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ver문 목사의 직설/直說요한복음_16 · 실존의 원함(θέλημα) | 나의 실존은 실제로 무엇을 원할까
요한복음_16 · 실존의 원함(θέλημα) | 나의 실존은 실제로 무엇을 원할까

요한복음_16 · 실존의 원함(θέλημα) | 나의 실존은 실제로 무엇을 원할까

Update: 202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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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 실존의 원함(θέλημα) | 삶이 이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 요.4,1~19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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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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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실존이 실제로 원하는 것
·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을 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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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다시 보게 만드는 4가지 놀라운 통찰: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론: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대하여
"이렇게 사는 삶은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나름의 성취를 이루고, 부지런히 살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이것이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일까?" 하는 질문이 조용히 고개를 들 때, 우리는 삶의 근원적인 목마름과 마주합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놀랍도록 날카롭고 깊이 있는 답변을 찾아보려 합니다.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향한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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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 안에는 두 가지 '원함'이 있습니다: 충동적 욕망(에피뒤미아)과 본질적 원함(델레마)
우리가 일상적으로 '원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성경이 구분하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성숙의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첫 번째는 에피뒤미아(ἐπιθυμία)입니다. 이는 ‘위에(ἐπί)’라는 말과 ‘열정(θυμός)’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감정이 위로 확 치밀어 오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본능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욕망입니다. 성경은 이를 '육체의 욕심' 또는 '소욕'이라 번역했는데, 이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살덩이(σάρξ사르크스) 자체가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는 델레마(θέλημα)입니다. 이는 이성적이고 결단적인 의지이며, '나의 실존'이 진정으로 바라는 본질적인 원함입니다. 마음의 방향이 정해진 의지, 즉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 향하는 방향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 원함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 대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내면의 전쟁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영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갈라디아서 5:16-17

여기서 우리는 흔히 '영을 따라 행하라'는 말을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이해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지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프뉴마 하기온)이 아닌, 그냥 '영(πνεῦμα프뉴마)'입니다. 이 통찰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싸움의 첫 단계는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나의 영'의 결단입니다. 육체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 그 요구를 '나의 진짜 원함이 아니다'라고 알아차리고 저항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영(πνεῦμα)'이 깨어나 행하는 첫 번째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신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치열한 내적 싸움에서 나의 영이 육체를 이겨낼 때, 비로소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과 교감할 수 있는 상태에 이릅니다.
육체의 요구를 나의 진정한 원함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 바로 이 영적 분별과 결단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2. 수가성 여인의 진짜 문제: 그녀는 '죄인'이 아니라 '목마른 영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원함'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녀를 남편을 다섯이나 둔 부도덕한 여인으로 단죄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녀의 진짜 문제는 '죄'가 아니라, 채울 수 없는 깊은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자신의 본질적 원함(델레마)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대상을 바꾸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택했던 남편들은 일시적 갈증을 해소해 줄 뿐인 충동적 욕망(에피뒤미아)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물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시는 순간에는 갈증이 해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더 큰 목마름이 찾아오는 끝없는 반복. 그녀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이 근원적인 목마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해결책인 '생수'를 제안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한복음 4:14

예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을 때, 여인의 대답은 그녀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영적 각성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것은 사실을 숨기려는 거짓말이나 회피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이 말을 "참되다(ἀληθής알레데스)"고 인정하십니다. 그녀는 그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실존적 진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다섯 명의 남편 중 누구도 자신의 근원적 목마름(델레마)을 채워주는 진정한 의미의 '남편'이 될 수 없었음을, 예수의 말씀 앞에서 비로소 깨닫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영혼 안에서 생수가 솟아나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습니다.

3. 예수의 제자들도 놓쳤던 핵심: 우리가 오늘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
이처럼 본질적인 삶의 전환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깊은 오해 속에 있었는지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을 목격한 직후에 던진 질문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사도행전 1:6).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다윗 왕국의 회복'이라는 지상적 목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강력한 '자기 관념'의 틀 때문이었습니다. 이 견고한 생각의 틀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을 때조차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벽이었습니다.
이 자기 관념의 비극은 예수 승천 이후 더욱 명확해집니다. 방향을 잃은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지도 않은 일, 즉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행정적인 일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그냥 할 일이 없었던 겁니다." 영적인 목적을 상실하자 익숙한 세상의 방식으로 공백을 메우려 했습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섬뜩하게 닮아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이라는 삶의 근본적인 질적 전환보다, 눈에 보이는 현세의 '복'—자녀의 성공, 사업의 번창, 무병장수—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는 '자기 관념'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이 '다윗의 나라'라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듯, 우리도 우리의 왕국을 세워줄 현세적 해결사를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4. '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이정표입니다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 경험하는 '복'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복의 진정한 역할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모든 좋은 것들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메이온(σημεῖον)', 즉 '표시' 또는 '이정표'입니다.
이 이정표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는 무엇일까요? 바로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다른 차원의 삶,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시작하는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입니다. 삶에서 복을 받는 경험은 그 복 자체에 안주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고 그분을 향해 더 깊이 나아가라는 강력한 초대장입니다.
이정표를 목적지로 착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우리는 정작 그 길이 향하던 영원한 생명의 목적지를 놓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아니라면 그저 유한한 목마름의 연장일 뿐입니다. 복은 감사히 받되,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복 너머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복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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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당신의 삶은 어떤 '목마름'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내면에는 충동적인 '욕망(에피뒤미아)'과 근원적인 '원함(델레마)'이 끊임없이 공존하며 싸웁니다.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에서 보았듯, 진정한 만족과 해갈은 일시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 원함을 따를 때,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생수를 만날 때 비로소 시작합니다.
당신은 매일 어떤 물을 길으러 가고 있습니까? 마셔도 다시 목마른 물입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입니까? 당신의 삶이 진정으로 향하는 그 '목마름'이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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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com/@moon.mok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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