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ver맛있는 교회사 이야기[06/07] 제1세대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와 후스파의 결성
[06/07] 제1세대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와 후스파의 결성

[06/07] 제1세대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와 후스파의 결성

Update: 2015-06-07
Share

Description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는 면죄부 판매 비판으로 그동안 지지를 받던 황제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자 망명길에 나섰습니다. 남쪽으로 이동하며 이르는 마을마다 민중언어인 체코어로 설교함으로써 기존 예배와 차별화된 개혁성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후스는 세 가지 신학사상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10계명 해설과 주기도문 강해, 사도신경 강해가 그것으로 이후 매우 중요한 교육자료가 되었습니다.

후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리와 교회’였습니다. 특히 당시 중세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였던데 반해서 후스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이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로 이루어진 교회가 참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어거스틴과 위클리프의 교회론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전통 중세교회와 후스가 주장하는 교회 사이에 중도적 입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교황과 사회지배계층으로 대변되는 평신도의 협의체 즉 council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점차 대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414년 첫 공의회가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렸으며 이 공의회의 주된 쟁점인 후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황제가 망명중인 후스를 소환하였습니다. 그러자 후스는 황제가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자기 변호를 위해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체포, 감금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단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어 당일 화형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체코 전역이 들끓게 되었고 특히 젊은 귀족 450여명은 연명으로 편지를 교황에게 보내 체코의 종교문제는 자율적으로 해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후스의 신학에 따라 날마다 성만찬을 행함으로써 중세교회를 부정하고 예배 참여자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새로운 교회를 유지해나갔습니다. 이 체코교회는 이후 후스 종교개혁의 상징이 된 분잔을 포함한 성만찬을 이어나갔고, 체코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는 전통을 확립하였으며 마침내 체코 전역이 후스파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도시에서는 프라하대학이 신학과 신앙적 근거를 마련하는 등 독자적 신앙의 길을 걸었으나 농촌지역에서는 과격한 행동에 의한 개혁이 진행되어 기성 교회에 대한 성직자 테러행위와 재산탈취 등이 자행되었고 점차 체코파는 폭력집단화 되었습니다. 그러자 상대진영인 가톨릭 또한 공격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체코 전역이 후스파가 되었으나 여전히 가톨릭 편에 서 있던 벤젤왕은 교황청과 지그문트 황제의 압력에 밀려 후스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419년에는 양 진영이 무력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Comments 
00:00
00:00
x

0.5x

0.8x

1.0x

1.25x

1.5x

2.0x

3.0x

Sleep Timer

Off

End of Episode

5 Minutes

10 Minutes

15 Minutes

30 Minutes

45 Minutes

60 Minutes

120 Minutes

[06/07] 제1세대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와 후스파의 결성

[06/07] 제1세대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와 후스파의 결성

C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