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만화의 숨은 주역… 2025 ‘금만장’ 특별공로상 수상자 황젠허(黃健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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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요즘 타이베이에서 MZ세대가 가장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 혹시 아시나요? 정답은 지하철 레드라인과 그린라인의 환승역 ‘중산역’입니다! 최근 중산역 지하상가에서는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만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데요. 일본 인기작 《단다단》, 《사카모토 데이즈》부터 타이완 만화대상 ‘금만장(金漫獎)’ 수상작까지,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만화 세상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타이완 최대 서점 ‘청핀서점(誠品書店)’이 오는 9월 30일까지 진행하는 ‘2025 만화 페스티벌’의 일부입니다.
청핀서점이 주최한 '2025 만화 페스티벌' - 사진: 안우산
일본 인기작 《단다단》 - 사진: 안우산
타이완 전역의 청핀서점마다도 색다른 전시가 준비되어 있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데요. 중산역 난시(南西) 지점에서는 중국 전통 연극 ‘경극’을 슈퍼히어로 서사로 재해석한 타이완 만화《옌톄화(閻鐵花)》를 만날 수 있고, 시먼(西門) 지점에서는 ‘보이즈 러브(Boys’ Love)’를 주제로 한 타이완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수도권 밖 지점들 역시 다채로운 콘텐츠로 가득해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중국 전통 연극 ‘경극’을 슈퍼히어로 서사로 재해석한 타이완 만화《옌톄화(閻鐵花)》 - 사진: 안우산
그리고 주목할 만한 행사 또 하나! 타이완 문화부 주최의 금만장도 지난 6일 노미네이션을 발표했는데요. 224개 출품작 중 단 24개만 본선에 올라 9개의 상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또한 특별공로상은 1980년대부터 타이완 만화산업에 힘써온 황젠허(黃健和) 편집자가 차지했습니다. 그는 타이완 최초로 ‘만화 편집자’라는 직함을 사용한 인물로, 타이완 만화의 미국, 유럽 진출을 이끌었고, 여러 해외 만화 페스티벌에서 타이완 테마관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2014년 금만장 최우수 편집장을 받은 데 이어, 올해 특별공로상까지 거머쥐며 그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죠. 그럼 오늘은 만화가들의 든든한 버팀목, 타이완 만화의 숨은 주역 황젠허 편집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만화 편집자란? 🧑🏻🏫
만화 편집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이에 황젠허는 한 인터뷰(ETtoday)에서 “편집자는 마치 택배원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주간 만화지 《요일 만화(星期漫畫)》에서 편집자를 맡았던 그는 만화가의 작업 일정을 관리하고, 원고를 재축하고, 또 받은 원고를 인쇄소에 넘기는 일까지 전부 챙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일 만화》는 매주 수요일 발행이라,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일요일쯤 원고를 받는 것였는데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인쇄소로 가는 길에, 아직 원고가 완성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예인에게 매니저가 있고, 운동선수에게 코치가 있듯이, 만화가에게는 편집자가 있는 겁니다. 만화가가 오롯이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편집자는 출판 업무부터 생활적인 부분까지, 창작 외의 모든 일을 챙겨주는 존재죠. 그래서 만화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편집자는 만화가의 첫 번째 독자이기도 합니다. 작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만화가의 철학과 독자 취향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이죠. 황젠허는 한 방송(夜深人未靜)에서 타이완 만화의 거장 정원(鄭問)의 편집자를 맡았던 시절을 회상했는데요. 정원은 언제나 그림의 기술과 작품의 깊이를 고민하고, 늘 먼 곳을 바라보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그의 작품은 항상 시대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거죠. 황젠허는 “그와 함께 일하는 편집자 역시 끊임없이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며, “이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통쾌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만화의 주체는 만화가에게 있지만,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지는 편집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만화가와 편집자의 호흡이 한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열쇠라고 할 수 있죠.
타이완 만화 대가 정원(鄭問) - 사진: 위키백과
만화가와 편집자의 결정체 🖌️
연극학과를 졸업한 황젠허는 처음에 영화업계에서 일하다가 출판업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는데요. 때마침 민주화의 바람이 불던 1980년대 말, 출판 심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타이완 시장은 일본 만화의 해적판으로 넘쳐났습니다. 이때 본토 만화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기 위해 창간된 잡지가 있었죠. 바로 《요일 만화》입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한 황젠허는 1989년 5월, 이 잡지의 편집자로 합류해, 정원, 아오유샹(敖幼祥), 차즈중(蔡志忠) 등 대표적인 타이완 만화가들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당시 만화 독서는 국민적 취미였던 만큼 관련 산업도 빠르게 성장했는데요. 하지만 《요일 만화》는 끝내 일본 만화지의 벽을 넘지 못해 1991년 아쉽게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타이완 본토 만화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한 《요일 만화》 - 사진: 위키백과
이후 황젠허는 성인 독자를 겨냥한 만화지 《하이(HIGH)》 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은 국내외 작품을 함께 실을 수 있어 훨씬 다양한 시도가 가능했는데, 중국의 6.4항쟁 같은 정치 이슈를 다룬 작품도 게재될 정도로 도전적인 잡지였습니다. 타이완 만화가에게는 글로벌 만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황젠허는 여기서 한 벌 더 나아가, 타이완 만화가들의 부족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10명의 시나리오 작가를 초청해 젊은 만화가들과의 협업을 추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협력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에 황젠허는 한 팟케스트(閱讀隨身聽)에서 “현재 타이완에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젊은 만화가가 50명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작품을 완성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단 5명뿐”이라며, “물론 혼자 해내는 것도 좋지만,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 작품의 성공은 만화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죠. 편집자, 그리고 협력 작가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결과물입니다.
이어서 2022년에 진행된 음악의 만화화 프로젝트 ‘섬의 광상곡(島嶼狂想曲:聽台灣在唱歌)’에 선정된 노래, 펑페이페이(鳳飛飛)의 ‘박수 소리가 날 때(掌聲響起)’를 함께 들어보시죠.
타이완 만화만의 길 🛣
타이완이 1990년부터 일본 만화를 합법적으로 도입한 후, 전체 만화 환경은 자연스롭게 일본 만화가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타이완 만화의 미래를 고민해온 황젠허는 “타이완 만화가 일본 만화만 따라갈 수 없다”며,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2000년대 초반, 그는 하오밍이(郝明義) 로커스(大塊) 출판사 사장과 논의를 거쳐, 일본 외의 만화 작품을 타이완으로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탄생한 출판사가 ‘다라(大辣, 매운 맛)’ 출판사인데요. 황젠허는 다라의 편집장을 맡아, 타이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럽 만화를 수입하는 한편, 과거 《요일 만화》에서 연재했던 타이완 만화도 다시 출판하며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는 데 힘써왔습니다. 2012년부터는 세계 3대 만화 페스티벌 중 하나인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도 해마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이완 만화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에 황젠허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만화를 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갑자기 어떤 만화를 봐야 할지 모르게 된다. 지금 타이완 만화는 사람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황젠허는 평생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 제작을 목표로 최근 10년간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를 담은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에 주력해 왔습니다. 이 장르는 전통 만화와 달리 강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적합하죠. 다라출판사는 그래픽 노블 분야의 선두자로서 2019년부터 그래픽 노플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관련 프로그램:
책과 함께 새해 맞이하기! 타이완 연말의 문학 행사들 🎆
황젠허는 한 인터뷰(중앙사)에서 “비주류도 결국 주류가 될 것이다. 잠복하는 과정 속에서도 만화가들은 계속 창작하며, 발굴의 순간을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십여 년간 쏟아부은 노력 덕분에, 이제 타이완 만화는 국제무대에서도 점점 빛나고 있습니다. 특히 타이완 특색과 개인 색깔을 가진 작품들은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그리고 황젠허는 여전히 그의 자리에서 작품이 가져다주는 ‘매직 아워’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王寶兒,「金漫獎24件入圍出爐 黃健和獲特別貢獻獎」,中央社。
2. 陳政偉,「創造圖像小說 島嶼風味的大人漫畫」,中央社。
3. 邱顯忠,「閱讀隨身聽S2EP10》大辣文化總編黃健和/圖像文學話說從頭&漫畫編輯30年目睹之怪現況(才怪)」,閱讀隨身聽。
4. 陳怡靜,「台漫歐洲新契機.台灣風格》不只日漫,在漫畫的世界裡看世界的漫畫 ft.大辣黃健和、漫畫家小莊」,OPENBOOK。
5. 林育綾,「全台第一位『漫畫編輯』!曾催稿催到印刷廠⋯最懷念大師鄭問『從不拖稿』」,ET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