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ver문 목사의 직설/直說요한복음_17 · 삶의 본질에 대하여 | 기독 신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요한복음_17 · 삶의 본질에 대하여 | 기독 신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요한복음_17 · 삶의 본질에 대하여 | 기독 신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Update: 202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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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 삶의 본질에 대하여 | 기독 신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 요.4,20~26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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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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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가
·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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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본질을 향한 현대적 갈망과 신앙의 역할
'삶의 본질'이라는 근원적 질문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인간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본질'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핵심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핵심 전략이 되었습니다.
반도체 설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짐 켈러는 한때 함께 일했던 일론 머스크를 "본질을 빼고 다 버리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가 열광하는 미니멀리즘의 철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란 단순히 적게 소유하는 것을 넘어, '비움으로써 본질에 다가가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이는 어떤 것의 본질을 그것이 '아닌 것'을 제거함으로써 이해하려는 철학적 방법론(via negativa)과도 같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는 행위는 우리를 옭아매는 비본질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삶의 진짜 핵심을 발견하게 하는 강력한 방법론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우리를 하나의 중요한 질문으로 이끕니다. 그렇다면 신앙, 특히 기독교 신앙은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단순히 정해진 종교적 행위를 따르는 것을 넘어, 인간의 근원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밝히는 여정입니다.

2. 본질을 상실한 신앙의 현실
종교는 본래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을 탐구하는 길이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 본질에서 벗어나 외형적인 형식과 세속적 이익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진리를 찾는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탐구를 왜곡하고, 오히려 내면의 갈증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제가 다니는 면 소재지 미용실의 주인이 겪은 일화는 이러한 현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녀는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위로를 얻고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교회의 권사들이 찾아와 "이런 데서는 교회에 소속을 두어야 장사를 할 수 있다"며 교회 등록을 강권했다고 합니다. 전도라는 명목 아래 행해진 이 접근 방식은, 신앙을 내면의 탐구가 아닌 다른 것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과 충돌합니다. 종교의 본질은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조차 버리겠다'는 결단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잃고 형식과 이익만을 좇는 신앙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을 남깁니다. 수가 성의 한 여인이 예수 앞에서 토로했던 그 깊은 목마름은 바로 이러한 본질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3. 예배의 본질을 묻다: 장소에서 관계로의 전환
수가 성 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보여주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이 대화는 단순한 문답을 넘어, 예배의 개념을 장소와 형식의 문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근본적으로 재정의합니다.
이 대화의 무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의 배경에 깔린 깊은 역사적 상처를 알아야 합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이 동참을 요청했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을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스 4:3). 이 거절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낳았고,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322년경 그들의 성소인 그리심 산에 독자적인 성전을 세웠습니다. 약 200년간 두 성전은 경쟁적으로 공존하다, 기원전 110년경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가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두 민족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여인의 질문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0)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궁금증이 아닙니다. "어느 장소가 진짜 성전인가?"라는 질문은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이 걸린, 수백 년 묵은 갈등의 표출입니다. 이는 예배를 특정 '장소'와 정해진 '의식'의 문제로 한정하는 피상적 신앙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1)
여기서 원문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Πίστευέ μοι)"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믿음의 근거를 장소나 율법 조항에서 '예수 자신'이라는 인격으로 옮겨놓는 중대한 선언입니다. 또한 "때가 이르리라 (ἔρχεται ὥρα)"에서 동사 '이르다(ἔρχεται)'는 미래가 아닌 현재 시제입니다. 즉, 새로운 예배의 시대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 이미 시작했다는 폭발적인 선포입니다. 이로써 장소와 제물 중심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통로가 아님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제사(祭祀)'가 '예배(禮拜)'라는 개념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변화를 목격합니다. 영어 단어 'worship'이 때로 형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반면, 원어는 그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예배의 원어인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을 향하여 입맞추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는 제물이 오가는 거래적(transactional) 관계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과의 친밀한 인격적(relational) 관계와 속마음을 중시하는 내면적 행위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민족의 예배 방식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지적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요.4,22). 이는 유대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한 반면, 유대인은 율법서와 더불어 다양한 선지서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다각적인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한적인 계시는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이해를 제한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배의 장소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는 그 답을 '영과 진리'라는 두 개념에서 찾습니다.

4. 진정한 예배의 조건: 영(πνεῦμα)과 진리(ἀλήθεια)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원리를 응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선언입니다.
'진리(ἀλήθεια)'의 재해석: 삶의 현실을 직면하는 용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급진성을 파악하려면, 현대 철학적 정의를 넘어 성경 원어가 가진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진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추상적 교리나 심오한 이념이 아니라, 훨씬 더 실제적인 '삶의 적나라한 사실(reality)'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2)는 말씀은, 나의 삶이 처한 상황과 그 현실을 정직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남자도 내 남편이 아니라"는 자신의 삶의 부끄러운 사실(ἀλήθεια)을 있는 그대로 직시했을 때, 자신을 옭아매던 사회적 편견과 내면의 갈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 행위는, 이제 '살아있는 물'이신 예수를 만났기에 더 이상 낡고 불충분한 방법으로 자신의 갈증을 채우려 하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영(πνεῦμα)'의 역할 분석: 내면의 영을 깨우는 길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이 '영' 즉 '프뉴마(πνεῦμα)'는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과는 구분한는 '나의 영'을 가리킵니다. 이 나의 내면적 영은 독자적으로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진실(ἀλήθει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때 비로소 깨어나고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 오직 나의 깨어난 영(πνεῦμα)만이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종합: 진정한 예배와 구원의 재정의
종합하여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사실(ἀλήθεια)을 정직하게 직면함으로써 깨어난 나의 내면적 영(πνεῦμα)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야말로 장소와 형식, 제물을 초월한 참된 예배의 본질입니다. 이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합니다. 구원을 뜻하는 '소테리아(σωτηρία)'는 흔히 오해하듯 단순히 죽음 이후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소테리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개념으로, '지금 이 삶에서' 육체의 헛된 욕망(ἐπιθυμία, 에피뒤미아)과 사회적 편견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삶의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 자유가 곧 구원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삶을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이론적 분석을 넘어, 이제 우리는 실천의 문제로 나아가야 합니다.

5. 결론: 본질을 살아내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
이 에세이의 논지를 종합하면,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행위는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가 흔히 던지는 "어떻게 하면 잘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본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짐 켈러가 말했듯, 본질이 아닌 것을 과감히 버릴 때 비로소 잘사는 방법이 드러납니다. 이는 삶의 현상에 매몰하지 않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자신의 삶의 사실(ἀλήθεια)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을 연습하라" (딤전.4,8)고 권면했습니다. 본질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바로 이 '경건의 연습'입니다.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실(ἀλήθεια)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자신의 내면적 영(πνεῦμα)을 단련하고, 이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심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삶의 실체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칩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며, 장소와 형식을 넘어선 참된 예배의 여정을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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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com/@moon.mok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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