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끝이 없다” 문화인 왕하오이(王浩一)가 타이완에 남긴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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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정년퇴직 이후 어떻게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인가가 인생의 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직장 새내기들은 “아, 빨리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곤 하지만, 막상 은퇴는 또 다른 인생의 시련이라는 사실, 아직은 잘 와닿지 않죠. 아이들이 모두 독립했고 자신도 직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삶의 중심을 잃고 마음속 깊은 외로움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6월 29일 향년 68세로 별세한 타이완 작가 왕하오이(王浩一)는 저작 《고독관리(孤獨管理)》에서 이렇게 말했는데요. “사람은 세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는 순간, 두 번째는 부모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사춘기, 세 번째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법을 배울 때다.” 왕하오이는 은퇴 후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지인 류커샹(劉克襄) 작가와 함께 타이완의 공영방송 PTS의 여행 프로그램 《하오커 만유(浩克漫遊)》를 진행했습니다. 역사, 건축, 심리, 미식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20여 년간 20권이 넘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은퇴 생활은 청춘보다 더 뜨거웠는지도 모르죠.
왕하오이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인생을 대관람차에 비유했는데요. “20-30대는 아직 가장 높은 곳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40-50대를 지나 꼭대기를 넘어서면 관람차를 떠날 날을 기다리게 된다.” 사실 왕하오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의 어머니는 91세를 일기로 먼저 별세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5일 만에, 본인도 심근 경색으로 생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거죠. 그럼 오늘은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았던 왕하오이 작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여행 프로그램을 공동 진행한 왕하오이(우)와 류커샹(좌) - 사진: 왕하오이 페이스북
끊임없는 호기심과 강한 적응력 🌟
왕하오이에게는 다양한 타이틀이 있습니다. 작가부터 방송인, 대학 강사, 문화인, 외국기업 사장까지, 학식이 풍부하고 견문이 넓은 전방위적인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죠. 타이완 한가운데에 있는 난터우(南投)에서 태어났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집을 떠나 남부 자이(嘉義)와 타이난(台南), 그리고 타이베이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스스로를 ‘타이완섬 내 유학생’이라 부르며, 어려서부터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경험을 자산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타이난 성공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후, 타이완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를 맞아 의류제작 전문의 무역회사에 입사해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40대에 들어 노동집약적 산업들이 중국과 동남아로 빠르게 이전하면서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되었죠. 그런데 바로 이 시점부터 마음속 깊이 간직해온 문학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해, 그를 문화의 도시 타이난으로 다시 이끌었습니다. 그는 타이난의 로컬음식, 역사, 자연환경을 깊이 연구하며 지역 문화계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뤘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성공대 수학과의 우수 교우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학 분야의 성과가 아닌 이유로 수여되었다는 점입니다.
타이난 출신은 아니지만, 왕하오이의 삶은 타이난과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요. 그가 남긴 저작 중 무려 3분의 1 이상이 타이난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시장부터 사찰까지, 골목골목의 풍경과 사람들, 타이난의 영혼과 세월을 생생한 필치로 기록하며, 유일무이한 문화 지도를 완성해냈습니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황웨이저(黃偉哲) 타이난시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타이난은 아주 오랜 친구 한 명을 잃었다”며, “왕하오이 작가는 단순히 먹거리를 쓴 것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타이난인의 정체성을 그려냈다”고 말했습니다.
'샤오츠' 길거리 음식 마니아 🍽️
타이완의 길거리 음식, 중국어로 ‘샤오츠(小吃)’라고 하죠. 작고 간단한 먹거리지만, 그 안에는 지역 경제와 문화, 그리고 현지만의 정서까지 응축되어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가게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고, 같은 음식이라도 재료, 조리법, 맛이 모두 가게마다 다릅니다. 따라서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도 중요한 연구대상이죠. 왕하오이는 낯선 도시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현지인들에게 사찰과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곳을 중심으로 샤오츠를 찾아봅니다. 현지 정신이 담긴 샤오츠는 대부분 사찰과 시장 주변에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타이난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놀랐던 음식은 생강 간장 소스를 찍어먹는 토마토였는데요. 17세기 네덜란드인이 토마토를 타이완에 들여온 후, 토마토 맛이 익숙하지 않았던 타이완사람들은 비린 맛을 없애기 위해 생강을 간장에 넣고, 달콤한 감초가루나 메실가루를 더해 독특한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중의학 관점에서 보면, 토마토는 몸을 차게 하는 음식이라, 추위를 쫓는 생강과 잘 맞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강 간장 소스는 타이난, 가오슝, 핑동을 중심으로 발전하며 타이완 남부를 대표하는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낯설고 신기한 소스 덕분에, 왕하오이는 타이난에 머무르기로 결심했죠.
타이난 샤오츠. 사진 오른쪽은 생강 간장 소스를 찍어먹는 토마토. - 사진: 안우산
그럼 이어서 타이난의 풍경을 타이완어 노래에 담은 리주신(李竺芯)의 ‘구수한 냄새(足芳足芳)’를 함께 들어보시죠. 타이난 출신의 리주신은 올해 ‘금곡장(골든 멜로디 어워즈)’에서 최우수 타이완어 여가수상, 최우수 타이완어 앨범상, 그리고 올해의 앨범상까지 수상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입니다. 타이완어 노래를 보다 세련된 감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눈부신 제2의 인생 ✨
왕하오이의 활동 무대는 2014년부터 연예계로 확장되었는데요. 그가 진행한 여행 프로그램 《하오커 만유》는 11년 동안 무려 70회에 걸쳐 방송되었고, 타이완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을 직접 발로 뛰며 소개했습니다. 철저한 현장 조사와 남다른 시선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타이완 가장 권위있는 방송대상 ‘금종장(金鐘獎)’도 두 차례나 수상했습니다. 그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 작가 류커샹은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왕하오이의 유머 덕분에 프로그램의 스케일이 점점 열렸다”며,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왕하오이는 “은퇴한 사람은 자율을 배우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며,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향도 찾을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에게 좌우명이 있다면, 아마도 타이완에서 흔히 들리는 말, “活到老學到老(늙어 죽을 때까지 배움은 멈추지 않는다)” 아닐까요? 서른이 넘으면 인생이 안정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인생에는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쟁취하고 개척해야 하죠. 왕하오이처럼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은퇴 생활은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이완 전역을 누빈 문화인 👣
한편, 왕하오이는 타이완 문화부가 주최한 ‘문화기지 100곳’ 프로젝트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요. 이 프로젝트는 지역 활성화의 성과를 선보이기 위해 시민단체의 신청과 지방정부의 추천을 통해 타이완 전역의 문화 거점을 선정하는 겁니다. 올해 선정된 110곳 중 예술 마을, 독립서점, 박물관, 유적지 등 다채로운 공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타이동(台東)에 살던 왕하오이는 “문화기지에는 원주민과 외성인 문화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타이완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했습니다. 타이완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다양한 창작 활동을 통해 이 땅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외국기업 사장에서 타이완 전역을 누빈 문화인까지, 왕하오이는 평생을 타이완에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빛나고 찬란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林玫妮,「王浩一:學習孤獨、刁鑽信仰,掌握退休主導權」,退休好幸福。
2. 黃韋維,「從外商菁英到走遍台南街巷,小吃教主王浩一改寫被離職人生」,alive。
3. 羅建怡,「500碗評審專訪/王浩一:迷戀於小吃的溯源 就像經濟實惠的歷史走趟」,500輯。
4. 王寶兒,「作家王浩一辭世 文化部長李遠哀悼」,中央社。