학적 이치에 맞지 않는 비상식적인 처방이었다. 따라서 놋뱀을 쳐다보는 행위의 핵심은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성과 합리적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믿음의 결단,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본질이다. 이처럼 예수라는 '유일한 방법(μονογενής)'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구원의 길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길만을 따르는 행위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λόγος로고스)이자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일한 길을 거부하는 자, 즉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가? 이는 우리를 심판의 문제로 이끈다.
4. 심판의 현재성: '크리시스'(κρίσις)와 '케크리타이'(κέκριται)
일반적으로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미래의 사건으로 인식되지만,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요한에게 심판은 먼 미래에 기다리는 두려운 이벤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인해 이미 시작된 '현재적 사건'이다. 빛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심판은 이미 개시되었다.
이러한 심판의 현재성은 요한복음 3장 18절의 선언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헬라어 원문에서 '케크리타이(κέκριται)'라는 완료형 동사로 쓰였다. 헬라어의 완료형은 과거에 일어난 행위가 현재까지 지속적인 결과를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이 '이미 완료되어 그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종말과 심판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예수에 대한 우리의 반응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현실이다.
더 나아가 '심판'으로 번역된 '크리시스(κρίσις)'의 본래 의미는 '판단' 또는 '분리'이다. 예수라는 절대적인 빛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빛에 속한 것과 어둠에 속한 것은 필연적으로 분리된다. 각자의 행위와 소속이 명백히 드러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크리시스', 즉 심판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뒤엎으신 이유는, 그 부패한 장소를 가만두었다가는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빛은 거짓을 폭로하고 분리시킨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하신 예수를 거부하는 행위는, 스스로 어둠에 속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그 순간 이미 심판의 상태, 즉 하나님과의 분리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종말과 심판은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이다.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현재적 결단이 곧 영생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를 거부하는 현재적 불신이 곧 심판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생명의 빛이신 예수를 거부하고 스스로 심판의 상태인 어둠을 선택하는 것인가?
5. 심판의 근거: 빛과 어둠, 그리고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추구
사람들이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선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기저에는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어떻게든 자신을 보존하려는 생물학적 유기체(有機體)의 자기중심적 생존 본능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 심리적 기제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서 원형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숨는 행위'는 복잡한 도덕적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는 유기체의 본능적 반응이었다. 무언가 감춰야만 할 것이 있을 때, 이익 관계가 걸려 있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이것이 바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 이유이다.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고 존재의 기반을 위협하는 빛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둠의 행위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 바로 '진리를 좇는 자'의 태도이다. 여기서 '진리'로 번역한 헬라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도리가 아니다. 빌라도가 예수의 재판정에서 "진리가 무엇이냐(τί ἐστιν ἀλήθεια)?"라고 물었을 때, 그는 철학적 담론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fact)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처럼 '알레데이아'의 핵심 의미는 '사실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실재'이다.
따라서 '알레데이아를 행한다(ποιῶν τὴν ἀλήθειαν)'는 것은, 신비로운 영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마이크를 마이크로, 카메라를 카메라로, 의자를 의자로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무슨 이득을 취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일단 접어두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져 사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사실'을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생존 본능에 속박된 생물학적 유기체를 넘어,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감하는 영적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을 마주할 용기, 그것이 바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문이다.
결론: 사실을 따르는 삶, 지금 여기의 영생
본 에세이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중심으로, 영생이란 죽음 이후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과의 현재적 관계이며, 심판이란 그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초래된 현재적 분리 상태임을 논증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 있음을 의미한다.
'푸뉴마', '모노게네스', '알레데이아'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의 분석은 현대 한국 교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을 명확히 조명한다. 교회가 물질주의와 정치적 편향성에 빠져드는 것은, 결국 내면의 영('푸뉴마')의 소리를 억누르고 '이익'을 '사실('알레데이아')'보다 우선시하는 육체의 본능적 욕망을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유일한 길('모노게네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정치적, 물질적 탐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제 현대 신앙인과 한국 교회는 실존적 결단 앞에 서 있다.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학적 유기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이익이 아닌 '사실'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치열한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 교감하는 영적 존재가 될 것인가. 자기 생각과 이익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오직 '사실'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인 예수를 따르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육체의 본능을 넘어 영을 살리고, '지금 여기서' 영생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참된 신앙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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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믿어도 될까 | 從心所欲不踰矩 | 사실(ἀλήθεια)과 자유
· 요.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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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란 무엇인가
· 사실의 삶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 영(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이 드러나게 하려면
· 영의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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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영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설교 녹취록 발췌문입니다. 설교자는 기독교 신앙인이 평생 해결해야 할 난제는 '하나님을 믿어도 될까'라는 의문이라 언급하며, 참된 신앙은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독생자의 의미를 재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λόγος로고스)을 실현할 유일한 분임을 설명합니다. 궁극적으로 설교는 신앙의 핵심 가치인 영생을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실(ἀλήθεια알레데이아)을 좇아 사는 삶으로 실현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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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 지루하지 않을까 | 무엇을 영(πνεῦμα)이라고 하는가
· 요.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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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 | 끝없이 살아서 뭐하게? 지루하지 않을까?
· 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
· 바람과 영이 무엇이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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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에 대해 우리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5가지 사실
인생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손에 쥔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부와 명예, 권력을 넘어 인간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삶’일지 모릅니다. 죽음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는 소망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욕망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영생'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흔히 무엇을 떠올립니까? 대부분은 단순히 '죽지 않고 아주 오래 사는 것'을 상상합니다. 첨단 과학 기술로 수명을 150세, 200세까지 연장하는 미래를 그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이처럼 단순한 시간의 연장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깊고 충격적인 차원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영생에 대해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그 놀라운 진실 5가지를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영원히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 있다
절대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불멸을 꿈꿉니다. 고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헤맸듯, 현대의 권력자들 역시 과학 기술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합니다. 최근 시진핑과 푸틴의 사적인 대화가 언론에 포착되었습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인간의 장기를 끊임없이 이식하며 150살까지, 심지어 불멸에 이를 수 있다는 기대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영생이란 '불로장생', 즉 육체의 소멸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 삶이 과연 축복일까요? 처음에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기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은 점차 빛을 잃고 지루함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결국 끝없는 권태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고,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먼 미래의 법정 최고형은 사형이 아니라 '마음대로 죽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이유는 '죽음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한하기에 현재의 순간이 소중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한 동력이 생겨납니다. 죽음이 사라진다면 삶의 의미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2. '영생'은 죽음 이후가 아닌, 바로 지금 시작되는 '삶의 방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시간의 '양'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래 사는 것(longevity)'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a different way of being)'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의 상태입니다.
요한복음은 영생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여기서 '안다'는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단순히 머리로 정보를 이해하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이는 부부가 서로를 알듯,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생이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영생을 얻는 길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
세상의 방식은 성공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쌓아가는 '더하기'의 법칙을 따릅니다. 하지만 영생으로 가는 길은 정반대입니다. 부와 명예, 율법적 의까지 모든 것을 가졌던 한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관리가 바로 니고데모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모든 것을 가졌던 그는 이 한 가지, 즉 '내려놓음'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누가복음 18장 23절)
성경은 그가 '심히 근심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심히 근심하다'는 헬라어로 '페릴리포스(perilypos)'인데, 이는 단순한 실망을 넘어 '극도로 슬픈 상태', 영혼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굳게 붙들고 있던 육체의 소욕, 즉 세상의 것들이 영생의 문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깨달은 데서 오는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더 가지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세상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 '빼기'의 역설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4. '거듭남'은 신비한 체험이 아닌, 세상을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예수님은 '거듭남(하늘로부터 태어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체험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인식하는 '관점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바람과 영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πνεῦμα)'로, 바람과 영을 동시에 뜻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분명히 존재함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 즉 세상을 보는 눈과 삶을 해석하는 의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경에서 '성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단순히 '푸뉴마(영)'일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오는 어떤 신비한 힘이라기보다, 우리 안에 본래부터 있는 하나님과 통하는 생명의 원리로서의 '영'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바로 이 내면의 영이 깨어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자아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5. 믿음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처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그들의 상태를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기록하지만, 원문은 훨씬 더 본질적인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 백성의 네페쉬(נֶפֶשׁ)가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네페쉬'는 혼 또는 목숨의 숨결을 의미하는데, 그들의 영혼의 호흡이 가빠지고 인내심이 바닥나, 삶 자체가 지긋지긋해진 실존적 탈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처방은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독이 온몸에 퍼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놋 조각을 쳐다본다고 낫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바로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의 차이입니다. '땅의 일'은 합리적인 해독제나 의학적 치료 같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기반한 해결책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늘의 일'이었습니다. 이치를 따지며 버티는 자는 죽었고, 말도 안 되는 처방을 신뢰하고 쳐다본 자는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것의 본질, 즉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결론: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무한한 시간의 연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며,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역설적인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영생은 끝없는 삶이라는 저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알아가는 축복이며, '더하기'가 아닌 '빼기'를 통해, '관점의 전환'을 통해, 그리고 '비합리적인 신뢰'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결국 질문은 이것 하나로 귀결됩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눈에 보이는 육체의 요구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관계 맺는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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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 지루하지 않을까 | 무엇을 영(πνεῦμα)이라고 하는가
· 요.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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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살아서 뭐하게?
· 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질
· 바람과 영이 무엇이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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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에 나타난 영생의 개념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합니다. 영생이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의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던 니고데모와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한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주요 예시로 사용되어, 현세적 삶에 매이지 않고 영(πνεῦμα)을 따라 사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구약 성경의 광야의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믿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명하며, 청중에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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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요.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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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삶을 깨달으면
· 하나님께서 이 삶에 관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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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이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나의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알아차릴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살아가며, 부족함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느낍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고통과 허전함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삶의 근원이자 제일 원인인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삶의 억울함을 해소할 수 없는 상황,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드물며,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한계를 느끼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갈구합니다.
2. 삶의 고통과 욕망은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삶의 고통과 욕망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중요한 동기입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가 고통의 다른 모습일 수 있으며, 희망과 절망 모두 고통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즉 "이럴 수 없는 일"이라는 본질적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의구심은 삶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깨닫게 하고, 결국 이 삶 너머의 무한한 세계, 즉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는 이 세상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3. 기독교와 불교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왔나요?
기독교와 불교는 공통적으로 "삶이 이렇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불교는 삶의 이치를 따져 깨달음으로 고통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붓다, 달마, 혜능, 지눌, 성철로 이어지는 불교의 계보는 "삶을 깨닫자"는 치열한 여정을 보여주며, 돈오(頓悟, 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 점진적 수행)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삶의 "제일 원인"을 하나님으로 특정하고, 그 하나님을 통해 삶의 의구심을 풀고자 합니다. 깨달음은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수긍하며 본질을 추구하게 만드는 태도로 해석됩니다.
4. 니고데모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명문 거족 출신으로, 부유하고 헬라-로마 세계와 연관이 깊은 유대인의 지도자, 즉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삶 너머의 것을 생각하는 사색적인 인물이었으며, 정의로웠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당시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해서라기보다는, 타인의 방해 없이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해석됩니다. 낮과 밤의 사회적 역할이 달랐던 시대에,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탐색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행적, 특히 '표적(σημεῖον세메이온)'을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을 인식했음을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단순히 기적 자체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기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목적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을 알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알다(에이도)'는 단순히 '보다'를 넘어 '깨닫다'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6.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γεννηθῇ ἄνωθεν겐네데 아노덴)"은 단순히 반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ἄνωθεν아노덴'은 "위로부터, 위에서, 근원부터"라는 뜻으로,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를 통해 육체적으로 한 번 태어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의지와 영(πνεῦμα프뉴마)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영'은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인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즉, 거듭남은 단순히 두 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지하고 그분과 관계 맺는 영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7.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능력은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3절)" "들어갈 수 없다(5절)"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바실레이아 두 데움)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능력(δύναμαι뒤나마이)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능력은 육체적인 삶을 통해 육체를 넘어 하나님을 의식하고 알아차릴 때 생겨납니다. 즉, 삶의 모든 사건과 경험 속에서 그 이면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체는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의식을 잉태하는 요람과 같으며, 인생은 이 육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는 여정입니다. 이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8.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잠언 3장 6절의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에서 '인정하라'는 히브리어 'יָדַע야다'는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깊이 관계하고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그 일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아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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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시각, 위로부터의 탄생 | 삶을 깨닫고 싶은가
· 요.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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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삶을 깨달으면
· 하나님께서 이 삶에 관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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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로 시작합니다. 인간이 삶에서 겪는 부족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하며, 기독교와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관점을 비교합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거듭남’의 의미를 상세히 해석합니다. 설교는 영생을 얻기 위한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일상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삶을 촉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역설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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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의 시대는 갔는가 |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무슨 관계인가
· 요.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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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을 지키려는 자, 누구인가
·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전
· 내 아버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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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와 본질은 성전의 본래 목적과 그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강조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에 대한 예수님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성전의 원래 의미와 "내 아버지의 집"의 즉각적인 배경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제물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지며 난장판이 된 광경을 보셨습니다. 이방인의 구역인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으나, 폭리가 횡행하는 "강도의 소굴"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집"의 의미와 신학적 강조점
• 공간적/물리적 의미 (οἶκος): 요한복음 2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집'은 헬라어로 'οἶκος(오이코스)'이며, 이는 사건이 벌어진 성전이라는 물리적인 건물을 강조하는 공간적·건물적 의미가 강합니다.
• '아버지의 그곳'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누가복음 2장 49절에서 어린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실 때의 '집'은 원문에서는 관사를 여격으로 쓴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로, '내 아버지의 그곳'이라는 의미로 장소를 가리킵니다.
• 사람과 공동체 (οἰκία): 요한복음 14장 2절의 "내 아버지의 집"은 'οἰκία(오이키아)'를 사용했는데, 이는 사람과 공동체, 또는 집안 내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궁극적으로 물리적 건축물을 넘어서는 의미: 이러한 표현들을 종합할 때, '집'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인 건축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관계를 확인하는 장소여야 합니다.
3. "내 아버지"라는 호칭의 독특성과 친밀성
• 유대인과의 차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나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אדֹנָי)'라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ὁ πατήρ μου)'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예수님만의 독특한 개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판단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표면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 친밀성과 정체성: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윤리적 엄격함과 경외감을 강조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사랑받는 자녀로서 아버지에 대한 친밀성과 예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에게 '내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임재와 권위가 실현되어야 하는 본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4.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됨으로써 왜곡된 본질 '장사하는 집(οἶκον ἐμπορίου)'이란 집의 목적이 오직 이익을 남기는 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에서 허가받은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제물을 비싸게 팔고 환전 수수료로 폭리를 취했으며, 이러한 이익의 대부분은 산헤드린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탐욕과 독점 행위로 인해 성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장소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5. "성전의 시대는 갔는가" - 새로운 성전의 도래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지은 물리적인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건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성전된(ναός)'은 신이 거주하는 지성소,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별한 공간을 뜻하며, '육체(σῶμα)'는 단순히 살덩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신 말씀의 본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 성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을 만나는 장소여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나 국경이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 예수님 자신이 살아있는 성전: 예수님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나오스(ναός)', 즉 지성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물리적인 성전 건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 교회의 본질: 오늘날 교회는 성전이 아니며, 교회를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너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자격을 갖추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는 삶이 중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질책을 넘어, 성전의 본질적인 목적이 상실되었음을 선언하고,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통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모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야 한다는 근본적인 신앙의 전환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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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com/@moon.moksha
· 성전의 시대는 갔는가 |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무슨 관계인가
· 요.2,12~25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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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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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을 지키려는 자, 누구인가
·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전
· 내 아버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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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성전 정화 사건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대인의 신앙 체계를 대조하며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이 성전 정화 사건을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배치하여 예수님의 표적과 하나님의 로고스와 연관 짓는 요한의 신학적 의도를 강조합니다. 또한, 유월절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와 히브리인의 기원을 설명하며, 솔로몬 성전 파괴부터 헤롯 성전 재건까지 성전의 변천사를 다룹니다. 특히,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상황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칭하신 것이 유대인에게 왜 충격적이었는지 밝히며,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을 비판합니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참된 성전은 물리적인 건물이 아닌 예수님의 몸, 즉 예수님의 삶과 성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임을 역설하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모든 신앙의 본질임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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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처음 표적 | 요한은 어째서 기적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 요.2,1~11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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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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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 어째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했을까
· 기적이 아니라 한사코 표적이라고 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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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묘사된 기적들은 일차적으로 표적(세메이온)으로서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시이며, 신앙 안에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 그분 안에서 자유와 영원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1. 성경에 묘사된 기적의 일차적인 의미: '표적'으로서의 역할
• 요한복음의 관점: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줄곧 **'표적'(σημεῖον
)**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기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시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길가의 교통 표지판이 그 자체보다 가리키는 바가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요한은 기적을 행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 다른 복음서의 관점: 마태, 마가, 누가는 기적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 주로 **'능력'(δύναμις)**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이는 행위 자체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반면 '표적'(σημεῖον)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대개 불신앙의 요구와 관련된 부정적인 경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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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한계에 대한 인지: 예수님의 일곱 가지 기적 모두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건드렸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할 때 신을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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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초기 단계: 기적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굳히게 했습니다. 이는 믿음이 점진적으로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 작용으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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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보기'로서의 가치: 기적은 영원한 세상에 대한 '맛보기'로서 가치가 있을 뿐이며, 그 자체가 영원한 세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2. 신앙 안에서의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
• 기적이 아닌 목적 추구: 기적 자체가 목적일 수 없으므로, 신앙생활에서는 목적이 아닌 기적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 구원 사업과의 분리: 아무리 큰 기적이라 할지라도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기적은 사람들을 구원 사업으로 이끄는 '맛보기'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구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잠시 만족을 줄 수 있지만 영원하지 않으며, 구원으로 직접 이어지지 않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인식: 우리 신앙에서 최고 가치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으며,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줄 알면 이 세상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때부터는 모든 문제가 자신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해결하셔야 할 문제로 바뀝니다.
• 영원한 세상과 하나님: 우리는 삶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얻으며, 그분은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 삶의 최고 가치였습니다.
• 믿음의 자유와 풍요로움: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가치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기존의 관념을 바꾸고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장인'처럼 자유로움을 얻어야 합니다. "사실을 알면 그 사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처럼, 삶의 사실을 알고 하나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 기독 신앙의 궁극적인 복입니다.
3. 기적에 대한 오해와 경고
• 신앙의 동력 상실: 기적을 끊임없이 구하고 그것에만 집중하게 되면 신앙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동력을 잃게 됩니다.
• 현실적인 도움 부족: 상징적 해석이나 유사 해석에 머무는 것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지금 나의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 세속적인 관심: 오늘날 교회는 기적과 같은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사회에서 거친 돌처럼 취급받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 일상의 기적: 우리는 사실 매일 기적을 경험하며 살지만, 너무 자주 경험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오히려 일상적인 평범함 자체가 기적일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목적 아님: 기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며, 기적으로만은 본질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묘사하는 기적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지만, 그것은 더 깊은 진리를 가리키는 표적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믿음과 영원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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