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ver문 목사의 직설/直說요한복음_11 ·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요한복음_11 ·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요한복음_11 ·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Update: 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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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요.3,1~7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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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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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삶을 깨달으면
· 하나님께서 이 삶에 관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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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이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나의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알아차릴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살아가며, 부족함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느낍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고통과 허전함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삶의 근원이자 제일 원인인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삶의 억울함을 해소할 수 없는 상황,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드물며,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한계를 느끼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갈구합니다.

2. 삶의 고통과 욕망은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삶의 고통과 욕망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중요한 동기입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가 고통의 다른 모습일 수 있으며, 희망과 절망 모두 고통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즉 "이럴 수 없는 일"이라는 본질적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의구심은 삶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깨닫게 하고, 결국 이 삶 너머의 무한한 세계, 즉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는 이 세상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3. 기독교와 불교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왔나요?
기독교와 불교는 공통적으로 "삶이 이렇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불교는 삶의 이치를 따져 깨달음으로 고통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붓다, 달마, 혜능, 지눌, 성철로 이어지는 불교의 계보는 "삶을 깨닫자"는 치열한 여정을 보여주며, 돈오(頓悟, 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 점진적 수행)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삶의 "제일 원인"을 하나님으로 특정하고, 그 하나님을 통해 삶의 의구심을 풀고자 합니다. 깨달음은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수긍하며 본질을 추구하게 만드는 태도로 해석됩니다.

4. 니고데모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명문 거족 출신으로, 부유하고 헬라-로마 세계와 연관이 깊은 유대인의 지도자, 즉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삶 너머의 것을 생각하는 사색적인 인물이었으며, 정의로웠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당시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해서라기보다는, 타인의 방해 없이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해석됩니다. 낮과 밤의 사회적 역할이 달랐던 시대에,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탐색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행적, 특히 '표적(σημεῖον세메이온)'을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을 인식했음을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단순히 기적 자체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기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목적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을 알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알다(에이도)'는 단순히 '보다'를 넘어 '깨닫다'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6.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γεννηθῇ ἄνωθεν겐네데 아노덴)"은 단순히 반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ἄνωθεν아노덴'은 "위로부터, 위에서, 근원부터"라는 뜻으로,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를 통해 육체적으로 한 번 태어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의지와 영(πνεῦμα프뉴마)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영'은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인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즉, 거듭남은 단순히 두 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지하고 그분과 관계 맺는 영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7.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능력은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3절)" "들어갈 수 없다(5절)"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바실레이아 두 데움)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능력(δύναμαι뒤나마이)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능력은 육체적인 삶을 통해 육체를 넘어 하나님을 의식하고 알아차릴 때 생겨납니다. 즉, 삶의 모든 사건과 경험 속에서 그 이면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체는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의식을 잉태하는 요람과 같으며, 인생은 이 육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는 여정입니다. 이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8.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잠언 3장 6절의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에서 '인정하라'는 히브리어 'יָדַע야다'는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깊이 관계하고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그 일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아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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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com/@moon.mok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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