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ver문 목사의 직설/直說요한복음_22. 이 삶에서 구출을 받았는가 | 하나님을 알려고 애쓰며 사는가
요한복음_22. 이 삶에서 구출을 받았는가 | 하나님을 알려고 애쓰며 사는가

요한복음_22. 이 삶에서 구출을 받았는가 | 하나님을 알려고 애쓰며 사는가

Update: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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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삶에서 구출을 받았는가 | 하나님을 알려고 애쓰며 사는가
· 요한.5,30~40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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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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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을 앎에 대하여
· 예수님의 실제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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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30-40절 주해: 네 가지 증언을 통해 본 예수의 신적 권위
I. 서론: 논쟁의 배경과 증언의 필요성
본 보고서는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40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변론을 원문 분석과 신학적 통찰을 통해 심도 있게 주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요한복음 5장은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기적 사건으로 시작되나, 이는 곧 안식일 논쟁과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 선언하심으로써 당신의 신적 권위에 대한 첨예한 신학적 대립으로 비화된다.
이 논쟁의 근저에는 단순한 권위 다툼을 넘어선, 구원에 대한 두 가지 상충하는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과 전통을 통해 ‘이 땅의 삶’에서의 종교적, 사회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 반면, 예수께서는 무의미와 고통으로 점철된 ‘이 삶으로부터의 구출’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본질적인 삶(ζωή)’을 제시하신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문(30-40절)은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가 자의적인 주장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네 가지 핵심 증언(예수 자신, 세례 요한,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통해, 자신이 바로 그 ‘본질적인 삶’의 유일한 원천임을 논증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본 보고서는 이 네 증언을 순차적으로 분석하며, 각 증언이 어떻게 유대 지도자들의 세계관을 전복시키고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확증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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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첫 번째 증언: 예수 자신의 증언 -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 (30-32절)
본문의 첫 증언은 역설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증언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중심적 주장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권위와 판단이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에서 비롯됨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단락은 예수님의 권위가 자의적인 것이 아닌, 존재론적 합일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본문 (30-32절)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1. 아버지의 뜻과의 온전한 일치 (30절)
예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는 선언으로 증언을 시작하신다. 이는 무능력의 고백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의 온전한 일치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역설적 선언이다. 이 선언은 단순한 순종을 넘어선 존재론적 합일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무엇을 생각해도 그것은 곧 아버지의 생각’이라는 경지이며, ‘나’라는 자아가 사라지고 아버지만이 존재하는 신앙의 정점이다. 이러한 순종적 관계의 궁극적 표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심판'은 절대적으로 의로울 수밖에 없다. '심판'으로 번역된 헬라어 **'크리시스(κρίσις)'**는 종말론적 심판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시간으로 분별하고 드러내는 현재적 ‘판단’ 행위이다. 예수님의 모든 판단이 의로운 이유는 그것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곧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시사하며, 그분의 판단은 사적인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그 자체이다.
2. 외부 증인으로서의 하나님 아버지 (31-32절)
이어 예수님은 당시 법정 원칙을 따라 스스로를 위한 증언의 한계를 인정하신다. '증언'을 의미하는 헬라어 **'마르튀리아(μαρτυρία)'**는 법정적 신뢰성을 담보하는 용어이다. 만일 예수님의 권위가 자기 자신에게서만 비롯된다면, 그 증언은 '참되지 않다(ἀληθής)', 즉 객관적 진실성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자신의 권위를 보증하는 절대적 증인이 있음을 선포하신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에서 그 증인은 문맥상 명백히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권위는 자가 발전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절대적 증인이신 하나님에 의해 확증된다. 예수 자신이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기에, 그분의 삶과 사역 전체가 곧 아버지의 증언이 되는 것이다. 이 신적 권위의 토대 위에서, 예수님은 이제 인간 증인인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논지를 전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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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두 번째 증언: 세례 요한의 증언 - 빛을 가리키는 등불 (33-35절)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는 데 인간의 증언이 궁극적으로 불필요함을 아시면서도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인용하신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추구하던 가치 체계의 한계를 폭로하고 그들을 ‘본질적인 삶’으로 초대하기 위한 전략적 논증이다. 이 단락은 요한의 증언이 갖는 중요한 역할과 동시에, 왜 유대인들이 그 증언의 핵심을 외면했는지를 명확히 조명한다.
본문 (33-35절)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1. 사실을 증언한 요한 (33-34절)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요한에게 심문관을 보냈던 사건(요 1:19 )을 상기시키며,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원문 **'메마르튀레케 테 알레데이아(μεμαρτύρηκε τῇ ἀληθείᾳ)'**는 요한이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당신의 권위가 인간의 평가나 인정을 초월함을 분명히 하신다.
그럼에도 요한의 증언을 언급하는 목적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ἵνα ὑμεῖς σωθῆτε)”이다. 여기서 언급된 ‘구원(σωτηρία)’은 이 땅의 삶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와 고통으로 점철된 ‘이 삶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추구하던 가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는 개념이다. 또한 ‘구원받다’로 번역된 **'소데테(σωθῆτε)'**는 '구원하다(σώζω)'의 수동태형으로, 이 구원이 인간의 노력 아닌 외부의 힘, 즉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짐을 암시한다.
2. 등불과 참 빛의 비유 (35절)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역할을 “켜서 비추이는 등불(λύχνος)”로, 자신을 “참 빛(φῶς)”(요 1:9)으로 명확히 대조하신다. 등불은 원천(기름)에 의존하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빛인 반면, 예수님은 빛의 근원이시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한때(πρὸς ὥραν, 잠시 동안)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다”는 데 있다. 그들의 관심이 일시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요한을 ‘이 삶’의 관점에서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한에게서 정치적·종교적 부흥의 가능성을 보고 열광했을 뿐, 그가 가리키는 ‘이 삶으로부터의 구출’이라는 본질에는 무관심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거대한 배를 정박시키기 위해 먼저 던지는 가는 **'던짐줄(Heaving Line)'**과 같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홋줄을 끌어올 수단인 '던짐줄' 자체의 현상에만 열광했을 뿐, 그 던짐줄이 가리키는 본질, 즉 그들을 하나님이라는 항구에 정박시킬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선’을 외면한 것이다. 인간 증언의 내재적 한계를 논증한 예수께서는, 이제 그 권위의 궁극적 원천인 하나님의 직접적 증언으로 논지를 필연적으로 심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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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세 번째 증언: 하나님의 증언 - 아들의 사역과 임재 (36-38절)
세례 요한이라는 인간 증언을 넘어,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증거인 하나님의 증언을 제시하신다. 이 증언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 그 자체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단락은 예수님의 모든 '일'이 곧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유대 지도자들이 이 명백한 증거를 알아보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그들 내면의 영적 공허함에 있음을 고발한다.
본문 (36-38절)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1. 사역(ἔργον)을 통한 하나님의 증언 (36절)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를 제시하신다. '역사(役事)'로 번역된 헬라어 **'에르곤(ἔργον)'**은 '일', '행위', '사역'을 의미한다.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신 것과 같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 사역들은 ‘이 삶’의 질서를 초월하는 신적 행위였기에, 사람들은 그분의 일을 통해 그분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시선은 권력, 전통, 통제와 같은 ‘이 삶’의 가치에만 고정되어 있었기에, ‘본질적인 삶’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을 인식할 수 없었다.
2. 영적 무지와 단절 (37-38절)
그들이 이 명백한 증거를 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εἶδος)을 보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깊은 영적 무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 영적 무지의 근본 원인은 38절의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라는 진단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말씀(λόγος)'**은 죽은 율법 조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이 입술에만 있고 마음에 없었기에,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외적 계시에 공명할 내적 실재가 부재했다.
이러한 내적 공허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 못하는 필연적 결과를 낳았다. 이는 호세아 선지자가 제사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יַָדע/γινώσκω)"(호 6:6)을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본심을 외면한 비극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지식적 동의가 아닌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들의 내적 부재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그토록 신성시하는 성경마저 오독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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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네 번째 증언: 성경의 증언 - 영생의 원천을 외면하는 모순 (39-40절)
본문이 제시하는 마지막 증언은 가장 파괴적인 역설이다. 유대인들이 영생의 유일한 통로라고 믿었던 성경이, 도리어 그들의 불신을 고발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거로 제시된다. 이 단락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한 진짜 목적을 폭로하며,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영원한 삶’과 살아있는 실재로서의 ‘삶’ 자체이신 예수님 사이의 비극적 괴리를 드러낸다.
본문 (39-40절)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1. 성경 연구의 목적과 내용의 괴리 (39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성경(γραφή)'**에서 **'영원한 삶(ζωὴ αἰώνιος)'**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했음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본질적인 삶’의 추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성경 연구를 ‘이 삶’에서의 종교적 의로움과 안정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 비극적 모순을 향해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선언하신다. 성경은 생명 자체를 주는 부적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이다. 그들은 이정표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이정표가 가리키는 목적지를 외면하는 아이러니에 빠졌다.
2.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는 의지 (40절)
문제의 핵심은 40절에서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ζωή)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영생’은 39절의 ‘영원한 삶(ζωὴ αἰώνιος)’이라는 개념적 용어가 아닌, 단 하나의 단어 **'삶(ζωή)'**으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은 추상적 개념인 ‘영원한 삶’을 연구했지만, 살아있는 실재이자 ‘삶’의 본질 그 자체이신 예수께 나아와 실제적인 ‘삶’을 얻기를 “원하지 아니했다”.
그들의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의지의 완고함이었다. 그들은 ‘이 삶’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존재 방식을 제시하는 예수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질적인 삶’이라는 범주 자체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정통했지만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마태복음 15장 14절의 말씀처럼 실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비극의 정점이다. 그들의 거부는 결국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기 원치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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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결론: 네 가지 증언의 종합과 현대적 적용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4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입증하는 다층적 법정 변론을 통해, 구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문이 제시한 네 가지 증언—아버지와의 존재론적 합일에서 비롯된 예수님 자신의 증언, 참 빛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증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성경의 증언—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하나의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며 모든 참된 증언이 그분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본문이 드러내는 핵심 신학적 진리는 참된 생명이 지식적 연구가 아닌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성경을 통해 ‘이 삶’에서의 안정을 추구했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본질적인 삶(ζωή)’을 놓쳤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엄중한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성경 지식을 쌓고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유대 지도자들처럼,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정작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이 삶’을 위한 지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이 삶으로부터의 구출’을 통해 얻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성경이 가리키는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과의 친밀한 앎을 통해 ‘본질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네 가지 증언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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