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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문학ㆍ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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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문학ㆍ언어

Author: jennifer pai-白兆美, 손전홍, 진옥순, 노혁이, 여가영, 안우산,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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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문학ㆍ언어

37 Epis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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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수 차이 蔬菜오이 샤오 황 과 小黃瓜 무 뤄 보 蘿蔔당근/홍당무 홍 뤄 보 紅蘿蔔 콩나물 황 도우 야 黃豆芽숙주나물 류 도우 야 綠豆芽 파 총 蔥 대파 다 총 大蔥 가지 치에 즈 茄子 쥬키니 호박 지에 과 櫛瓜여주 쿠 과 苦瓜  마늘 솬 토우 蒜頭셀러리 친 차이 芹菜 부추 저우 차이 韭菜 노란색 부추(구황) 저우 황  韭黃 고수 샹 차이 香菜양배추 가오 리 차이 高麗菜
타이완 문학의 향기를 담아, 지금 <포르모사 문학관>의 문을 엽니다. 청취자 여러분, 황금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타이완도 이번주에 연휴가 두 번이나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아주 들떠 있습니다. 이런 즐거운 시기에 타이완 문학계의 큰 축제 ‘금정장(金鼎獎)’ 시상식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문화부가 주최하는 출판대상 금정장은 올해로 49회를 맞았고, 1,386개의 출품작 중 35개 작품이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 가운데 모두의 시선을 끈 인물이 93세의 그림책 작가 정민진(鄭明進, 1932~)입니다. 직접 시상식에 참석해 힘 있는 목소리로 수상소감을 전했는데요. “저는 타이완에서 가장 운 좋은 할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하자 큰 웃음과 박수를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형이 선물한 《손오공》 그림책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회상하면서 이 자리에 와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앞으로도 잘 살아서 100살까지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에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죠. 리위안(좌) 문화부 장관이 정민진(우) 작가에게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 사진: CNA 그가 언급한 《손오공》은 1936년 일본 고단샤에서 나온 그림책으로, 손오공의 탄생부터, 수행 과정, 그리고 오행산에 갇혀 지낸 500년 이야기까지 담고 있습니다. 타이완이 일본 식민지였던 당시, 서점이 많지 않아 일본 책은 외래품 가게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어린 시절 그런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 겁니다. 장난꾸러기 손오공을 닮았다는 그는 이후 그림책 50권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 그림책 100권 가까이를 번역해 타이완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타이완 아동문학과 그림책의 거장 정민진 작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동 그림책의 교부? ‘그림책 할아버지’라 불러달라 🖍 아흔 살이 되면 어떤 모습일 것 같아요? 쉬면서 못다 이룬 꿈을 떠올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몸이 불편해져서 후회하고 있을까요? 정민진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정정한 그는 손자들을 장난스럽게 놀리고, 그림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그림책 할아버지’라고 부르죠. 원래는 ‘아동 그림책의 교부(대부)’라는 별칭이 붙었지만, 중국어에서 ‘교부(教父)’가 마피아 보스 같은 의미로도 쓰이다 보니 2009년 첫 손녀가 태어난 뒤부터는 “그냥 그림책 할아버지라고 불러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애칭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여든 살이던 2012년, 국립타이완도서관은 그 별명을 전시 제목으로 하여 특별전(繪本阿公.圖畫王國~鄭明進80創作展)을 열었습니다. 회화 작품은 물론 동물 점토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그의 창작 세계를 형상화했습니다. 이 전시는 다음해 타이난의 국립타이완문학관에서도 이어졌는데, 특히 타이난을 무대로 한 두 작품 《우시장(牛墟)》과 《홍통의 그림(洪通繪畫‧無師自通)》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작품① 🎨《우시장》 타이난 하면 떠오르는 길거리 음식, 바로 소고기 국물요리 ‘우육탕’이죠. 예전 농업사회에서 소는 경작과 운반을 책임지는 농민들의 든든한 파트너였기 때문에, 소를 사고파는 우시장이 마을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타이완에서 가장 오래된 우시장은 타이난 산화(善化)에 있는데, 지금은 일반 전통시장으로 변했지만 근처 도살장이 있어 우육탕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민진은 그 풍경과 문화를 꾸밈없이 담아내며 가장 ‘타이완다운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우시장》- 사진: 보커라이 작품② 🎨《홍통의 그림》 또 다른 작품 《홍통의 그림》은 타이난 출신 화가 홍통(洪通)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1970년대 타이완 본토 예술문화의 흐름 속에서 독학으로 창작을 시작한 홍통은 원시적이고 자유로운 화풍으로 예술계의 관심과 논쟁을 동시에 불러왔습니다. 이 책은 홍통의 고향 이야기에서 시작해, 그가 어떻게 주변 환경에서 영감을 얻고 창작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린이와 성인 독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홍통의 그림》- 사진: 보커라이 개인 전시회를 연 최초의 타이완 그림책 작가 👨‍🎨 쉰 살에야 그림을 접한 홍통과 달리, 정민진은 어릴 때부터 그림의 매력을 맛본 사람이죠. 타이베이시범학교(현 국립타이베이교육대학) 예술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25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타이완에는 그림책이라는 개념조차 낯설었는데, 그는 그림책을 수업 교재로 활용한 최초의 교사였습니다. 수업을 하면서 이런 점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이 사물이나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사생화’는 잘하지만, 상상력이 필요한 그림은 어려워한다는 점이었데요. 그래서 자신에게 상상의 문을 열어주었던 그림책이 떠올랐죠. 이후 세계각국의 그림책을 수업에 들여와 아이들의 상상력과 그림 스토리텔링 능력을 함께 키워냈습니다. 그림책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낮에는 수업하고 밤에는 일러스트를 그리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1968년, 출판사의 초청을 받아 타이완 민간 이야기 《십형제(十兄弟)》를 그림책으로 출간하며 정식 등단했습니다. 1977년 정년퇴직 후에는 일본 출판사가 주최한 ‘세계 아동 그림책 전시회’에 참여해 타이완 그림책 작가로는 처음으로 해외 무대에 섰습니다. 3년 후 타이완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며 또 한 번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아동 그림책의 교부’라는 별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죠. 《십형제(十兄弟)》- 사진: 보커라이 이어 정민진의 정신과 일맥산통한 노래, 셰신즈(謝欣芷)의 ‘같이 그림을 그려요(一起來畫畫)’를 함께 들어보시죠. 그림책 잘 그리는 비결은... 적자지심 🧒 정민진은 늘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아름다움의 진리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여든 살에 타이완문학관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도 어린아이처럼 무척 흥분했고, 심지어 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그는 손자 셋의 성장 과정을 그림으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 미술관’이라는 개념으로 집을 작은 미술관으로 꾸몄습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는 손주들과 함께 ‘마스크 쓴 자화상’을 그려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재치 있고 즐거운 방식으로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미술교육을 일상의 놀이로 만들어냈습니다. 정민진 작가 - 사진: 문화부 또 타이완 그림책 산업의 성장과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한성도서(漢聲圖書), 라이언 미술(雄獅美術), 아동일보(兒童日報) 등 출판사에서 편집고문을 맡으면서 세계각국의 그림책을 소개했고, 직접 번역도 했습니다. 그가 처음 번역한 작품은 미국 작가 에릭 칼(Eric Carle)의 대표작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였는데, 서로 다른 재료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후에도 일본 작가들의 그램책을 꾸준히 번역하며, 독서 환경이 열악했던 타이완을 활기찬 아동 도서의 숲으로 이끌었습니다. “타이완에 아동 그림책 미술관이 필요하다” 📚 현재 그의 꿈은 ‘아동 그림책 미술관’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택시 기사에게 “미술관으로 가주세요”라고 말하면 “미술관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지만, 지금 타이완 곳곳에 훌륭한 미술관들이 생겼습니다. 다만 대부분 성인을 대상으로 하기에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미술관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지난주 소개해드린 아동‧청소년 도서전처럼, 머지않아 아동 미술관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정민진이 처음 《손오공》그림책을 읽은 1944년을 떠올려 보면, 80년이 지난 지금 타이완의 그림책 산업과 예술 환경은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번역 중심의 시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여전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정민진을 비롯한 선배들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타이완 본토 그림책이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第49屆金鼎獎頒獎典禮 向出版人致敬」,文化部。2. 孟慶慈,「【藝術文化】圖畫書教父鄭明進80創作展」,自由時報。3. 繪本阿公「80展」,鄭明進線上插畫展。4. 洪榮志,「繪本阿公鄭明進 創作展開幕」,中國時報 。5. 李公元,「九十一瞬,童心不老,永不退休的繪本美育推動者 繪本阿公鄭明進」,教育家。6. 李公元,「鄭明進 繪本阿公90歲仍有夢」,人間福報。
타이완 문학의 향기를 담아, 지금 <포르모사 문학관>의 문을 엽니다. 3일간의 교사절 연휴가 끝났고, 오늘은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벌써 올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네요.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수교사상 ‘시탁상(師鐸獎)’ 시상식이 열렸고, 공자를 모시는 공자묘에서도 제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난 28일 타이베이 공자묘에서 열린 공자 제사 - 사진: CNA 타이완 최초의 아동‧청소년 도서전 🧒🏼 인재를 기르는 일은 나라의 매래를 좌우하는 핵심이죠. 아이들이 좋은 지도를 받으면 더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고, 보다 쉽게 인생의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가 출신의 리위안(李遠) 문화부 장관은 지난해 취임 이후, 과거에 없던 ‘타이완 국제 아동‧청소년 도서전’을 열고 싶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정부의 추진 끝에 제1회 도서전이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타이중에서 열렸습니다. 전 세계 14개국의 작가와 출판인이 한 자리에 모여 200개 이상의 강연과 워크샵, 체험 활동을 펼쳤습니다. 리 장관은 개막식에서 “한 나라가 아동과 청소년을 어떻게 대우하고 교육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다”며 “국제 아동‧청소년 도서전을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 이은 타이완 제2의 도서전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전했습니다. 또한 개최지를 타이베이가 아닌 타이중으로 정한 이유도 밝혔습니다. 지리적으로 편리할 뿐만 아니라, 국가만화박물관과 타이완미술관 등 문화 공간이 많아 관련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도서전을 참관하고 있는 리위안 장관 - 사진: 문화부 이번 도서전의 주제는 ‘도시와 경계를 넘어 읽다’였는데, 수도권을 벗어나 새로운 독서의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죠. 주빈국은 올해 타이베이 국제도서전과 같은 이탈리아였습니다. 언젠가 한국이 주빈국이 될 날을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은 아동‧청소년 도서전 현장으로 함께 떠나봅니다! 존①✨ 이탈리아 테마관, 문화강국의 그림책 전시장에 들어가면 9개의 전시 존이 펼쳐집니다. 이 중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 색으로 꾸며진 이탈리아 테마관인데요. 타이베이도서전과 같은 맥락이지만, 이번에는 어린이책과 그림책에 더 집중했습니다. 주최 측은 특별히 이탈리아의 신세대 일러스트 작가 30명을 선정해 이미지 도서가 가진 매력을 부각시켰습니다. 이탈리아 테마관 - 사진: CNA 이탈리아는 문화강국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1980년대에는 만화가와 일러스트 작가들의 ‘집단적 출가’ 현상이 발생했는데요. 당시 출판사와 시장은 여전히 모험, 아동, 유머 중심의 작품만 선호해서 예술 만화나 그래픽 노블처럼 실험적인 형식은 잘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세대 작가들은 만화시장이 상대적으로 성숙했던 프랑스나 벨기에로 많이 떠났죠. 게다가 유럽 여러 예술대학들이 외국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이탈리아 미술 전공 학생들의 해외 유학 붐을 가져왔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이탈리아는 산업 전환에 나섰습니다. 특히 독립 출판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매출 지향적인 대형 출판사와 달리, 이들은 실험성과 예술성이 강한 작품을 받아들여, 차별화에 성공했고, 동시에 젊은 작가들에게 워크샵과 교류의 장을 열어주면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이탈리아 예술학교들도 이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습니다. 이번에 소개된 작가들이 바로 이런 변환 속에서 이미지 도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신세대 작가들입니다. 이탈리아의 경험은 타이완 만화와 그래픽 노블의 미래를 고민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존②✨ 독립서점, 도서전 속 테마파크 올해 타이베이도서전에서 화제를 모았던 회전목마도 이번에 타이중에 왔습니다. 이곳은 해마다 주목되는 ‘독립서점 존’인데요. 전시장 한가운데 미끄럼틀과 바이킹 같은 놀이기구까지 마련되어 어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리위안 장관도 도서전을 참관하면서 직접 미끄럼틀과 회전목마를 타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겼다고 하네요.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리위안 문화부 장관 - 사진: 문화부 아이와 부모를 위한 다양한 강연은 물론, 보드게임, 종이접기, 탁본, 도서 제작 등 무료 DIY 체험도 준비되었습니다. ‘독립서점’ 하면 떠오르는 비주류적 이미지 대신, 친근한 공간과 아동 감성이 넘치는 장식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열었죠. 각 사점들도 NGO 단체와 함께 사회 의제를 담은 책들을 재미있게 소개했습니다. 존③✨ 타이중 테마관, 도서의 숲 타이베이도서전에 없는 ‘주최도시 존’도 가볼 만합니다. 아동도서전은 지역 자원의 균형을 위해 매년 다른 도시에서 열리기 때문에, 개최 도시의 색깔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내년까지 타이중에서는 시립도서관 겸 시립미술관 신관인 ‘녹미관(綠美館)’, 일본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아동 도서관 ‘아동 도서의 숲(童書之森)’, 그리고 기업인의 기부로 세워질 ‘뤄부선(羅布森) 도서관’ 등 새로운 문화 공간들이 속속 문을 열 예정인데요. 이런 분위기에 맞춰, 올해 타이중 테마관은 ‘숲’을 핵심 이미지로 삼아, 자연과 인문을 아우르는 타이중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숲을 주제로 한 타이중 테마관 - 사진: 타이중시정부 이어 타이중에서 자란 타이완 가수 ‘쉬자잉(徐佳瑩)’의 인기곡 ‘백마를 탄다(身騎白馬)’를 함께 들어보시죠. 존④~⑥✨ 그림책·아동도서·타이완 만화관, 아이들의 천국 아이와 함께 전시회를 방문했다면, ‘그림책 존’과 ‘아동도서 존’이 적합합니다. 연령별로 전시된 도서뿐만 아니라, 소리와 영상, 글씨와 그림이 하나가 되는 뉴미디어 콘텐츠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이 공간에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독서에 대한 취미를 키워줄 수 있습니다. 한편,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몰리는 인기 존 ‘타이완 만화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타이완 문화콘텐츠진흥원이 기획한 이 존에서는 대항해시대를 모티브로 타이완 만화의 새로운 시대를 소개했습니다. 섬나라 타이완의 역사와 전통문화, 종교, 환경보호 의제까지 모두 생생한 그림으로 전 세계에 펼쳐지고 있죠. 이 중 특히 타이완 만화관에서 전시된 웹툰 《길잡이(引路人)》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7년부터 연재된 이 작품은 타이완의 만간신앙을 바탕으로 망자를 사후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주인공은 사후세계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모셨던 신명들을 만나, 길잡이의 일을 함께 수행하게 되었는데요. 초자연적인 신명들이 실존 인물이 되고, 책에서만 보던 요괴 ‘모신아(魔神仔)’도 등장하며 기묘한 여정을 펼칩니다. 전통 민속 전설을 현대적 이야기로 재해석한 점이 가장 큰 매력이죠. 현재 작품은 휴간 중이지만, 영상화 작업이 추진되고 있어 곧 바로 새로운 형태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타이완 만화관에서 전시된 타이완 인기 웹툰 《길잡이(引路人)》 - 사진: 문화부 존⑦~⑨✨ 문학·수상작·문화부 테마관, 타이완 문학의 매력 앞서 소개해드린 존 외에도, ‘문학 존’, ‘수상작 존’, ‘문화부 특별 존’이 있습니다. 문화부 주최의 출판대상 ‘금정장(金鼎獎)’과 만화대상 ‘금만장(金漫獎)’의 수상작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동시에,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타이완 문학의 매력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동도서전이 막 끝났지만, 벌써부터 내년 전시회가 기대되네요. 또 어느 도시가 개최 도시로 선정될지 함께 지켜보시죠!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臺灣國際兒少書展。2. 黃旭磊,「首屆台灣國際兒少書展台中登場 文化部長李遠推『兒少優先』政策」,自由藝文。3. 「首屆臺灣國際兒少書展開幕!義大利主題國、臺中主題城市,邀請民眾跨越城市邊界,感受閱讀盛宴」,OPENBOOK閱讀誌。
새, 조류 냐 오 鳥 저 새 좀 봐! 칸 나 즈 냐오 看那隻鳥。 저건 무슨 종류의 새인가요? 저 스 선 머 냐오 這是什麼鳥? 참새 마 췌 麻雀 제비 옌 즈 燕子 비둘기 꺼 즈 鴿子 매 잉 鷹 까마귀 우 야 烏鴉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시간은 늘 앞으로 달려갑니다. 출근하기 싫은 월요일, 집과 회사를 오가며 흘려보내는 화, 수, 목, 그리고 마침내 불타는 금요일! 토요일은 행복과 자유가 가득하고, 어느새 마지막 일요일이 찾아오죠. 사람 평균 수명 80세, 1년에 52주로 치면, 인생은 52 곱하기 80, 4160개의 월화수목금토일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우리는 점점 늙어갑니다. 인류의 문명 또한 수많은 월화수목금토일로 이어져 있습니다. 시인 전궤이하이(曾貴海, 1946~2024)는 시작 〈팔요일(星期八)〉에서 세월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월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 회수된 잔해의 조각은 / 역사의 숲으로 자란다. (歲月循環不息/回收殘骸的碎片/長成歷史的樹林)” 한 사람의 인생은 유한하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역사는 끊임없이 쓰여지는 거죠.  팔요일 = 깨달음의 날 🌠 그런데 시 제목은 왜 ‘팔요일’일까요? 중국어에서는 요일을 숫자로 부르는데요. 월요일은 ‘일요일(星期一)’, 화요일은 ‘이요일(星期二)’, 수요일은 ‘삼요일(星期三)’, 목요일은 ‘사요일(星期四)’, 금요일은 ‘오요일(星期五)’, 토요일은 ‘육요일(星期六)’, 그리고 일요일만은 한국어와 같은 ‘일요일(星期日)’ 또는 ‘천요일(星期天)’이라 불립니다. 왜 일요일만 숫자가 아닐까요? 청나라 시절, 서양 달력을 도입하면서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요일을 숫자로 단순화했는데, 이 가운데 일요일은 일주일의 시작이자 끝이 되기도 해서, ‘칠요일’이란 말은 쓰이지 않는 거죠. 그렇다면 ‘팔요일’은 뭘까요? 일주일은 7일뿐이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입니다. 시인은 이 팔요일을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발견한 비밀”이라고 썼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가 속세의 반복이라면, 팔요일은 생과 죽음의 순환을 벗어난 ‘깨달음의 날’, 혹은 ‘해방의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는데, 인생의 끝에서 시간의 굴레를 뛰어넘고, 마침내 진정한 자유에 다다른 것이겠죠.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오늘은 시인 전궤이하이와 그의 작품을 함께 만나봅니다! 13편의 유작을 수록한 전궤이하이의 마지막 시집 〈팔요일〉 - 사진: 보커라이 시인이자 의사이자 사회운동가로서의 찬란한 삶 🎆 시인이자 의사, 그리고 사회운동가, 다양한 얼굴을 가진 전궤이하이는 한 인터뷰에서 “하나만 고른다면 무조건 시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60년 동안 중국어, 하카어, 타이완어로 500편이 넘는 시를 발표하며, 삶의 끝까지 창작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 가오슝시와 유가족의 노력으로 마지막 시작 〈팔요일〉의 이름을 딴 시집이 출판되었습니다. 13편의 유작은 영어로도 번역되어 중국어와 나란히 실렸습니다. 시인과 30년 넘는 친분이 있는 천치마이(陳其邁) 가오슝시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궤이하이는 의술로 환자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글과 행동으로 사회를 위로했다. 문학, 환경, 인권, 교육개혁까지, 그는 언제나 온유하지만 강인한 몸짓으로 가오슝과 타이완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2022년 신작 발표회에서 천치마이(陳其邁, 좌) 가오슝시장과 시인 전궤이하이가 함께 시를 낭송하고 있다. - 사진: 가오슝시문화국 도시녹화운동 ‘남방녹색혁명’ 🌳 그를 기리기 위해 별세 1주기에 맞춰, 그의 시작 16편을 바탕으로 한 음악회도 열렸습니다. 클래식, 록, 보사노바,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져, 시를 음악으로 재해석했죠. 공연 무대 ‘웨우잉 국가예술센터(衛武營國家藝術中心)’도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은 축구장 14개 크기의 ‘웨우잉 도회공원’ 안에 있는데, 원래는 군사기지였다가 주상복합 용지로 바꿀 뻔했지만, 시인은 ‘웨우잉 공원 촉진회’를 만들어 도시녹지를 지키기 위한 시민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운동은 ‘남방녹색혁명’으로 불렸고, 18년의 싸움 끝에 군사기지를 푸른 녹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열린 추모 공연은 더욱 특별합니다. 가오슝의 랜드마크 '웨우잉 국가예술센터(衛武營國家藝術中心)' - 사진: 센터 홈페이지 우리는 종종 “시간이 너무 없어서 못 한다”라고 말하죠. 하지만 시인의 삶은 그게 단순한 핑계일 뿐임을 보여줍니다. 가오슝현 자둥향(佳冬, 현재 핑둥현 소속)의 작은 하카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타이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골 사람이란 사계절의 변화, 꽃이 피고 지는 과정, 사람의 웃음과 눈물에 감동하는 사람이다. 나는 영원한 시골 사람이다. 남들과 나누고 존중하고 돕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시에 살면서도 늘 자연을 찾고 녹색 운동을 한다.” 이 말은 그가 왜 공원 운동에 앞장섰는지를 잘 보여주죠.  이어서 전궤이하이의 시를 바탕으로 한 하카어 노래, ‘山狗大後生樂團’의 ‘羊尾仔看詩’를 함께 들어보시죠. 문학에 빠진 소년 👦🏻 시인의 문학 씨앗은 고등학교 시절에 심어졌습니다. 당시 동창의 작품이 문학지 《야풍(野風)》에 실리면서 그는 큰 자극을 받았죠. 이를 계기로 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국어 선생님의 지도 아래 작품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시와 번역 작품을 위주로 읽었지만, 어려운 글자는 마치 ‘하늘의 글씨’처럼 다가왔다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어도 끝까지 읽어 내려갔고, 그 과정은 결국 튼튼한 창작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수학과에 진학했지만, 의사의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교사나 공무원은 정부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의사라면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반쯤은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결국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의사가 된 후에도 일과 문학 창작을 병행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같이 ‘아미바 시사(阿米巴詩社)’를 세우고, 타이완 남부 최초의 문학지 《문학계(文學界)》도 창간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민주화 바람을 타고 사회운동에도 뛰어들었는데, 환경보호, 도시계획, 정치개혁까지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2016년에는 차이잉원(蔡英文) 정부의 고급자문을 맡기도 했습니다.  라이칭더(우) 총통이 8월 24일 전궤이하이 장례식에서 유가족에게 고급자문 임명장을 전달하고 있다. - 사진: 가오슝시문화국 그의 작품은 일상과 사랑, 자연, 철학, 민족, 그리고 반항까지, 정말 다채로운 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그의 딸 전팅위(曾庭妤)는 아버지의 문학을 ‘인간세상과 땅의 문학’이라 정의했는데요. 지난주 소개해드린 시인 두판팡거(杜潘芳格)처럼, 하카계 시인으로서 타이완에 대한 사랑을 시로 담아냈습니다. 그리고 타이완 현지 이야기에 주목한 같은 ‘리시사(笠詩社)’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관련 프로그램:섬에서 태어난 여성의 나무, 침묵을 뚫은 시인 두판팡거(杜潘芳格) 2022년, 그는 중남미 권위 있는 문학상 ‘에콰도르 국제시가상(Ileana Espinel Cedeño)’을 수상해, 사상 최초의 아시아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대신 시상식에 참석한 지인은 그의 말을 인용해 “문학의 시는 세계의 진주이자 꿈의 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의 지혜와 철학을 담은 그의 문학은 타이완에 남긴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방송 시작에 소개해드린 시 〈팔요일〉처럼, 속세의 반복을 간파하면 모든 번뇌는 사라집니다. 삶이란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죠. 마음이 열리면 모든 날이 팔요일이 됩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曾貴海,《星期八:曾貴海給世界的話 華英詩.文集》。2. 曾貴海官方網站。3. 莊紫蓉,「孤鳥,樹人與海——專訪詩人曾貴海」,台灣放送。4. 「沒有您,不會有今日的衛武營——懷念曾貴海醫師」,衛武營國家藝術文化中心。5. 《紀實音樂劇場-歸來去》曾貴海醫師逝世周年紀念展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음력 7월 ‘귀신의 달’ 하면 떠오르는 중요한 전통, 바로 이번주 토요일에 열리는 중원절 제사 ‘푸두(普渡)’입니다. 이날은 인간세계로 찾아오는 귀신들을 위해 차려진 큰 ‘잔치’인데요. 풍성한 제물은 물론, 닭, 돼지, 생선으로 이루어진 ‘삼생(三牲)’도 빠질 수 없습니다. 삼생은 중국 고대 제사에서 비롯된 제물로, 하늘과 신령에 대한 깊은 존경을 담고 있습니다. 닭은 가족의 단합, 돼지는 상서로움, 생선은 풍요로움을 뜻합니다. 예전에는 꼭 통닭, 통돼지, 통생선을 올렸지만, 요즘은 환경을 생각해 빵이나 젤리로 만든 ‘채식 삼생(素三牲)’도 볼 수 있습니다. 타이완 제사상의 대표적인 제물, 닭, 돼지, 생선으로 이루어진 ‘삼생(三牲)’ - 사진: 리젠트 호텔 시인 두판팡거의 대표작,〈중원절〉과 〈푸두〉✍️ 중원절은 약간 무서우면서도 흥겹고 떠들썩한 명절입니다. 카니발 같은 제사를 통해 귀신들의 배를 채우는 한편, 남은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죠. 이러한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타이완 문학에는 중원절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요. 이 가운데, 하카계(客家) 시인 두판팡거(杜潘芳格, 1927~2016)의 시 〈중원절〉과 〈푸두〉는 특별히 눈길을 끕니다. 「你/喜愛在紛擾的人群裡/追求忘我。/而我/越來越清醒。/貢獻於中元祭典的豬,張開著嘴緊咬著/一個『甘願』/無論何時/使牠咬著『甘願』的,/是你,不然就是我。」-〈中元節〉 "너는/소란한 무리 속에서/분위기에 취해 즐기움을 좇고/나는/점점 마음이 더 또렷해진다./중원 제사에 바쳐진 돼지가 입을 벌린 채/꽉 물고 있는 건 ‘기꺼이’라는 한 마디/언제나/그 “기꺼이”를 물게 하는 이는/너, 아니면 나. -〈중원절〉 「鬼節到了/一隻一隻大豬,肚裡抱一大塊大冰塊/頭向祭典對象排整列/不過/他們的嘴沒含『甘願』/他們既然不甘心樂意犧牲了/以後/各人的罪要各人揹/還要加上殺豬殺羊的罪。」-〈普渡〉 "귀신의 절기가 찾아왔다./큰 돼지들이 배 속에 커다란 얼음을 안고/머리는 제사상 앞으로 가지런히 놓였다./그러나/그들의 입에는 ‘기꺼이’가 없다./그들이 기꺼이 희생하지 않았다면/이후엔/각자의 죄를 각자가 짊어지고/거기에 돼지와 양을 죽인 죄까지 더해야 한다." - 〈푸두〉 이 두 시에서 돼지는 단순한 제물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제사상에 올려진 존재로 그려지죠. 그리고 돼지 입에 물린 ‘기꺼이’는 원래 행운과 ‘기꺼이 원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귤인데요. 상서로운 의미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사람 손으로 억지로 넣은 거죠. 〈중원절〉에서 이 귤을 넣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너’일 수도 있고, 자기주장을 지키다 사회에서 밀려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돼지가 인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겠다고 나서겠어요? 겉보기엔 중원절의 의미를 재해석하려고 하지만, 시인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시의 울림은 훨씬 깊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2·28사건과 백색테러를 겪은 시인은 집단적 침목과 무관심을 비판하며, 생과 죽음이 맞닿는 중원절이라는 무대를 통해 그 시대를 성찰하고자 했습니다. 오늘은 하카어 창작으로 자아와 사회를 탐구한 시인 두판팡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언어로 쓴 타이완 문학의 발자취 👣 두판팡거는 타이완 문단에서 ‘언어를 뛰어넘은 세대(跨越語言的一代)’의 한 명입니다. 이 명사는 1967년 시인 린헝타이(林亨泰)가 제시한 단어인데, 1920년대에 태어나, 일본 교육을 받고 유창한 일본어로 창작할 수 있었던 타이완 작가들을 일컫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화민국 정부가 추진한 국어운동 때문에 이들은 중국어를 배워야 했고, 결국 일본어와 모국어(타이완어, 하카어, 원주민어 등)로는 창작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장벽을 넘어, 다언어 구사자로서 타이완 문학에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두판팡거 역시 하카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까지 구사할 수 있고, 특히 1987년 타이완 민주화 이후에는 하카어 창작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시란 시인이 대자연의 법칙과 현실 문제 앞에서 자신의 감각과 지식을 언어로 형성화하는 매체다.” 즉, 형식보다는 내면과 사상을 더욱 중시했던 거죠. 또한 그는 여성으로서, 이성과 감성을 함께 담은 작품으로 여성 시인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이 겪은 정치적·사회적 압박을 드러냈습니다. 민족적으로도, 성별적으로도 타이완 문단에 큰 영향을 남긴 인물입니다.   억압 속에서 움튼 창작의 씨앗 🌱 그럼 두판팡거의 인생을 조금 더 살펴볼까요? 신주(新竹)의 하카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 일본인만 다니던 ‘소학교(小學校)’에 들어가 귀족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학생들에게 괴로힘을 당하며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는데요. 이 고통을 풀기 위해 일본어로 시와 소설,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문학적 씨앗은 초등하교 4학년 교과서에서 피로 꽃을 묘사한 시를 읽으면서 마음에 심어졌다고 합니다. 정제된 글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거죠. 이후 일본 식민지 시대 타이완 유일의 여자대학 ‘여자고등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남편에게 완벽한 아내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신부학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심을 갖게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학업을 마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문학 창작을 이어갔습니다. '평안극'이라는 거짓 쇼 🎭 1947년 2·28사건 발발 후, 두판팡거의 친적들은 정부에 의해 잡혀가 처형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창작에 정치적 비판과 풍자를 짙게 담게 한 계기가 되었죠. 앞서 소개드린 〈중원절〉과 〈푸두〉외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1977년 발표한 〈평안극(平安戲)〉입니다. 평안극은 하카인이 겨울에 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상연하는 연극인데요.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자리처럼 보이지만, 두판방거는 오히려 평안극을 보는 관객들을 순종적이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年年都是太平年/年年都演平安戲/只曉得順從的平安人/只曉得忍耐的平安人/圍繞著戲台/捧場著看戲/那是你容許他演出的/很多很多的平安人/寧願在戲台下/啃甘蔗,含李子鹹/保持僅有的一條生命/看/平安戲。」- 〈平安戲〉 "해마다 태평한 해/해마다 평안극이 상연된다/순종만 아는 평안한 사람/참음만 아는 평안한 사람/무대를 둘러싸고/박수 치며 구경한다/그건 네가 허락한 무대/수많은 평안한 사람들/차라리 무대 아래서 사탕수수를 씹고, 자두정과를 머금는다/겨우 남은 단 하나의 목숨을 지켜내며/평안극을 본다." - 〈평안극(平安戲)〉 권위주의 정부의 억압 아래, 태평성대는 사실 허상에 불과했고, 평안극 역시 단지 쇼일 뿐이었습니다. 이 쇼를 보는 관객들은 불공정한 일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데만 집중했죠. 이 가짜 쇼가 해마다 상연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주도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묵인도 한 몫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과 ‘인내’는 미덕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수방관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하카인의 전통 문화를 빌려 당시 사회 분위기와 대중의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꽃처럼 피어나, 나무처럼 서다 🌲 한편, 타이완 현지 이야기에 착안한 현대시 시사 ‘리시사(笠詩社)’가 설립된 지 이듬해인 1965년, 두판팡거는 시사에 가입해 많은 회자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어 1992년에는 같은 시사 소속 여성 시인 천슈시(陳秀喜, 1921~1991)의 이름을 따서 지은 ‘천슈시 시상’을 수상했는데요. 가부장제에 대한 비반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천슈시와 달리, 두팡판거는 어머니의 따뜻함과 풍자의 음유를 함께 담아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자신을 ‘섬에서 자라난 여성의 나무’라고 부른 두팡판거는 타이완 땅에 깊이 뿌리내린 강인한 나무와도 같습니다. 하카 여성 시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외성인, 남성이 주도한 문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후배 시인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언어의 장벽은 오히려 그의 무기가 되어 타이완 문학에 소중한 선물로 남겼습니다. 엔딩곡으로 두판팡거와 같이 신주 신푸(新埔) 출신의 가수 정야쥔(曾雅君)의 ‘존재(存在)’를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越界的客家女詩人杜潘芳格(1927-2016)〉,臺灣女人。2. 傅元罄,「倖存者的責任:杜潘芳格的〈中元節〉與〈普渡〉」,傅元罄的沙龍。3. 洪淑苓,「導讀杜潘芳格:守護母語,灌溉真情與真理」,閱讀亻厓庄 — 客籍文學大師文選集。4. 〈杜潘芳格〉,客家雲。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黃仁勳) CEO,  AMD의 리사 수(蘇姿丰) CEO, 유튜브의 공동설립자 스티브 천(陳士駿), 야후의 공동설립자 제리 양(楊致遠), 그리고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리안(李安) 감독. 모두 귀에 익은 이름들이죠. 각자의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룬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타이완계 미국인이라는 사실! 타이완계 미국인 - 사진: 위키백과 캡처 미국 정부가 2020년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타이완계 미국인은 약 33만 3천 명으로, 2010년보다 10만 명이 늘어난 수치입니다. 하지만 조사 항목에는 ‘Taiwanese’ 옵션이 없고 ‘Chinese’만 존재해, ‘기타’에 따로 표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인구는 조사 결과보다 많을 것으로 보이죠. 베테랑 언론인 루스샹(盧世祥)이 최근 발표한 신작 《타이완인의 순정—타이완계 미국인(純情的台灣人—台美人)》, 수십만 명 타이완계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했던 루스샹은 지난 24일 신작 발표회에서 “미국에서 타이완을 위해 애쓴 이들은 타이완인의 순정을 보여줬다”며, “이 순정은 순진함이 아니라, 진심과 깊은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타이완계 미국인의 성취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타이완 민주화 이전에는 많은 이들이 중화민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타이완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피, 땀, 눈물이 모두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타이완계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유학을 통한 미국 이민 🧑‍🎓 타이완계 미국인(Taiwanese American), 줄여서 ‘대미인(臺美人)’, 조상이나 부모, 또는 본인이 타이완 출신인 미국 시민권자, 영주권자 그리고 거주자를 가리킵니다. 타이완은 이중국적을 허용하기 때문에 많은 타이완계 미국인들은 중화민국과 미국, 두 국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죠. 이들은 타이완과 미국의 관계를 이어왔고, 또 복잡한 정체성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타이완 민주화 이후에는 ‘중국계 미국인’이 아닌 ‘타이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타이완인의 미국 이주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시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미 그 발자취가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타이완 학생들이 유학을 위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는데요. 이 중 첫 주인공은 뉴욕대학교 경영학에 입학한 리옌시(李延禧, Ri Enki)입니다. 그는 학업을 마친 1911년 타이완으로 돌아와 금융업에 뛰어들었으며, 타이완 금융업의 선구자로 높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최초의 타이완인 리옌시(李延禧, Ri Enki) - 사진: 위키백과 1941년 ‘타이완 구미 동창회 명부’에 따르면, 타이완의 미국 유학생 수는 31명으로, 당시 타이완의 구미 유학 대상국 가운데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미국을 적대하게 되면서 타이완인 유학생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일부 타이완인 유학생들은 오히려 미국 정부의 징집에 응해 미군에 합류했다는 사실인데요. 일본과 미국 사이에 놓여 있던 타이완인들의 정체성은 그만큼 복잡했습니다. '타이완계 미국인'의 탄생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공과의 대립 속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인의 해외 이주를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여권 신청조차 어려웠었죠. 미국으로 갈 수 있었던 타이완인은 대부분 국민당 정부와 가까운 외성인들이었고, 중국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후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겁니다. 그 시절 미국은 중화민국을 ‘유일한 중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합법적인 이민 쿼터는 전부 타이완으로 주어졌는데요. 그래서 당시 미국에 정착한 이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중국계 미국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계염령과 백색테러가 휩쓸던 시절, 중화민국 정부에 불만을 가진 이민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학이라는 길을 통해 정부의 제한을 피해 미국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특히 타이완독립을 외친 이민자들은 ‘타이완계 미국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은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당시 타이완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타이완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큰 울림을 준 노래, 원샤(文夏)의 ‘황혼의 고향(黃昏的故鄉)’을 함께 들어보시죠. 일본 가요를 원곡으로 한 이 노래는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담고 있어, 타이완독립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이전에는 금지곡이었습니다. 시니어 교포와 주니어 교포 🧳 1970년대에 들어 타이완은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지만, 외교적으로는 난관의 연속이었습니다. 1971년 유엔 탈퇴에 이어 1979년에는 미국과 단교했죠. 이런 배경 아래 타이완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 물결이 일어났는데요. 게다가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원래 타이완에 주어지던 이민 쿼터는 거의 모두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1982년, 타이완계 미국인의 청원을 통해서야 비로소 타이완이 하나의 개채로 이민 인원수를 배정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타이완은 전자산업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을 미국으로 보냈고, 그 결과 1983년부터 1989년까지, 타이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국 유학생을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는 이민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경제와 정치 상황이 크게 개선되면서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와 유학생 수는 1990년부터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타이완을 중국과 구별해 인식하는 ‘본토의식’이 대두되었고, ‘타이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공식적으로 ‘중국계 미국인’을 대신했습니다. 또 민주화를 경계로, 이전 세대 이민자는 ‘노교(老僑, 시니어 교포)’, 이후 세대 이민자는 ‘신교(주니어 교포)’라고 불리며 이민사의 흐름을 확립했습니다. 이 파란만장한 역사는 바로 루스샹의 《타이완인의 순정》에 담겨 있습니다.  전화 응답기로 만든 라디오 📻️ 1980년대, 루스샹 역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타이완의 외교 슬럼프를 몸소 겪었는데요. 타이완 정부의 엄격한 감시 속에서 미국 내에서 타이완 소식을 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미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학생들은 전화 응답기를 이용해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고 온라인 공동체를 결성했습니다. 루스샹은 전화를 걸면 약 3분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 타이완계 미국인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를 리스크를 감수하며 타이완의 민주주의와 외교를 위해 힘썼고, 심지어 미국 의회에 직접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타이완계 미국인에게 블랙리스트는 그야말로 악몽이었습니다. 1949년 계염령이 선포된 후에는, 타이완독립 주장부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 좌파 발언까지 모두 금지 사항이었죠. 이러한 입장을 보인 사람들은 비자 발급이 거부되거나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1992년 형법 개정 이후에야 사라졌습니다. 리스트에 오른 많은 타이완계 미국인은 20~30년 동안 타이완에 돌아오지 못했고, 심지어 가족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은 늘 메이리다오에 있다 🫶🏼 《타이완인의 순정》의 부제목은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늘 메이리다오(타이완)에 있다(人在美利堅,心在美麗島)” 낯선 타국에서 타이완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 있었기에, 타이완은 가장 힘겨운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지나, 이제 타이완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잡고 있죠. 국내외 인사들의 협력을 통해 앞으로는 더 빛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邱祖胤,「盧世祥寫『純情的台灣人』 看見真誠深情台美人」,中央社。2. 臺灣之音,國家人權記憶庫。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요즘 타이베이에서 MZ세대가 가장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 혹시 아시나요? 정답은 지하철 레드라인과 그린라인의 환승역 ‘중산역’입니다! 최근 중산역 지하상가에서는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만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데요. 일본 인기작 《단다단》, 《사카모토 데이즈》부터 타이완 만화대상 ‘금만장(金漫獎)’ 수상작까지,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만화 세상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타이완 최대 서점 ‘청핀서점(誠品書店)’이 오는 9월 30일까지 진행하는 ‘2025 만화 페스티벌’의 일부입니다. 청핀서점이 주최한 '2025 만화 페스티벌' - 사진: 안우산 일본 인기작 《단다단》 - 사진: 안우산 타이완 전역의 청핀서점마다도 색다른 전시가 준비되어 있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데요. 중산역 난시(南西) 지점에서는 중국 전통 연극 ‘경극’을 슈퍼히어로 서사로 재해석한 타이완 만화《옌톄화(閻鐵花)》를 만날 수 있고, 시먼(西門) 지점에서는 ‘보이즈 러브(Boys’ Love)’를 주제로 한 타이완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수도권 밖 지점들 역시 다채로운 콘텐츠로 가득해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중국 전통 연극 ‘경극’을 슈퍼히어로 서사로 재해석한 타이완 만화《옌톄화(閻鐵花)》 - 사진: 안우산 그리고 주목할 만한 행사 또 하나! 타이완 문화부 주최의 금만장도 지난 6일 노미네이션을 발표했는데요. 224개 출품작 중 단 24개만 본선에 올라 9개의 상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또한 특별공로상은 1980년대부터 타이완 만화산업에 힘써온 황젠허(黃健和) 편집자가 차지했습니다. 그는 타이완 최초로 ‘만화 편집자’라는 직함을 사용한 인물로, 타이완 만화의 미국, 유럽 진출을 이끌었고, 여러 해외 만화 페스티벌에서 타이완 테마관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2014년 금만장 최우수 편집장을 받은 데 이어, 올해 특별공로상까지 거머쥐며 그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죠. 그럼 오늘은 만화가들의 든든한 버팀목, 타이완 만화의 숨은 주역 황젠허 편집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만화 편집자란? 🧑🏻‍🏫 만화 편집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이에 황젠허는 한 인터뷰(ETtoday)에서 “편집자는 마치 택배원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주간 만화지 《요일 만화(星期漫畫)》에서 편집자를 맡았던 그는 만화가의 작업 일정을 관리하고, 원고를 재축하고, 또 받은 원고를 인쇄소에 넘기는 일까지 전부 챙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일 만화》는 매주 수요일 발행이라,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일요일쯤 원고를 받는 것였는데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인쇄소로 가는 길에, 아직 원고가 완성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예인에게 매니저가 있고, 운동선수에게 코치가 있듯이, 만화가에게는 편집자가 있는 겁니다. 만화가가 오롯이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편집자는 출판 업무부터 생활적인 부분까지, 창작 외의 모든 일을 챙겨주는 존재죠. 그래서 만화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편집자는 만화가의 첫 번째 독자이기도 합니다. 작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만화가의 철학과 독자 취향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이죠. 황젠허는 한 방송(夜深人未靜)에서 타이완 만화의 거장 정원(鄭問)의 편집자를 맡았던 시절을 회상했는데요. 정원은 언제나 그림의 기술과 작품의 깊이를 고민하고, 늘 먼 곳을 바라보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그의 작품은 항상 시대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거죠. 황젠허는 “그와 함께 일하는 편집자 역시 끊임없이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며, “이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통쾌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만화의 주체는 만화가에게 있지만,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지는 편집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만화가와 편집자의 호흡이 한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열쇠라고 할 수 있죠. 타이완 만화 대가 정원(鄭問) - 사진: 위키백과 만화가와 편집자의 결정체 🖌️ 연극학과를 졸업한 황젠허는 처음에 영화업계에서 일하다가 출판업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는데요. 때마침 민주화의 바람이 불던 1980년대 말, 출판 심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타이완 시장은 일본 만화의 해적판으로 넘쳐났습니다. 이때 본토 만화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기 위해 창간된 잡지가 있었죠. 바로 《요일 만화》입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한 황젠허는 1989년 5월, 이 잡지의 편집자로 합류해, 정원, 아오유샹(敖幼祥), 차즈중(蔡志忠) 등 대표적인 타이완 만화가들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당시 만화 독서는 국민적 취미였던 만큼 관련 산업도 빠르게 성장했는데요. 하지만 《요일 만화》는 끝내 일본 만화지의 벽을 넘지 못해 1991년 아쉽게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타이완 본토 만화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한 《요일 만화》 - 사진: 위키백과 이후 황젠허는 성인 독자를 겨냥한 만화지 《하이(HIGH)》 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은 국내외 작품을 함께 실을 수 있어 훨씬 다양한 시도가 가능했는데, 중국의 6.4항쟁 같은 정치 이슈를 다룬 작품도 게재될 정도로 도전적인 잡지였습니다. 타이완 만화가에게는 글로벌 만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황젠허는 여기서 한 벌 더 나아가, 타이완 만화가들의 부족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10명의 시나리오 작가를 초청해 젊은 만화가들과의 협업을 추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협력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에 황젠허는 한 팟케스트(閱讀隨身聽)에서 “현재 타이완에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젊은 만화가가 50명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작품을 완성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단 5명뿐”이라며, “물론 혼자 해내는 것도 좋지만,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 작품의 성공은 만화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죠. 편집자, 그리고 협력 작가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결과물입니다. 이어서 2022년에 진행된 음악의 만화화 프로젝트 ‘섬의 광상곡(島嶼狂想曲:聽台灣在唱歌)’에 선정된 노래, 펑페이페이(鳳飛飛)의 ‘박수 소리가 날 때(掌聲響起)’를 함께 들어보시죠. 타이완 만화만의 길 🛣 타이완이 1990년부터 일본 만화를 합법적으로 도입한 후, 전체 만화 환경은 자연스롭게 일본 만화가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타이완 만화의 미래를 고민해온 황젠허는 “타이완 만화가 일본 만화만 따라갈 수 없다”며,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2000년대 초반, 그는 하오밍이(郝明義) 로커스(大塊) 출판사 사장과 논의를 거쳐, 일본 외의 만화 작품을 타이완으로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탄생한 출판사가 ‘다라(大辣, 매운 맛)’ 출판사인데요. 황젠허는 다라의 편집장을 맡아, 타이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럽 만화를 수입하는 한편, 과거 《요일 만화》에서 연재했던 타이완 만화도 다시 출판하며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는 데 힘써왔습니다. 2012년부터는 세계 3대 만화 페스티벌 중 하나인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도 해마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이완 만화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에 황젠허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만화를 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갑자기 어떤 만화를 봐야 할지 모르게 된다. 지금 타이완 만화는 사람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황젠허는 평생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 제작을 목표로 최근 10년간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를 담은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에 주력해 왔습니다. 이 장르는 전통 만화와 달리 강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적합하죠. 다라출판사는 그래픽 노블 분야의 선두자로서 2019년부터 그래픽 노플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관련 프로그램:책과 함께 새해 맞이하기! 타이완 연말의 문학 행사들 🎆 황젠허는 한 인터뷰(중앙사)에서 “비주류도 결국 주류가 될 것이다. 잠복하는 과정 속에서도 만화가들은 계속 창작하며, 발굴의 순간을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십여 년간 쏟아부은 노력 덕분에, 이제 타이완 만화는 국제무대에서도 점점 빛나고 있습니다. 특히 타이완 특색과 개인 색깔을 가진 작품들은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그리고 황젠허는 여전히 그의 자리에서 작품이 가져다주는 ‘매직 아워’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王寶兒,「金漫獎24件入圍出爐 黃健和獲特別貢獻獎」,中央社。2. 陳政偉,「創造圖像小說 島嶼風味的大人漫畫」,中央社。3. 邱顯忠,「閱讀隨身聽S2EP10》大辣文化總編黃健和/圖像文學話說從頭&漫畫編輯30年目睹之怪現況(才怪)」,閱讀隨身聽。4. 陳怡靜,「台漫歐洲新契機.台灣風格》不只日漫,在漫畫的世界裡看世界的漫畫 ft.大辣黃健和、漫畫家小莊」,OPENBOOK。5. 林育綾,「全台第一位『漫畫編輯』!曾催稿催到印刷廠⋯最懷念大師鄭問『從不拖稿』」,ETtoday。
덥다 / 러 / 熱 너무 더워요. / 타이 러 러 / 太熱了 너무…해요, 너무…하다. / 타이…러 / 太…了 방이 너무 더워요. / 팡 지엔 타이 러 러 / 房間太熱了 춥다 / 렁 / 冷 너무 춥다 / 타이 렁 러 / 太冷了 방이 너무 춥다. / 팡 지엔 타이 렁 러 / 房間太冷了 건조하다 / 깐 자오 / 乾燥 너무 건조하다 / 타이 깐 자오 러 / 太乾了 방이 너무 건조해요 / 팡 지엔 타이 깐 자오 러 / 房間太乾了。 습하다 / 차오 스 / 潮濕 너무 습하다 / 타이 차오 스 / 太潮濕了 방이 너무 습하다 / 팡 지엔 타이 차오 스 / 房間太潮濕了。 시끄럽다 / 차오 / 吵 너무 시끄럽다 / 타이 차오 러 / 太吵了 옆방이 너무 시끄러워요. / 거 삐 타이 차오 러 / 隔壁太吵了。 더럽다 / 자앙 / 髒 너무 더러워요 / 타이 자앙 러 / 太髒了 방이 너무 더러워요 / 팡 지엔 타이 자앙 러 / 房間太髒了。 너무 싱거워요. 타이 단 러 / 太淡了 너무 짜요. / 타이 시엔 러 / 太鹹了。 이 스파게티 너무 짜요. / 이 따 리 미엔 타이 시엔 러 / 這義大利麵太鹹了。 너무 매워요 / 타이 라 러 / 太辣了 너무 달아요. / 타이 티엔 러 / 太甜了 말차라떼가 너무 달아요. / 모 차 나 티에 타이 티엔 러 / 抹茶拿鐵太甜了。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는 무엇일까요? 국가원수로부터 그 이름을 건 상을 받는 것,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2001년부터 2년마다 수여되는 총통문화상이 지난 31일 올해의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이 중 문학 분야의 주인공은 두 분인데요. 문화개척상의 허정광(何政廣) 출판인, 그리고 문화청년상의 린리칭(林立青) 작가입니다. 전자는 예술지 《예술가(藝術家)》의 창간인으로, 타이완 예술 출판의 지평을 넓혀온 인물이고, 후자는 공사 현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글로 옮겨, 노동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작가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걸어온 이 두 문화인은 오는 10월 17일, 라이칭더(賴清德) 총통으로부터 상을 직접 받을 예정입니다.  린리칭 작가와 그의 대표작 《일하는 사람(做工的人)》에 대해서는 과거 방송에서 소개해 드린 바 있는데, 오늘은 타이완 예술 출판의 거장 허정광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관련 프로그램:[근로자의 날] 린리칭(林立青) “근로자들 위해 글쓴다” 살아있는 미술 백과사전 📗 사실 이번 총통문화상 수상 이전에도 허정광은 이미 큰 영예를 안았던 인물입니다. 10년 전인 2015년, 문화부가 주최하는 출판대상 ‘금정장(金鼎獎)’에서 특별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요. 그해 수상식에서 그는 “인생은 예술로 풍부해지고 예술은 삶으로 빛난다”며,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특별한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과 만나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창간한 《예술가》는 타이완의 대표적인 예술지로, 2012년에는 세계 10대 예술지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올해로 창간 50주년을 맞아 허정광이 총통문화상을 받은 것은 더없이 의미 있는 순간이죠. 《예술가》 의 영향력은 거리와 골목의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5년 창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타이베이시정부가 잡지사가 있던 골목을 ‘예술가의 골목’이라 명명했고, 심지어 잡지사가 이사한 후에도 새 건물이 있는 거리마저 ‘예술가의 거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국가급 잡지’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죠. 《예술가》 잡지사가 위치한 골목과 거리는 ‘예술가의 골목’, ‘예술가의 거리’로 명명되었다. - 사진: 위키백과 화가인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허정광은 중학교 미술 선생님의 격려로, 예술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미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형 세 명만큼의 천부적인 회화 재능은 없었지만,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호기심을 통해 미술 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신문에 글을 기고하며 일본어를 배우고, 글로벌 예술계의 흐름을 꾸준히 공부해 탄탄한 지식의 토대를 쌓았죠. 졸업 후에는 여러 신문에서 예술 칼럼을 집필하며 국내외 미술사 전문서를 잇따라 출간했습니다. ‘살아있는 미술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타이완의 대표적인 예술지 🎨 1970년 타이완 최초의 미술 전문지 《라이온 미술(雄獅美術)》이 창간되자, 발행인 리셴원(李賢文)의 초청으로 허정광은 초대 편집자로 합류했는데요. 그러나 5년 후 《라이온 미술》이 순수 예술지에서 종합 간행물로 개편되면서 사직을 결정했습니다. 예술에만 전념하고 싶은 그는 “타이완에는 반드시 순수 예술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지인들과 함께 《예술가》를 창간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잠깐 살펴볼까요? 《예술가》가 창간된 1975년은 타이완이 유엔에서 탈퇴한 지 불과 4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비록 정치적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허정광은 타이완의 예술가를 세계에 알리고, 또 해외 예술가를 타이완에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잡지 이름 ‘예술가’는 화가 시더진(席德進)의 제안으로 지어진 건데요. 특정 지역성을 배제하고, 예술가라면 누구나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길 바랐던 거죠. 지금 돌이켜보면, 1970년대 타이완 미술계에서 전개된 ‘향토운동’의 한 흐름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예술가》는 첫 발행과 함께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출판 이듬해부터 거의 해마다 금정장을 수상했고, 허정광이 몸담았던 《라이온 미술》에도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습니다. 회화, 조각, 사진, 건축, 패션, 디자인, 공예, 종교 예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쉽게 읽히는 전시 소개부터 깊이 있는 평론까지 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술가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대중과 함께 고민하는 장이 되었죠. 이에 허정광은 중국시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문가와 일반 독자들이 모두 이 잡지에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관련 프로그램:“상상력은 당신의 초능력!” 라이온 펜슬과 라이온 출판사 600페이지의 '헤비급 잡지' 📑 1976년, 허정광은 교류 활동에 참여하러 미국에 향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뜻밖의 제안을 받았는데요. 한 미국 국무부 관원이 “미국으로 이민 와서 잡지를 운영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은 겁니다. 타이완이 곧 미국과 단교할 거라는 소식까지 들려왔지만 허정광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곧바로 타이완에 돌아왔습니다. 《예술가》의 경쟁지 《라이온 미술》이 1996년 폐간을 맞이한 반면, 《예술가》는 1999년 9.21대지진 때 하루 발행이 늦어진 것을 빼면, 매월 22일 꾸준히 출판되어 왔습니다. 초창기에는 교과서와 비슷한 크기와 분량이었지만, 1990년대 예술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무려 600페이지, 1킬로에 달하는 ‘헤비급’ 잡지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광고 협력 덕분에 예술지의 선두 자리를 굳히고 ‘벽도 잡지’라는 별명까지 얻었죠. 이후 2007년에는 첫 개편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예술가》 표지들 - 사진: 예술가 잡지 이어 타이완 대표 가수 차이이린(蔡依林, Jolin)의 ‘최고의 아티스트(大藝術家)’를 함께 들어보시죠. 일반인 화가 '홍통 열풍' 👨‍🎨 대중과의 예술 소통에 전념한 허정광은 수많은 타이완 예술가를 발굴했습니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일반인 화가 홍통(洪通)인데요. 50세에 그림 창작을 시작한 홍통은 신비롭고 원시적인 화풍으로 유명하고 ‘아시아의 피카소’로 불렸습니다. 1973년 아직 《라이언 미술》에 근무했던 허정광이 ‘홍통 특집’을 발표하자, 타이완 예술계에는 순식간에 ‘홍통 열풍’이 불었습니다. 《예술가》 창간 이후, 홍통으로부터 개인전을 열고 싶다는 전화를 받은 허정광은 그 자리에서 전시를 준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전시장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미국신문처(현 2.28국가기념관)’이었습니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전시 첫날부터 매일 5만 명이 줄을 서서 입장했고, 결국 2주 예정이던 전시는 한 달로 연정되었습니다. 주타이완 미국 대사가 여러 번 전시장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행정수반이었던 장징궈 전 총통도 관람을 계획했습니다. 비록 홍통을 둘러싼 논란으로 방문이 취소되었지만,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덕분에 《예술가》는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죠. 전시가 끝난 후 홍통은 감사의 뜻으로 허정광에게 그림 한 점을 선물했습니다. 이에 허정광은 ‘신베이시 문화 잡지’에서 “그 시절 예술가들은 전시를 통해 해외 진출의 기회를 꿈꿨다”며 “정규 예술 교육을 받지 않은 홍통의 작품은 강한 서민 정서와 대중적 매력이 있어 유명 화가 못지않는 인기를 누렸다”고 설명했습니다. 홍통(우2)을 찾아간 허정광(좌1) - 사진: 예술가 잡지 이처럼 뛰어난 안목과 과감한 결단이 있었기에 《예술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시대라는 도전에 직면한 지금도, 끊임없는 혁신으로 독자와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창간 당시 36세였던 허정광은 올해 86세가 되어도, 하루도 빠짐없이 가장 먼저 사무실에 도착합니다. 남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묵묵히, 정성껏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王寶兒,「第13屆總統文化獎得主出爐 何政廣、林立青摘獎」,中央社。2. 辜人幾,「《藝術家》40」,光華雜誌。3. 吳垠慧,「《藝術家》40年 何政廣走堅持的路」,中國時報。4. 江羚瑜,「NO.31│臺灣藝術教育先行者 │「藝」生精彩何政廣」,新北市文化季刊。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요즘 날씨는 정말 견디기 힘드시죠. 태풍과 계절풍이 몰고 오는 폭우, 그리고 고기압으로 인한 폭염이 번갈아 가며, 8월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날씨 속에서 슬며시 다가오는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음력 7월 ‘귀신의 달(鬼月)’입니다. 귀신의 달은 보통 양력 8~9월 사이에 찾아오는데, 올해는 비교적 늦은 8월 23일부터 9월 21일까지인데요. 그 이유는 ‘윤6월(閏月)’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음력 6월이 두 번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력 8월도 뒤로 밀리게 된 거죠. 달력과 계절의 질서를 수호하는 '윤월' 🌕 왜 그럴까요? 우선, 음력은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입니다. 달이 삭, 초승, 상현, 보름, 하현, 그믐으로 변하는 주기는 평균 29.5일인데, 이 기준으로 하면 1년은 365일이 아닌 354일이 되고, 양력과는 11일 차이가 나죠. 또 매년 쌓이다 보면, 추운 8월, 더운 2월 같은 계절의 혼란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균 3년에 한 번, 한 달을 추가해 계절과의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이렇게 추가되는 달은 바로 ‘윤월(閏月)’, 또는 ‘윤달’이라고 합니다. 올해의 윤월은 바로 6월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달을 윤월로 정해야 할까요? 기준은 24절기입니다. 24절기 중 각 달의 두 번째 절기를 ‘중기(中氣)’라고 부르며, ‘우수’, ‘곡우’, ‘춘분’, ‘소만’, ‘하지’, ‘대서’, ‘처서’, ‘추분’, ‘상강’, ‘소설’, ‘동지’, ‘대한’ 등이 있습니다. 원래는 한 달에 중기 하나가 있는 게 정상인데, 올해는 음력 6월에 중기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윤6월’이 생겼죠. 다시 말해, 윤월은 고정된 달이 아니라, 중기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겁니다. 지금의 타이완은 더 이상 농업 중심 사회는 아니지만, 사계절의 질서를 담고 있는 음력은 여전히 사람들의 일상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춘절, 단오, 추석 같은 큰 명절은 물론, 자신의 음력 생일만 챙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존재감이 강한 음력 7월도 다양한 전통을 지켜야 하는 시기죠. 인간세계로 오는 귀신들과 무사히 잘 보내기 위해, 결혼과 이사 같은 큰일을 피하는 게 좋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특히 올해처럼, 평균 19년에 한 번 찾아오는 윤6월이 있는 만큼, 귀신들이 한 달 늦게 나오는 바람에, ‘음기’가 더 강해진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특별한 한 달로 여겨지는 거죠. 귀신의 달은 아직 2주 정도 남았지만, 타이완 문학계는 벌써 이 분위기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는데요. 타이완문학관이 주최하는 ‘판타지 타이완(魔幻臺灣), 타이완 문학 전시회’가 어제(10일)부터 오는 20일까지 오사카 중앙공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최대 명절 ‘우란분절(오봉 お盆, 양력 8월 13~16일)’을 맞아, 민간전설부터 도시괴담, 요괴, 귀신, 신명까지, 타이완 문학의 환상적인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시원한 전시회 현장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위 타이완' 마스코트를 가지고 판타지 문학 전시회를 찾은 일본인 여행객들 - 사진: CNA "드디어 왔구나!", 타이완문학관 x 성황묘 🌟 지구촌의 대축제, 2025 오사카 엑스포가 지금 한창이죠. 사실 이번 전시회는 타이완 문화부가 오사카에서 개최하는 ‘위 타이완(We Taiwan)’ 문화 전시회의 일환인데요. 지난해 파리 문화올림픽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엑스포 기간에 타이완의 소프트 파워를 세계에 다시 알리고자 하는 행사입니다. 그리고 문화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문학’이죠. 특히 타이완은 산림, 광야, 해양 등 웅장한 자연경관을 품은 나라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이야기들이 무척 많죠. 또한 식민과 이민의 역사 속에서 여러 민족과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타이완만의 유령, 요괴, 신령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문학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가 보다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도록, 타이완문학관은 특별한 콜라보도 준비했습니다. 지난 27일, 350년 역사를 지닌 타이난 푸청 성황묘(府城城隍廟)에서 기원식이 열렸는데요. 문학관과 사찰 측이 협업해 만든 기념품은 ‘과로(過爐)’라는 전통의식을 거쳐 신명의 기운을 받았습니다. ‘괴로’란 향을 피우는 향로 위에서 물건을 돌리는 의식입니다.  지난 27일 타이난 성황묘에서 열린 기원식 - 사진: CNA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성황묘에 걸린 편액(현판)인데요. 이 편액에 적힌 글은 전시회의 오프닝 멘트로 활용되었습니다. 바로 ‘이래요(爾來了)’, “그대, 왔구나”라는 글귀입니다. 타이완 민간신앙에서 성화묘는 인간세계와 저승의 사법을 관장하는 곳, 지금으로 치면 법원이나 재판소 같은 곳이죠. 그래서 “그대, 왔구나”라는 말에는 “당신의 모든 행위를 신명 앞에서 돌아보라”, “잘못이 있다면 고치고 반성하라”는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 편액의 의미를 살려,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드디어 왔구나”라는 인사를 건넵니다. 단순한 환영을 넘어, 전시 주제와 정서를 이어주는 참 재치있는 발상이죠. 전시회 오프닝 멘트로 쓰인 성황묘 간판 '이래요(爾來了)' - 사진: CNA 타이완 요괴를 일본으로 알리는 작가들 전시 콘텐츠도 풍부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타이완 판타지 문학 작가들과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첫 시작은 어제(10일) 음악인이자 작가 장자샹(張嘉祥)의 강연였습니다. 작가 주유쉰(朱宥勳)과 함께 ‘가사의 문학성’을 주제로, 장자샹이 직접 창작한 ‘요괴 유니버스’를 소개했습니다. 이어 오는 16일, 작가 츄창팅(邱常婷)은 타이완 판타지 문학과 아동문학 속 요괴의 모습을 탐구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17일, 타이완 판타지 문학의 거장 간야우밍(甘耀明) 작가는 타이완의 현대사를 환상 문학 기법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소개할 겁니다.  이 중 장자샹과 간야우밍 작가는 과거 방송에서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은 아직 조금 낯선 이름일 수도 있는 츄창팅 작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에 앞서, 타이완 판타지 문학의 분위기를 음악으로 먼저 느껴보시죠. 장자샹이 소속된 타이완어 밴드 ‘촌사람(裝咖人)’의 노래를 띄워드립니다. 지난 10일 열린 작가 장자샹과 주유쉰의 공동 연설 - 사진: 문화부 가장 큰 가능성 지닌 MZ작가, 츄창팅 여러 소설상과 문학상을 수상한 츄창팅은 최근 큰 주목을 받고 있는 MZ작가 중 한 명입니다. 유명 작가 장이쉬안(張亦絢)은 그를 “앞으로 20년간 가장 큰 자극성과 가능성을 지닌 타이완 소설가 중 한 명”으로 평가했을 정도입니다. 츄창팅은 《해리 포터》 시리즈에 열광하던 소녀 시절부터 머릿속에 떠오른 판타지를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학 입학 후 교수의 격려를 받아 타이완에 실존하는 판타지를 쓰게 되었죠. 2015년 발표된 그의 데뷔작 《괴물의 고향(怪物之鄉)》은 고향 타이동(台東) 타이마리(太麻里)의 민간전설을 모티브로 한 소설입니다.  츄창팅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나무의 향기와 흙의 냄새, 그리고 안개 낀 산림 속을 걷는 듯한 현장감이 느껴집니다. 타이완의 대표 요괴 ‘모신아(魔神仔)’부터, 잘 알려진 도시전설 ‘빨간 옷 소녀(紅衣小女孩)’까지, 이 땅에 스며든 신비로운 존재들이 그의 문장에서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이처럼 초자연적이면서도 향토적인 이야기를 쓰기 위해 그는 언제나 현지 조사에 철저합니다. 대학원에서는 자연문학의 거장 우밍이(吳明益) 작가 아래서 글쓰기 훈련을 받았고, 덕분에 “이야기를 쫓는 재미”를 실감했다고 합니다. 산을 쓰기 위해선 직접 산에 들어가 자연을 체험하고, 전통문화를 이야기하려면 그 현장을 찾아갑니다. 이러한 꼼꼼한 자세가 바로 그의 창작 원칙입니다. 소재는 다양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소년소녀의 성장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이런 관심은 그를 아동문학 연구로 이끌었습니다. 현재 아동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엔 판타지 이야기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상력을 키우는 좋은 매체가 되었다. 어린 독자들이 판타지에 흥미를 잃는다면, 판타지 문학은 곧 사라질 것이다.” 현실은 판타지 세계가 아니지만, 판타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현실은 오히려 더 삭막하고 지옥 같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보다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상상력을 가진 독자로서 판타지를 맞이해보면 어떨까요? 다가오는 귀신의 달, 신비한 존재들을 향한 존경의 마음으로 이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주 수요일,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에서 지금 오사카에서 진행 중인 ‘위 타이완’ 문화 전시회 소식을 보다 자세하게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楊思瑞,「魔幻台灣文學展前進日本大阪 府城名匾當開場意象」,中央社。2. 楊思瑞,魔幻台灣文學展前進日本大阪 府城名匾當開場意象,中央社。3. 「魔幻臺灣」——臺灣文學展,We Taiwan。4. 薛巧妮,「兒少小說創作相談室>為誰而寫?邱常婷談少年小說創作的幾種可能」,兒少文學與文化研究誌。5. 蔡雨辰,「【新手上路】以田野調查 累積狩獵現實的能力──邱常婷《怪物之鄉》」,OKAPI。6. 羅士庭,「【當月精選】天鵝般的小説怪物:邱常婷」,聯合文學。
이사 반 자 搬家 나 내일 이사해. 내일 이사해요. 워 밍 티엔 반 자 我明天搬家。 내가 (이삿짐) 옮겨줄게요. 워 방 니 반 我幫你搬。 새 집 주소 알려 주세요. 칭 가오 수 워 신 자 더 디 즈 請告訴我新家的地址。 이사 업체는 예약했어요? 이삿짐센터는 예약했어? 반 자 공 스 위 위에 러 마 搬家公司預約了嗎? 라벨 뱌오 치엔 標籤 라벨을 붙이다. 티에 뱌오 치엔 貼標籤 박스는 어디에 둘까요? 샹 즈 야오 팡 자이 나 리 箱子要放在哪裡? 가구는 어디에 둘까요? 자 쥐 야오 팡 자이 나 리 家具要放在哪裡? 가구 자 쥐 家具 냉장고는 어디에 둘까요? 빙 샹 야오 팡 자이 나 리 冰箱要放在哪裡? 냉장고 빙 샹  冰箱 침대는 어디에 둘까요? 촹 야오 팡 자이 나 리 床要放在哪裡? 침대 촹 床  전자레인지는 어디에 둘까요? 웨이 보 루 팡 자이 나 리 微波爐要放在哪裡? 전자레인지 웨이 보 루 微波爐 이사 도와줘서 고마워요! 시에 시에 디 방 워 반 자 謝謝你幫我搬家! 새 집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워 헌 시 환 신 자 我很喜歡新家!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2025년 하반기로 접어들 준비가 되셨나요? 8월이면 빠질 수 없는 날이 있죠. 바로 8월 8일 아버지날입니다. 숫자 ‘8(八)’의 중국어 발음이 아버지(爸爸)와 비슷해서 정해진 날인데요. 아버지날을 나흘 앞두고, 타이완 곳곳에서는 모범 아버지의 표창식이 열리고, 관련 할인 이벤트도 한창입니다.  타이완 문학에서 ‘아버지’ 하면, 주즈칭(朱自清)의 수필 <아버지의 뒷모습(背影)>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이 작품은 타이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필독 수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100년 전에 쓰인 글이지만, 늙은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귤을 사 들고 허둥지둥 왔다갔다하는 뒷모습은 아직도 독자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타이완 원로 작가 왕딩쥔(王鼎鈞)은 2007년 홍콩의 《명보월간(明報月刊)》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는데요. “신문학 작품(중국어 구어체로 쓰인 현대 문학)을 보면, 어머니를 다룬 작품은 많지만, 아버지를 묘사한 작품은 적고, 그 가운데 잘 쓴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어머니는 사랑과 희생, 고통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울릴 수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아버지를 쓴다면, 같은 감동을 장담하기 어렵다.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가족의 안정감과 체면, 그리고 사회적 성공까지 기대되는 존재다. 그러나 이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아버지는 흔치 않기에, 문학으로 다룰 만한 소재도 많지 않다. <아버지의 뒷모습> 속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는 따뜻한 아버지지만, 사회적으로는 실패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주즈칭은 어떻게 아버지를 저렇게 쓸 수 있었을까?”하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이런 시선 속에는 자기 아버지도 같은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숨어 있다.”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서툰 모습이나 약한 모습을 마주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게 되죠. 아버지도 결국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어른이 된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왕딩쥔은 어떤 아버지일까요? 지난주 소개해 드린 ‘이아(爾雅)출판사 대표작 50권’ 중 그의 ‘회고록 4부작(《昨天的雲》,《怒目少年》,《關山奪路》,《文學江湖》)’이 4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외에도 저작 3권(《左心房漩渦》 、《碎琉璃》、《江河旋律》))이 리스트에 올라, 가장 많은 작품이 선정된 작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사업 황금기에 미국 이민을 선택한 아버지이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이상적인 아버지죠. 오늘은 80년 넘게 글을 써온 왕딩쥔 작가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관련 프로그램:반세기 동안 꽃피운 문학의 나무, ‘이아(爾雅)출판사’ 50주년 왕딩쥔의 회고록 4부작 - 사진: 보커라인 글쓰기는 배신하지 않는다 ✍️ <아버지의 뒷모습>이 발표된 1925년, 왕딩쥔은 중화민국령 산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2025년을 살고 있는 그는 100세를 맞았습니다. 이 나이에 여전히 컴퓨더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믿기시나요? 더 놀라운 것은 올해 3월, 신작 두 권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겁니다. 하나는 그가 직접 작품을 골라 편집한 선집 《강하의 멜로디(江河旋律)》, 또 하나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후배 작가 청치펑(程奇逢)과 함께 쓴 공동 에세이집 《네 손의 협주(四手聯彈)》입니다. 정말 작가라는 직업에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는 문학의 실천자죠. 왕딩쥔은 여러 인터뷰에서 글쓰기의 자세를 강조해 왔는데요. “글은 명절에만 쓰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결혼할 때나 일식과 월식이 있을 때만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낚시도 백화점 할인도 아니고, 매일 출근 도장 찍듯 써야 한다. 글쓰기는 애왕동물을 돌보듯,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보고 싶고, 그를 위해 일찍 집에 가고, 늦게 잠드는 일이다. 글쓰기는 가려움증이자 중독이다. 아침저녁으로 생각하고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성실함이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산둥 명문가 출신인 그는 주류회사를 창업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국민정부(중국국민당이 집권하던 중화민국의 과도정부)를 따라 안후이로 옮겨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14살의 어린 나이에 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1949년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히는 일도 겪게 되었는데요. 이후 석방되어 타이완으로 넘어왔지만, 국민당 정부의 감시는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될까봐 그는 일기 쓰기를 멈췄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모두 끊었습니다. 독서를 사랑해온 왕딩쥔 - 사진: 국가문예상 다행히 글쓰기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장다오판(張道藩) 전 입법원장이 설립한 소설 창작 연구반에 선발되어 6개월 간 본격적인 문학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후 여러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국영방송이었던 중국라디오방송공사에 입사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매체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대학의 방송학과에서 기사 작성과 라디오 제작을 강의했습니다. 그 시절, 글쓰기는 그에게 생계를 위한  밥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학에 진심인 그는 “글로 죄를 많이 지어 후회된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요. 그래서 45살부터 문학 창작을 직업과 분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 아바지에 대한 사랑을 담은 타이완어 노래, 저우제룬(周杰倫)과 홍룽홍(洪榮宏)이 함께 부른 ‘아빠(阿爸)’, 함께 들어보시죠! 왜 아무도 저 앞에 가시덤불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 왕딩쥔 전방생의 글쓰기가 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후반생의 글쓰기는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한 에세이에서 노인을 저금통에 비유한 바 있는데요. 지금껏 모은 지혜와 경험을 필요한 이들에게 꺼내어 나눠주는 존재라는 거죠. 그는 홍콩 언론(灼見名家)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년에 이르러 전반생을 돌아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아무도 저 앞에 가시덤불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아무도 그 함정을 표시해 두지 않았을까? 왜 아무도 저 우물가에 함께 가자고 초대해주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이 겪은 깨달음을 후배들에게 미리 알려주기 위해 수많은 작품을 써내려갔습니다. 1978년 이미 타이완 문단에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던 그는 아이의 학업을 위해 미국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뿌리 없는 식물처럼 사람에 대한 흥미와 글쓰기의 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다시 그를 붙잡아준 것은 불교 철학이었습니다.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펜을 들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인 그는 자신을 “기독교 여권으로 불교의 관광 비자를 받았다”고 재치 있게 묘사했습니다.  알차게 살아온 100년 ✨️ 중국에서 타이완으로, 타이완에서 미국으로. 왕딩쥔은 이 긴 여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습니다. “중국은 나를 낳고, 타이완은 나를 키우며, 미국은 나를 쓴다” 17년에 걸쳐 완성한 회고록 4부작은 비록 미국에서 작성되었지만, 중국에서 보낸 소년 시절부터 타이완의 삶까지만 담았습니다. 이에 그는 “중국대륙을 떠나 타이완 지룽에 상륙했을 때,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 땅에 들어섰을 때는 오히려 죽음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았던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40권의 책을 남기며 인생을 알차게 살아왔습니다. 한 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왕딩쥔은 아버지 같은 존재로,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줬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단지 자신의 삶을 쓴 것 같지만, 실은 한 시대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인간을 위해 진심을 다해 글을 쓰는 작가 왕딩쥔 선생께 가장 깊은 경의를 보냅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王鼎鈞,〈父親的角色〉,明報月刊。2. 臺灣文學館,「王鼎鈞文學年表」,台灣現當代作家研究資料彙編收存系統。3. 林欣誼,「作家專訪:《文學江湖》壓陣 王鼎鈞回憶錄4部曲完工」,中國時報。4. 鄭怡嫣,「王鼎鈞百歲出書 『寫作是癮 了此一生』」,聯合新聞網。5. 鄭怡嫣,「王鼎鈞百歲出書 專訪談境界也談歸屬:故鄉是我的初戀,紐約是我的婚姻」,世界日報。6. 張惠,「天教吩咐與疏狂──訪王鼎鈞先生」,灼見名家。7. 張惠,「一個沒有過去的人──訪王鼎鈞先生」,灼見名家。
婚禮(훈 리) 혼인할/혼 예도/례 결혼식  婚宴(훈 옌) 혼인할/혼 잔치/연 피로연  喜帖(시 티에) 기쁠/희 문서/첩 청첩장  禮金/紅包(리 찐 | 홍 빠오) 예도/례 금/금 | 붉을/홍 쌀/포 축의금  賓客(삔 커) 손/빈 손/객 하객  新郎(씬 랑) 새/신 사내/랑 신랑  新娘(씬 냥) 새/신 여자/낭 신부   伴郎(빤 랑) 짝/반 사내/랑 신랑들러리  伴娘(빤 냥) 짝/반 여자/낭 신부들러리  花童(화 통) 꽃/화 아이/동 화동  婚禮音樂(훈 리 인 위에) 혼인할/혼 예도/례 소리/음 노래/악 결혼식 음악  進場歌曲(찐 창 거 취) 나아갈/진 마당/장 노래/가 굽을/곡 입장곡  謝禮(씨에 리) 사례할/사 예도/례 결혼식 답례품  喜餅(시 빙) 기쁠/희 떡/병 결혼식 답례품으로 주는 과자  喜糖(시 탕) 기쁠/희 엿/당 결혼식 답례품으로 주는 사탕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반세기인 50년 동안, 타이완은 놀라운 변화를 겪었습니다. 독재정권에서 민주사회로, ‘자유중국’에서 ‘중화민국 타이완’으로.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타이완 문학 역시 중국문학의 일부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죠. 비롯 반도체 산업만큼의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타이완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출판업의 황금기였던 1970-80년대, 타이완 문단에서는 ‘문학 5소(文學五小)’라 불리는 5개의 문학 출판사가 큰 활약을 펼쳤는데요. 독립 출판사에 가까운 소형 출판사지만, 오늘날 타이완 문학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주역들이었습니다. 다섯 출판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968년 린하이인(林海音)이 설립한 ‘순문학(純文學)출판사’, 1972년 야오이잉(姚宜瑛)이 세운 ‘대지(大地)출판사’, 1975년 인디(隱地, 본명 柯青華 커칭화)가 만든 ‘이아(爾雅)출판사’, 1976년 양무(楊牧), 야셴(瘂弦), 예부룽(葉步榮)、선옌스(沈燕士)가 공동 설립한 ‘홍범(洪範)출판사’, 그리고 1979년 차이원푸(蔡文甫)가 세운 ‘구가(九歌)출판사’입니다.  이 다섯 출판사의 대표들은 모두 작가나 문화인 출신이고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1980년대부터는 순문학출판사 린하이인 대표의 주도로, 한 달에 한 번씩 조찬 모임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에는 뜻을 모아 공동 출판물 《오가서목(五家書目)》을 출판해 각 출판사의 독자들에게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타이완 문단의 가장 아름다운 시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80년 문학 5소의 조찬 모임 - 사진: 문신잡지 via 국가문화기억뱅크 하지만 1987년 타이완 민주화와 함께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출판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습니다. 거기에 인터넷과 다양한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책은 점점 콘텐츠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죠. 이런 추세 속에서도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곳은 이아, 홍범, 구가, 세 출판사뿐입니다. 이 중 이아출판사는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를 기념해 타이완 문화인 100명이 직접 선정한 ‘이아출판사의 대표작 50권(爾雅五十.經典五十)’이 발표되었는데요. 지난 19일 열린 시상식에서 88세가 된 이아의 설립자 인디, 그리고 이번 리스트 첫 번째 자리에 오른 바이셴융(白先勇)을 비롯한 수많은 원로 작가들도 참석했습니다. 타이베이국제도서전과 비견할 만한 문학계의 대축제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오늘은 ‘타이완 문학의 나무’라 불리는 이아출판사의 50년 발자취를 함께 돌아보려 합니다! 이아출판사의 대표작 50권 시상식 현장 - 사진: CNA  무한한 문학의 나무를 심으라 🌲 그렇다면 이아는 ‘문학 5소’ 중 어떤 존재일까요? 그 힌트는 출판사 대문에 적힌 문장, 즉 설립자 인디의 한 마디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제한된 시간 안에 무한한 문학의 나무를 심으라(在有限的時間裡種一棵無限的文學樹)” 이 문장은 지난 50년간 묵묵히 문학의 나무를 심어온 이아의 행보를 잘 보여줍니다. 해마다 최소 12권의 책을 펴내는 이아는 타이완 문학의 전통을 지키고 전승하는 것 외에도, 이아만의 문학 품격을 만들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2년부터는 ‘이아 서재(爾雅書房)’라는 살롱 형식의 문학 모임을 열어, 작가와 독자, 대중와 문학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습니다. 이아를 통해 문학 세계에 빠져든 사람은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번에 발표된 50권의 대표작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타이완 독자들에게 많이 익숙한 책들인데요. 이 중 톱3는 1950년대 중국대륙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삶을 그린 바이셴융의 《타이베이 사람들(臺北人)》, 중화민국령 베이징에서의 어린 시절을 담은 린하이인의 자전적 소설 《성남구사(城南舊事)》,  그리고 중국 명소들을 돌며 써내린 위치우위(余秋雨)의 기행문 《중국문화답사기(文化苦旅)》입니다. 세 작품 모두 인디의 손길을 거쳐 세상에 나온 명작들이죠. 38살에 이아를 설립하고 58살에 첫 시집을 낸 인디는 출판인에서 시인이 된 드문 인물입니다. 그의 남다른 안목은 이아가 출판계의 전설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2015년 ‘광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앞서 언급한 세 대표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들려줬는데요. 이아 대표작 톱3의 비하인드 스토리 ✨ 먼저 《타이베이 사람들》 이야기부터 합시다. 사실 처음에 이아가 출판하려던 작품은 바이셴융의 또 다른 대표작 《불효자(孽子)》였는데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다른 출판사와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이셴용은 대신 《타이베이 사람들》의 재판 출판권을 이아에 넘겼죠.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타이베이 사람들》은 출판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출판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2021년에 출판된 50주년 기념 특별판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타이베이 사람들》 출판 50주년 기념판 - 사진: 청핀서점 두 번째 작품 《성남구사》는 처음에 작가 린하이인이 세운 순문학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데요. 그러던 중 1983년 인디가 린하이인에게 “특별판을 이아에서 내자”는 제안을 한 후,  두 출판사가 같은 책을 동시에 출판하는 꽤 이례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95년 순문학출판사가 문을 닫으면서 이아에서 낸 판본이 유일한 버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상일은 참 예측 불가능한 거죠. 린하이인의 자서전 소설 《성남구사》 - 사진: 청핀서점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위치우위입니다. 중국 작가지만, 그의 작품은 중국대륙에 대한 타이완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2005년 타이완을 방문하면서 ‘위치우위 열풍’을 일으켰을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는데요. 당시 이 열풍의 중심에는 인디와 이아출판사가 있었죠. 이아는 그의 대표작 《중국문화답사기》와 《천년의 정원(山居筆記)》을 타이완에 소개했고, 2008년 수필 선집 《신 중국문화답사기(新文化苦旅)》도 출판했습니다. 비록 나머지 작품들은 타이완의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위치우위가 가장 애정을 갖는 작품은 모두 이아가 낸 책이라고 합니다. 위치우위의 대표작 《중국문화답사기》 - 사진: 청핀서점 이어서 노래 한 곡을 함께 들어보시죠. 《타이베이 사람들》에 수록된 〈일파청(一把青)〉을 원작으로 한 동명 드라마의 OST, 톈푸전(田馥甄, Hebe)의 ‘As it is(看淡)’입니다.〈일파청〉은 국공내전 시기, 중화민국 공군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소설인데요. 2015년 드라마가 방영되자 타이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추억이 아닌 현재, 고전은 지금도 젊다 🌟 이아가 설립 40주년을 맞은 2015년, 인디는 문학 전문지 《문신(文訊)》과의 인터뷰에서 “문학은 하늘이 고난받는 인류에게 준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이 짧은 한 마디에 이아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인디에게 문학은 취미이자 이상이자 평생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50년의 세월 동안 ‘문학’이라는 정원 한가운데 ‘이아’라는 나무를 심고 정성껏 가꾸어 왔죠. 덕분에 수많은 타이완 독자들의 마음 속에 문학의 향기와 울림이 깊게 스며들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책이 다양한 콘텐츠에 자리를 내어준 시대지만, 문학이 가진 힘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번에 발표된 이아 대표작 프로젝트의 제목은 좀 특별한데요. ‘추억이 아닌 현재, 고전은 지금도 젊다(不是懷舊,經典依然年輕)’입니다.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이 50권의 책들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타이완 문학을 만든 든든한 토대입니다. 이아를 비롯한 ‘문학 5소’가 있었기에 지금의 타이완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거죠. 반세기라는 긴 시간을 지나 이제 또 다른 50년의 문학 여정이 시작됩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邱祖胤,「爾雅出版扮文學推手50年 隱地:唯恐好作品被埋沒」,中央社。2. 邱祖胤,「爾雅50年、隱地88歲仍勤於筆耕 盼文人生活更好」,中央社。3. 邱祖胤,「文學五小 其實並不小」,中央社。4. 許文貞,「當年文學五小 只剩3家獨撐」,中時新聞網。5. 隱地,「【遺忘與備忘】一九八六年」,人間福報。6. 徐開塵,「說不清楚的新世界──訪隱地說爾雅五書的故事」,文訊。7. 李海,「隱地也是影帝」,光華雜誌。8. 林麗如,「五小出版社 純文學的美好年代」,聯合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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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 아니면 권력을 쥐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사회에서는 흔히 학력, 직업, 재산, 명예 같은 기준으로 성공을 판단하곤 하죠. 특히 입시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사회는 성공을 곧 출세로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개인 취향보다 사회가 정한 틀에 맞춰 살아갑니다. 그런데 출세하든 못하든, 결국 인생의 끝은 모두에게 똑같이 죽음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성공은 과연 그렇게까지 중요하고 꼭 쟁취해야 할 가치일까요? 커리어의 황금기인 36살, 모두가 선망하는 타이완대병원 마취과 주치의 자리를 내려놓고, 앞길이 불확실한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타이완의 의사이자 작가 허우원융(侯文詠)입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죠. 하지만 허우원융은 오히려 누구보다도 ‘성공’이란 가치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병원에서 주치의로 승격되었고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올해의 10대 성공 인물’로까지 선정되었죠. 하지만 그는 스스로가 실패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환자들을 더 잘 돌보고 싶었지만 글쓰기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을 더 잘 쓰고 싶었지만 병원 일 때문에 마음껏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쪽 모두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36번째 생일을 맞은 바로 전날, 병원에 사표를 냈습니다. 최근 신작을 발표한 그는 한 팟케스트(台灣通勤第一品牌) 인터뷰에서 당시의 결정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일하다 보니 점점 깨달았어요. 성공만을 추구하는 삶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라는 것.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성공으로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죽음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데, 우리는 여전히 성공과 효율성만을 좇아요. 그러다 보면, 삶에서 재미가 사라지고 결국 성공이라는 뱀파이어에게 빨려들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돼요. 그래서 나 자신,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감하게 살기로 결심했어요.” 오늘은 허우원융의 용기 비결과 삶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 ✨︎ 허우원융의 스펙을 보면, 성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의사가 되었고, 부교수로 승진하며 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동시에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많은 팬을 보유한 ‘의사 작가’로 자리잡았습니다. 병원을 떠난 이후에도 방송인, 드라마 작가와 프로듀서로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지금까지도 타이완 문단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와이프 역시 유명한 치과 의사로,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인생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부터 성공한 사람이라 선택지가 많았던 거 아니야?”, “어차피 실패할 걱정 없는 인생이라, 사표도 낼 수 있었던 거지.” 이에 허우원융은 자신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하며, “인생을 성공과 실패로만 나누면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신작 《내가 바라는 어른이 되는 것(變成自己想望的大人)》에서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황춘밍(黃春明) 작가를 언급했는데요. 어느 강연에서 황춘밍은 시청률이 40%를 넘었던 한 드라마를 이야기하면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했습니다. “상하수도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드라마 방송일의 저녁 8시 11분이 되면, 수도 수위가 갑자기 뚝 떨어진다면서요. 모든 시청자들이 광고 시간에 화장실로 달려갔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 웃기는 이야기같지만, 황춘밍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모두가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시간에 화장실에 가고, 같은 타이밍에 변기를 누르는 세상, 여러분은 이런 인생이 너무 지루하지 않아요?” 허우원융은 이 말을 듣고 다짐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리듬으로 재미있게 사는 것! 재미있게 살자 💃 공무원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성공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의대에 입학했죠. 그러나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갈망 때문에, 책과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일 년에 무려 300편 넘는 영화를 볼 정도로 푹 빠졌습니다. 의대 5학년 때는 영화 동아리를 만들었고, 심지어 의대를 그만두고 해외에 유학가서 영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 꿈은 그의 어머니의 한 마디 말로 막을 내렸는데요. 어머니는 “많은 청춘남녀들이 영화를 보고, 영화 속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얻지 못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곤 하지. 그렇게 보면, 영화감독은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야. 그런데 의사는? 아픈 사람이 자기 면역력으로 나을 수 있도록 살짝 도와주기만 해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그러니까 너는 사람을 살리고 싶니, 죽이고 싶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반박하지 못한 아들은 결국 영화의 꿈을 접었습니다. 참 황당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죠. 영화의 꿈은 접었지만, 초등학교부터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또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작가였죠. 레지던트가 된 후, 틈날 때마다  짧은 수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턴 시절 겪었던 일부터 와이프와의 연애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조각들을 글로 남겼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회사 일만 해도 벅찬데, 하물며 의사와 작가라는 두 직업을 병행하는 것, 상상만 해도 어려운 거죠. 지금 말로 표현하자면, 허우원융은 멀티 커리어의 선구자였던 셈입니다. 그 뒤에는 강력한 성실함과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허우원융의 대표 소설 《백색거탑(白色巨塔)》을 원작으로 한 동명 드라마의 OST를 함께 들어보시죠. 500명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시작 🛏︎ 허우원융은 퇴사 전의 세월이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 30살에 주치의가 된 후, 말기 암 환자들을 치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고, 이후 5년 동안 500명의 환자들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습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은 돈이나 명예, 성취 대신, 오히려 부모, 아이, 배우자,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미처 하지 못한 말, 전하지 못한 사과, 끝내 남은 후회들을 털어놨습니다. 결국 우리가 평생 추구해온 성공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야말로 더 소중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깨달았습니다. 이 500명 환자들의 마지막 소리는 그가 사표를 낸 진짜 이유가 되었습니다. 1998년 전업 작가가 된 후에는 장편소설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이 중 가장 회자되는 작품은 병원 내 권력투쟁을 다룬 《백색거탑》, 그리고 입시 중심의 교육 문제를 파헤친 《위험심령(危險心靈)》인데요. 두 작품 모두 기득권 구조와 제도의 모순, 그리고 성공이라는 사회적 강박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 다툼의 무대로, 학교는 지식을 쌓는 공간이 아니라 성적 경쟁의 전쟁터로 변모한 현실, 허우원융은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들은 그에게 단순한 인기 이상의 파장을 주었는데요. 《백색거탑》 출판 이후, 의료 현장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학교 강사 자격을 취소당했고, 예전 상사로부터는 배은망덕이라는 비반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어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타이완 사회가 사스(SARS)를 겪고 여러 의료 과실 사건이 발생하면서, 의료 제도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의료계 현실을 설파하는 이 소설은 의대생들의 필독서로 재조명되었습니다. 누군가는 허우원융을 ‘의료계의 배신자’로 불렀지만, 그는 오히려 의사였기에 쓸 수 있는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바라는 어른이 되었을까? 🫧 신작 제목처럼, “내가 바라는 어른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질문은 마치 최고의 작품을 썼냐는 질문과 같다. 결코 완성될 수 없지만, 이 물음이 있기에 나는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성공은 남을 이기거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내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재미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성공’이란 단어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참 따듯한 위로가 되는 철학이죠. 청취자 여러분은 지금, 자기가 바라는 어른이 되고 계신가요?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張葆蘿,「台灣文學苑─侯文詠孤獨寫作 默默點火」,國立公共資訊圖書館。2. 萬巧蓉,「小孩國的間諜,是大人國的和平使者——專訪侯文詠《變成自己想望的大人》」,迷誠品。3. 游常山,「侯文詠:追求下半輩子的幸福」,遠見雜誌。4. 彌生,「侯文詠 棄偶像 做自己」,人間福報。5. 張瀞文,「侯文詠 :4、5百個瀕死的人告訴我一個真理」,親子天下雜誌。6. 36歲放棄醫生當作家,侯文詠到底在想什麼?寫作近40年,他有哪些體悟? ft. 作家 侯文詠《強者我朋友》EP 119|志祺七七。7. EP471 變成自己想望的酷人ft.文詠,台灣通勤第一品牌。
단어  顏色(옌 쎠) 낯/안 빛/색 색깔  紅色(홍 쎠) 붉을/홍 빛/색 빨간색  粉紅色(펀 홍 쎠) 가루/분 붉을/홍 빛/색 분홍색  橘色/橙色(쥐 쎠 | 청 쎠) 귤/귤 빛/색 ᅵ 등자나무/등 빛/색 주황색  黃色(황 쎠) 누를/황 빛/색 노란색  綠色(뤼 쎠) 푸를/록 초록색  藍色(란 쎠) 쪽/람 빛/색 파란색  紫色(즈 쎠) 자줏빛/자 빛/색 보라색  黑色(헤이 쎠) 검을/흑 빛/색 검은색  白色(바이 쎠) 흰/백 빛/색 흰색  灰色(훼이 쎠) 재/회 빛/색 회색  棕色/咖啡色(쫑 쎠 | 카 페이 쎠) 종려나무/종 커피/가 커피/비 빛/색 갈색  米色(미 쎠) 쌀/미 빛/색 베이지색  古銅色/小麥色(구 통 쎠 | 샤오 마아 쎠) 옛/고 구리/동 빛/색 ᅵ 작을/소 보리/맥 빛/색 구릿빛     대화  가.你最喜歡什麼顏色?(니 쮀 시 환 션 머 옌 쎠)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뭐예요?  다. 黃色。(황 쎠)   노란색이에요.     가.你最討厭什麼顏色?(니 쮀 타오 옌 션 머 옌 쎠)  가장 싫어하는 색깔은 뭐예요?  다. 粉紅色。(펀 홍 쎠)  분홍색이에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정년퇴직 이후 어떻게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인가가 인생의 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직장 새내기들은 “아, 빨리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곤 하지만, 막상 은퇴는 또 다른 인생의 시련이라는 사실, 아직은 잘 와닿지 않죠. 아이들이 모두 독립했고 자신도 직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삶의 중심을 잃고 마음속 깊은 외로움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6월 29일 향년 68세로 별세한 타이완 작가 왕하오이(王浩一)는 저작 《고독관리(孤獨管理)》에서 이렇게 말했는데요. “사람은 세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는 순간, 두 번째는 부모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사춘기, 세 번째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법을 배울 때다.” 왕하오이는 은퇴 후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지인 류커샹(劉克襄) 작가와 함께 타이완의 공영방송 PTS의 여행 프로그램 《하오커 만유(浩克漫遊)》를 진행했습니다. 역사, 건축, 심리, 미식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20여 년간 20권이 넘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은퇴 생활은 청춘보다 더 뜨거웠는지도 모르죠. 왕하오이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인생을 대관람차에 비유했는데요. “20-30대는 아직 가장 높은 곳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40-50대를 지나 꼭대기를 넘어서면 관람차를 떠날 날을 기다리게 된다.” 사실 왕하오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의 어머니는 91세를 일기로 먼저 별세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5일 만에, 본인도 심근 경색으로 생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거죠. 그럼 오늘은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았던 왕하오이 작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여행 프로그램을 공동 진행한 왕하오이(우)와 류커샹(좌) - 사진: 왕하오이 페이스북 끊임없는 호기심과 강한 적응력 🌟 왕하오이에게는 다양한 타이틀이 있습니다. 작가부터 방송인, 대학 강사, 문화인, 외국기업 사장까지, 학식이 풍부하고 견문이 넓은 전방위적인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죠. 타이완 한가운데에 있는 난터우(南投)에서 태어났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집을 떠나 남부 자이(嘉義)와 타이난(台南), 그리고 타이베이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스스로를 ‘타이완섬 내 유학생’이라 부르며, 어려서부터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경험을 자산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타이난 성공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후, 타이완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를 맞아 의류제작 전문의 무역회사에 입사해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40대에 들어 노동집약적 산업들이 중국과 동남아로 빠르게 이전하면서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되었죠. 그런데 바로 이 시점부터 마음속 깊이 간직해온 문학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해, 그를 문화의 도시 타이난으로 다시 이끌었습니다. 그는 타이난의 로컬음식, 역사, 자연환경을 깊이 연구하며 지역 문화계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뤘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성공대 수학과의 우수 교우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학 분야의 성과가 아닌 이유로 수여되었다는 점입니다. 타이난 출신은 아니지만, 왕하오이의 삶은 타이난과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요. 그가 남긴 저작 중 무려 3분의 1 이상이 타이난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시장부터 사찰까지, 골목골목의 풍경과 사람들, 타이난의 영혼과 세월을 생생한 필치로 기록하며, 유일무이한 문화 지도를 완성해냈습니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황웨이저(黃偉哲) 타이난시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타이난은 아주 오랜 친구 한 명을 잃었다”며, “왕하오이 작가는 단순히 먹거리를 쓴 것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타이난인의 정체성을 그려냈다”고 말했습니다. '샤오츠' 길거리 음식 마니아 🍽️ 타이완의 길거리 음식, 중국어로 ‘샤오츠(小吃)’라고 하죠. 작고 간단한 먹거리지만, 그 안에는 지역 경제와 문화, 그리고 현지만의 정서까지 응축되어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가게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고, 같은 음식이라도 재료, 조리법, 맛이 모두 가게마다 다릅니다. 따라서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도 중요한 연구대상이죠. 왕하오이는 낯선 도시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현지인들에게 사찰과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곳을 중심으로 샤오츠를 찾아봅니다. 현지 정신이 담긴 샤오츠는 대부분 사찰과 시장 주변에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타이난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놀랐던 음식은 생강 간장 소스를 찍어먹는 토마토였는데요. 17세기 네덜란드인이 토마토를 타이완에 들여온 후, 토마토 맛이 익숙하지 않았던 타이완사람들은 비린 맛을 없애기 위해 생강을 간장에 넣고, 달콤한 감초가루나 메실가루를 더해 독특한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중의학 관점에서 보면, 토마토는 몸을 차게 하는 음식이라, 추위를 쫓는 생강과 잘 맞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강 간장 소스는 타이난, 가오슝, 핑동을 중심으로 발전하며 타이완 남부를 대표하는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낯설고 신기한 소스 덕분에, 왕하오이는 타이난에 머무르기로 결심했죠. 타이난 샤오츠. 사진 오른쪽은 생강 간장 소스를 찍어먹는 토마토. - 사진: 안우산 그럼 이어서 타이난의 풍경을 타이완어 노래에 담은 리주신(李竺芯)의 ‘구수한 냄새(足芳足芳)’를 함께 들어보시죠. 타이난 출신의 리주신은 올해 ‘금곡장(골든 멜로디 어워즈)’에서 최우수 타이완어 여가수상, 최우수 타이완어 앨범상, 그리고 올해의 앨범상까지 수상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입니다. 타이완어 노래를 보다 세련된 감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눈부신 제2의 인생 ✨ 왕하오이의 활동 무대는 2014년부터 연예계로 확장되었는데요. 그가 진행한 여행 프로그램 《하오커 만유》는 11년 동안 무려 70회에 걸쳐 방송되었고, 타이완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을 직접 발로 뛰며 소개했습니다. 철저한 현장 조사와 남다른 시선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타이완 가장 권위있는 방송대상 ‘금종장(金鐘獎)’도 두 차례나 수상했습니다. 그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 작가 류커샹은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왕하오이의 유머 덕분에 프로그램의 스케일이 점점 열렸다”며,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왕하오이는 “은퇴한 사람은 자율을 배우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며,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향도 찾을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에게 좌우명이 있다면, 아마도 타이완에서 흔히 들리는 말, “活到老學到老(늙어 죽을 때까지 배움은 멈추지 않는다)” 아닐까요? 서른이 넘으면 인생이 안정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인생에는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쟁취하고 개척해야 하죠. 왕하오이처럼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은퇴 생활은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이완 전역을 누빈 문화인 👣 한편, 왕하오이는 타이완 문화부가 주최한 ‘문화기지 100곳’ 프로젝트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요. 이 프로젝트는 지역 활성화의 성과를 선보이기 위해 시민단체의 신청과 지방정부의 추천을 통해 타이완 전역의 문화 거점을 선정하는 겁니다. 올해 선정된 110곳 중 예술 마을, 독립서점, 박물관, 유적지 등 다채로운 공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타이동(台東)에 살던 왕하오이는 “문화기지에는 원주민과 외성인 문화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타이완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했습니다. 타이완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다양한 창작 활동을 통해 이 땅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외국기업 사장에서 타이완 전역을 누빈 문화인까지, 왕하오이는 평생을 타이완에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빛나고 찬란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1. 林玫妮,「王浩一:學習孤獨、刁鑽信仰,掌握退休主導權」,退休好幸福。2. 黃韋維,「從外商菁英到走遍台南街巷,小吃教主王浩一改寫被離職人生」,alive。3. 羅建怡,「500碗評審專訪/王浩一:迷戀於小吃的溯源 就像經濟實惠的歷史走趟」,500輯。4. 王寶兒,「作家王浩一辭世 文化部長李遠哀悼」,中央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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